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형한테 이를 거야
세린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브론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헤일리가 일행을 찾겠다고 했으니 자신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세린을 절망시켰다.
지금 일행에게 생긴 일들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세린의 눈시울이 뜨거워져갔다.
쿠구구구궁!
“...!!!”
바닥을 울리는 거대한 소음에 세린의 눈이 크게 떠졌고 브론의 미간이 좁아졌다.
조용한 공간에서는 그 소음이 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음 속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섞여있는 듯했다.
브론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세린에게 말했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
“......”
그리고 브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세린은 브론이 사라지자마자 손에 달린 족쇄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컥 철컹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족쇄에 다시 힘을 잃어갔다.
‘제발.....’
모두 무사하기를...
‘제발...!!’
모두 다치지 않았기를...
세린이 입술을 깨물고 족쇄를 벗기려 애를 썼다.
두꺼운 족쇄에 손톱이 긁혀 이리 저리 손톱이 깨지고 피가 났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족쇄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음에 세린은 한 번 더 절망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라고...?’
상처가 난 손톱사이로 붉은 피가 흘렀다.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눈물을 흘러내림과 동시에 문이 큰 소음을 내며 부서졌다.
콰쾅!!
“......!!”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고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닮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세린의 눈이 커지고 동시에 제이의 눈도 커졌다.
제이는 시야에 온전히 담긴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백해진 얼굴과 생기가 사라져가는 입술.
눈물이 가득한 연두색 눈동자.
얇은 그녀의 손목을 감싼 족쇄와 침대에 고정된 쇠사슬.
제이의 손등과 목에 힘줄이 두드러졌다.
지독한 분노가 그를 덮쳤다.
“제이공자....!”
그러나 제이는 세린의 가녀린 음성에 다시 이성을 찾았다.
심호흡을 할 틈도 없이 제이는 세린에게 달려가 그녀의 족쇄에 연결된 쇠사슬을 맨 손으로 끊었다.
투두둑!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리로...”
그리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세린을 안아 올렸다.
자연스럽게 제이의 어깨에 팔을 두른 세린은 커다란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떨구며 물었다.
“정말... 제이공자가 맞나요....? 다친 곳은 없나요?”
제이는 잠깐 사이에 말라 보이는 세린을 슬프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전하. 이제 집으로 돌아가죠.”
“.....”
세린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분노를 삭이며 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제이의 걸음이 문 밖을 빠져나간 것과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광!!
“꺅!!!”
세린의 비명과 함께 바닥이 갈라지며 무너졌다.
주변에 자욱한 먼지들 틈에서 천천히 눈을 뜬 세린은 여전히 자신이 제이의 품 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제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을 확인하자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세린은 서둘러 시선을 돌려 제이의 몸을 확인했고 그의 어깨 뒤로 얹은 손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만져지자 천천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붉은 피가 가득한 그 등에 세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이는 그런 세린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저를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브론으로 인해서 말이다.
“네가 감히....”
브론의 눈동자가 제이를 찢어 죽일 것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제이도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로 브론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너 따위 하등생물이 감히 손댈 분이 아니시다.”
“.... 그녀를 내놔.”
“꺼져라. 쓰레기가 아니고서는 이곳에 네게 줄만한 것 따위는 없다.”
“무력으로 해결해야 말을 듣겠군.”
브론이 한 손을 높이 들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함인 것을 눈치를 채자마자 제이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계단을 뛰어올랐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지는 제이를 브론이 눈으로 쫓으며 마법을 난사했다.
쾅쾅!!! 쿠콰과광!!!
터져가는 마력들의 폭발 속에서 제이는 황성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뒤를 힐끗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 내렸다.
“꺅!!!”
세린이 놀라 제이를 꼭 껴안았고 매우 안정적인 동작으로 착지한 제이는 황성의 벽을 넘어 숲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브론은 그런 제이가 달려가는 방향을 향해 손을 높이 올렸다.
숲 전체를 날려버리려는 생각이었다.
본인이 가지지 못한다면 모두 죽여 버릴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타오르는 눈동자로 거대한 마력을 모은 브론을 향해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챙그랑!!!
“큭!!!”
