83화. 이엔과 리사
마차에서 세린이 사라진 후, 이엔은 등에 상처가 가득한 리사를 데리고 깊은 숲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서둘러 제 주머니 속에 있던 포션을 꺼냈다.
“리사님... 등을 치료해야 합니다. 포션을 사용할 것이니 등을 제 방향으로...”
망설이는 이엔의 기색을 읽으며 리사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등을 이엔에게 보여주며 훌렁 제복을 벗어던졌다.
“...!!!!”
이엔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지며 다급히 리사의 등에서 눈을 멀리하고 말했다.
“공녀!! 그, 그 옷은 다 벗지 마시고 상처만 보일 정도로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뭔 개소리야? 잘못하다가는 살이랑 옷이 붙어서 치료가 될 수 도 있다고. 내 등에 옷 딱지가 한 장이라도 붙어버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뇨....”
“그럼 빨리해! 아파죽겠으니까!”
“네.....”
뒤 돌아서 보이지 않는 리사의 눈이 아마도 활활 불타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고 포션을 들었다.
그리고 리사의 상처를 바라보며 포션을 뿌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그 불덩어리에게서 제이와 세린을 지키기 위해 등을 내줬으니 어쩌면 당연한 깊이였다.
이 상처를 가지고 암살자들을 죽였다고...?
정말 대단한 기사였다.
아까 전, 마주칠 때에도 그녀가 조금만 검을 헛디뎠으면 제 목은 날아갔을 것이다.
‘대단한 거야... 상처에 비해서 몸에 흔들림이 없으셔...’
이엔은 그런 리사의 상처가 점차 아물어 가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작은 등에 생긴 흉한 상처와 화상은 로레인의 포션을 통해서 점차 하얀 피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흉터가 남지 않을 것 같군요.”
“그렇겠지. 대마법사의 포션인데...”
리사는 툴툴거리며 대답을 한 후 고개를 뒤로 돌려 이엔을 바라보았다.
“.....?”
이엔은 제 눈과 마주치는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며 당황했다.
할 말이 있나...?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리사의 눈매가 달빛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위로 길고 고운 속눈썹이 팔랑였다.
이엔은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정처 없이 눈을 굴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하실 말씀이라도...”
“멀었어?”
“... 네?”
“치료 아직 멀었냐고!”
“아!! 다 됐습니다!”
이엔은 서둘러 포션의 뚜껑을 닫고 뒤를 돌아 리사에게서 열 걸음 멀어졌다.
리사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지었고 매우 빠른 속도로 제복을 다시 걸쳐 입었다.
“야.”
“네?”
“가자. 일단 마차가 있던 곳에서부터 흔적을 찾자고.”
“아...! 네!”
그리고 앞장을 서서 걸어가는 리사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리사의 뒤를 따르던 이엔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의 망가진 제복으로 갔다.
그녀의 제복이 구멍이 크게 나서 엉망이었다.
그러나 상처 없는 하얗고 매끈한 등에 이엔이 안도했다.
‘다행이야. 정말 상처가 없어지셨어...’
그러다 이엔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 음?”
가만히 리사의 등을 살피던 이엔이 곧 그 이상한 점을 깨닫고 서둘러 리사의 앞으로 달려갔다.
“리사님!”
“.... 뭐야?”
리사의 눈이 찌푸려졌지만 곧 이엔이 벗어서 건네준 제복의 겉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이거 뭐?”
“지금 뒤에 구멍이 나셔서 피부가 보이십니다. 암살자의 칼에 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시니 부디 입어주세요.”
“.... 그런 개밥들한테는 칼도 안 스칠 텐데...”
“그, 그럼 제가 보기 힘들어서....”
“.... 네 마음 따위 알게 뭐야.”
“리사님...”
“.......”
이엔의 당황하는 얼굴을 본 리사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엔의 겉옷을 받아 입었다.
그리고 “됐지?”하고 대답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엔은 조금 안도가 섞인 얼굴로 서둘러 리사를 따라 이동했다.
부서진 마차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흔적을 찾던 리사는 이엔이 트레일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었고 세린과 제이, 그리고 황자에게서 어떤 위험상황이 있는지 몰랐으니까.
달려가는 리사와 이엔의 귀에 날카로운 검 날의 소리가 들렸다.
리사와 이엔은 가던 방향 그대로 자리에서 멈췄고 동시에 그녀와 그의 발아래에 단검이 박혔다.
“.....”
이엔은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며 주변을 살폈고 리사는 천천히 몸을 세워 비웃음을 가득 지었다.
“X밥들이 XX하고 자빠졌네....”
험한 말을 내뱉으며 제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린 리사는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을 쥐고 나무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서걱!!!
나무 위에서부터 들리는 무언가를 베는 소음과 함께 어떤 조각들이 땅에 떨어졌다.
이엔은 가만히 그 장면을 살펴보다가 천천히 뽑았던 검을 검 집에 다시 넣었다.
