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사랑하고 있었어.
어두운 곳을 밝힐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분홍빛을 가진 그 사람은 붉은 눈동자로 냉정하게 브론을 응시하고 있었다.
침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울릴 만큼 조용한 그 침묵 속에서 황제가 비소를 지었다.
“남부는....”
“.....”
“우리가 우습게 보였나보군.”
브론의 눈이 긴장을 담았다.
황제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려 깍지를 끼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새로운 집이라고 생각하도록.”
“.....?”
“이제부터 너는 이곳에서 남부의 유일한 마법사로써 생체실험을 하게 될 거야.”
“...!!!!!”
브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황제는 순식간에 브론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꺾어버렸다.
우드득!!
“끄아악!!!”
“더러운 손으로 내 자식들을 만지지 말거라.”
“끄윽!! 으으악!”
“시끄럽군.”
황제는 비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며 그의 손에 족쇄를 걸었다.
철컹!
“...!!!!”
브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황제는 그런 브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실험은 친히 짐이 진행해주도록 하겠다.”
“!!!!”
브론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로레인이 말해준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
같은 시각, 제이는 어두운 숲을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세린은 그런 제이의 품에 안겨 뒤에서 쫓아오는 또 다른 무리들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
제이의 속도가 워낙 빨라서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지만 도중에 멈춘다면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세린의 손이 긴장으로 떨려왔다.
제이의 등에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그녀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안고 이 속도로 뛰는 제이가 멀쩡할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하얀 셔츠는 이미 제 색을 잃었다.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흐르려는 눈물을 참았다.
자신을 지키려 필사적인 이 사람이 너무도 걱정되어서 눈물이 났다.
이러다 그가 죽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불안감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너무도 위급했다.
‘이대로 가다간 둘 다 죽어....’
제이의 푸른 눈이 굳은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휘리릭!!
뒤에서 날아오는 단검들을 피하며 제이는 세린을 놓지 않았다.
놓아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를 많이 흘려서 점점 속도가 더뎌지고 있었다.
제이의 푸른 눈동자에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휘리릭!!! 퍽!
“큭!”
“제이공자..!”
결국 뒤에서 던진 단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등을 내주었다.
제이는 이를 악 물고 다가온 고통을 버텼다.
한참을 또 달리던 제이가 이윽고 세린을 안고 급히 자리에서 멈췄다.
촤라라락!
멈추는 반동으로 흩뿌려지는 흙들이 그의 발끝에 존재하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막다른 길이었다.
“!!!!”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곧 암살자들이 몰려올 것이었다.
제이는 천천히 호흡을 다듬으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제이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한계였다.
그녀가 워프를 할 수 있도록 손에 있는 족쇄를 풀어야 하지만 족쇄를 풀 시간이 없었다.
로레인이 달아준 마력단추들도 모두 뜯어져있었고 지금 자신도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현저히 적었다.
“......”
제이의 눈이 침착하게 달려오는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혈색을 잃은 입술을 깨물며 제이가 세린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전하.”
“.......”
“저를 믿습니까?”
“..... 네?”
세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니... 질문이 틀렸습니다.”
제이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누구보다 근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믿어주십시오.”
휙!
“...???!!!”
그리고 세린을 제 품에 꽉 껴안고 아찔한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단검들이 날아와 박혔다.
세린은 떨어지는 그 순간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제 눈에 담았다.
그 푸른 눈동자 속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세린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세린은 제이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뚝뚝
차가운 물방울이 세린의 피부에 닿았다.
“으윽....”
시야가 아직 어지러워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은 세린은 질끈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날렵한 콧대, 살짝 벌어진 생기를 잃은 입술이었다.
살짝 젖은 잘생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
멍하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세린은 이내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일어나며 외쳤다.
“제이공자!!!”
다급한 눈으로 눈을 감고 있는 제이를 살펴본 세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 젖어버린 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쓰러져있는 제이의 등은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등을 적신 것이 물 때문인지 피 때문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고 그의 숨소리도 매우 거칠었다.