후두둑!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 무언가와 함께 리사가 땅에 내려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들리는 마력의 파동과 발소리들을 들으며 리사는 이엔을 향해 말했다.
“야.”
“... 네.”
“잘 따라와.”
“.... 네?”
이엔의 되 물음과 동시에 리사가 사라졌다.
“리사님!!”
놀란 이엔이 서둘러 발에 마력을 끌어 모으고 리사를 쫓았다.
파바바밧!!
나무를 스쳐 지나가며 리사를 쫓던 이엔은 리사가 도중에 멈춘 자리에서 급히 속도를 줄이고 멈췄다.
그리고 멈추자마자 리사를 향해 눈썹을 괴롭게 일그러트리며 따지려던 때였다.
“.... 리사님...!”
“전하 무사하셨네요.”
리사의 묵묵한 말 속에 들린 '전하'라는 단어에 이엔이 커진 눈으로 리사의 건너편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트레일을 발견했다.
“.... 전하!!”
이엔의 안도가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트레일이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그의 밑으로 여러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있었고 트레일이 쥔 검 날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트레일은 섬뜩한 눈으로 이엔과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차에 세린은 없었겠지.”
“네.”
“젠장...”
리사의 대답에 트레일이 비웃음을 지으며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엔과 리사를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난 남부황성으로 갈 거다. 세린이 지금 그 곳으로 잡혀 갔어.”
“!!!!!”
이엔과 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트레일은 그런 두 사람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지금 남부제국의 황성으로 이동하면서 암살자들이고 뭐고 씨를 다 말려버려.”
“혼자서 성으로 들어가셔도 괜찮겠습니까.”
리사의 물음에 트레일의 비웃음을 지었다.
“내 걱정 말고 너희나 걱정해.”
그리고 트레일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리사는 그런 트레일을 바라보며 이엔을 향해 말했다.
“황성 주변의 모든 암살자들을 다 죽이도록 해야겠어. 이엔 흩어진다.”
“.... 네.”
리사는 이엔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르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엔은 그런 리사와 트레일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숲 안쪽을 향해 달렸다.
기척이라는 모든 기척을 유의하며 보이는 족족 암살자들을 베어냈다.
그러다 남부제국에 잡혀간 세린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트레일이 갔으니 그녀가 무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알지만 이엔은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을 제 눈에 담기 전까지는 이 걱정을 멈출 수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한심해....’
그녀가 그 위기에 부딪히는 순간까지 또 지키지 못했다.
이래놓고 호위기사라고?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졌다.
이엔은 무차별적으로 암살자들을 베어내며 나무 위로 올랐다.
그리고 올라서자마자 느껴지는 살기에 서둘러 검으로 제 몸을 보호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두운 곳에서부터 누군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살벌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엔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하!!”
“이엔이었나.”
바로 테오였다.
테오는 붉은 마력이 휘감긴 검을 들고 이엔에게 다가왔다.
이엔은 서둘러 검을 검 집에 넣고 예의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테오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은 얼추 알고 있다. 살펴보지 않은 숲길은 어디냐.”
“.... 남서 방향을 아직 살피지 않았습니다.”
“리사경도 그 곳으로 향했다. 난 황성으로 갈 것이니 너희는 숲길을 맡아라.”
“.... 네.”
테오는 뒤를 돌아 천천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에서부터 느껴지는 분노를 보고 이엔은 남부의 파멸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부황성도 황족들도 무사하지는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리사를 돕기 위해 달렸다.
빠르게 숲을 달리기 시작한 이엔은 남서쪽으로 향할수록 점점 거대하게 느껴지는 살기의 존재에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두 명의 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옅게 들리는 누군가의 음성은 이엔의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이 음성은 세린의 것이었다.
‘전하....!’
어째서 이곳에...!
이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파밧!!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이엔은 세린의 음성과 섞인 살기를 향해 검을 들었고 동시에 옆 나무에서부터 리사가 검을 들고 빠르게 나타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눈앞에 존재하는 암살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날카로운 검의 소리와 함께 동굴에 착지한 두 사람은 세린과 제이의 모습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리사는 피범벅이 된 제이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섰다.
“미친놈...!”
그리고 서둘러 겉옷의 주머니에 있던 포션을 꺼내었다.
“리사경.... 제이공자가.... 흑”
세린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리사가 말했다.
“이 정도에 죽을 녀석이었으면 제 오라비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기보다 지독한 놈이니 안심하시길...”
“.... 경...”
이엔은 눈물을 흘리는 세린에게 다가가 서둘러 그녀의 족쇄를 풀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동시에 리사는 제이의 셔츠를 찢어 그의 상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아까 마법으로 다친 제 자신보다 훨씬 깊었다.
피도 어마무시하게 흘렸을 것이 분명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리사가 포션의 뚜껑을 열고 그의 등에 아낌없이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