이미 생기를 잃은 입술 사이로 그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등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공자...!”
세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다급히 제 몸을 더듬은 세린은 자신의 옷도 젖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절벽 아래에 물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과 동시에 제 옷에 달려 있어야 할 로레인의 단추들이 다 뜯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션도 당연히 없었다.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져갔다.
서둘러 손에 감긴 족쇄를 풀기 위해 손톱을 족쇄의 틈새로 우겨넣고 잡아당기며 노력한 세린은 손목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
족쇄로 인해 마력을 여전히 사용할 수 없어 제이의 치료가 불가능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생기를 빼앗겨가는 제이의 모습이 세린의 가슴을 무섭도록 섬뜩하게 만들었다.
세린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제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가워...! 일단 지혈을.. 아니 지혈을 할 때 필요한 건....’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세린의 눈물이 천천히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애처로운 눈물이 이윽고 제이의 볼에 떨어졌고 아주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듯이 제이의 풍성한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동공이 세린을 향해 올라갔다.
제이는 그의 눈가를 어지럽히는 하얀 머리카락들 사이로 울고 있는 세린을 시야에 온전히 담았다.
세린은 너무도 슬프게 울고 있었다.
제이는 아주 미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길고 단단한 손이 세린의 볼에 닿았다.
거칠어진 목소리로 제이가 입을 열었다.
“울지 마시길...”
“... 제이공자...”
“당신이 울면...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 공자....”
“그러니까... 웃어주세요...”
세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제이는 흐릿한 시야에서 유독 빛나는 그 눈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항상... 그랬죠...”
“......”
“... 매일 전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 미소가 매일같이 보고 싶어서...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려가며 황성으로 달려갔습니다....”
“.....”
세린은 천천히 제이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눈물을 삼켰다.
“제 눈앞에 전하께서 없으면 불안해져서... 그런데... 제 앞에 있어도 불안합니다...”
제이의 초췌한 눈가 속 푸른 눈동자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전하께서 시선을 주는 모든 것들에 불쾌해 하고 유치한 질투를 하고... 당신의 모든 것들에 욕심이 납니다... 점점 멍청해지고...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제이...?”
“누가 저한테 그랬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
세린의 눈이 커졌고 제이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맞아요....”
제이는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눈을 작게 휘어 웃으며 힘없이 말했다.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힘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이 정처 없이 떨리고 있음에 세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이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의식을 잃어갔다.
그녀의 볼을 쓸어주던 거칠고 차가운 손은 스르륵 동굴바닥을 향해 쓰러져갔고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세린은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쏟으며 허겁지겁 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 정신 차려!!”
“.....”
“눈 떠요!!! 제이!!! 제이공자!!”
“......”
의식을 잃은 제이의 숨이 천천히 멎어가고 있었다.
세린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지금 그런 말을 내뱉고 나서 이런 식으로 굴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세린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린은 정처 없이 떨리는 두 손으로 제이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죽지 마...!!!”
제이의 굳게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죽지 마.... 윽...”
세린이 천천히 제이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제발.....”
무서웠다.
이러다 정말 그가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난... 나는 도대체....
부스럭!
“..!!!!”
세린의 눈이 번쩍 뜨이며 서둘러 쓰러져있는 제이의 앞으로 나섰다.
한 팔을 뻗어 제이를 감싼 세린은 불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 밖에서는 어두운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세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암살자....!!’
입술을 꾹 깨문 세린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몸을 던지는 암살자들에게서 제이를 감추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눈물을 머금고 질끈 감은 세린의 앞으로 암살자들이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파밧!!!
그리고 그런 암살자들의 뒤로 두 인영이 뛰어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점프를 선보이며 검을 들은 두 사람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암살자들을 모두 베어냈다.
서걱!!
덩어리가 잘려나간 소리와 함께 동굴 안으로 착지한 두 사람은 달빛을 받아가며 세린을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천천히 눈을 뜬 세린은 자신의 앞에 듬직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눈물을 머금고 외쳤다.
“이엔!!! 리사!!!”
두 사람은 바로 이엔과 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