브론의 몸을 보호하던 막이 깨졌다.
브론이 서둘러 뒤를 바라보자 그 곳에는 잔뜩 화가 난 트레일이 서있었다.
그의 손에 쥐여진 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브론이 분노에 찬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
“네까짓 것이 날 죽이겠다고 덤비는 것이냐.”
“네 동생한테 마법인장을 왜 새겼지? 가족이 아니었나.”
트레일의 물음에 브론이 웃었다.
“가족 따위는 애초에 연결된 핏줄만 같은 남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 그래서 마법인장을 새겨서 황녀를 이용하기라도 한 거냐.”
“우습군. 그 애는 운이 좋은 편인거야.”
브론이 시원하게 미소를 지르며 두 팔을 벌렸다.
“이 내가 하는 일들을 봤어도 보지 못한 척, 모르는 척을 했기에 내가 아껴서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내 곁에 두었거든. 그것이 아니었으면 지금 다른 형제들 꼴이 되었을 거야. 그 조용한 성격덕분에 생을 연장한 것이지.”
“다른 황족들은 어찌한 거지.”
“죽였어. 내 앞날에 방해가 되어서.”
“.......”
트레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가족이라고?
이따위 생각을 가진 새끼가 황제가 된다고?
트레일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진짜 사상 최악의 쓰레기네...”
“너희 같은 가족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렇군... 그럼 이제 널 죽여도 되는 것이냐.”
“어떻게 죽이려나... 네 마력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내 눈에도 보이는 것을.”
브론의 비웃음에 트레일이 제 옷의 단추를 투둑 뜯었다.
그리고 트레일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한테 이를 거야.”
“.... 뭐라?”
브론의 미간이 좁아진 것과 동시에 트레일은 단추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형, 살려줘...”
그리고 누구보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단추를 향해 중얼거리자 번쩍 거대한 빛이 단추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눈부신 빛에 브론이 미간을 좁혔고 천천히 가라앉은 빛 사이로 한 인영이 보였다.
연한 분홍색의 긴 머리를 찰랑이며 아름다운 제비꽃 색의 눈동자를 가진 눈부신 그 사람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이 매서운 눈동자로 물었다.
“누구지....”
트레일의 입술이 약간 호선을 그렸다.
빛과 함께 나타난 로레인은 브론을 향해 정확히 시선을 올리며 살기를 가득 담고 말했다.
“누가 우리 동생을 힘들게 했을까...?”
브론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로레인의 화사한 얼굴도 살벌한 기세를 감추지 않고 들어내며 말했다.
남색의 눈동자와 보라색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로레인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죽여 버리고 싶게...”
대마법사들의 살기가 황궁의 옥상에서부터 자욱하게 퍼졌다.
브론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트레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한다는 것이... 제 형제를 부르는 것이라고?”
트레일은 그런 브론을 무시하며 로레인을 향해 말했다.
“형... 저 새끼 마탑 후원자였어...”
“......”
“그리고 세린도 납치하고 막... 나도 죽이려고 하고...”
“......”
로레인의 이마에 가는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트레일은 그런 로레인을 향해 천천히 제 손을 뻗어 손바닥에 잔뜩 묻은 진득한 피를 보여주었다.
로레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브론을 시야에 담았다.
“재밌네...”
“... 나도 웃겨죽겠군. 그건 누가 봐도 저 녀석 피가 아니잖아.”
“내 동생 손이 남부새끼들 피 때문에 더러워졌잖아.”
“......”
브론이 질린 눈으로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로레인은 보라색의 눈동자를 곱게 휘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남부를 이제 먹어야겠어.”
“... 하하... 형제들끼리 아주 단체로 돌았군...”
“너 따위가 황제가 된다면 남부는 그 날로 역사가 끊기겠지. 아 오늘도 마찬가지겠구나.”
“......”
“내가 남부를 오늘로부터 지도에서 지워줄 테니까.”
브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것과 동시에 수십 개의 얼음기둥을 만들어 로레인에게로 내려쳤다.
로레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생성한 얼음기둥의 수만큼 막을 만들었다.
얼음기둥이 막에 부딪치며 부서졌고 로레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애송이가 어깨너머로만 마법을 배웠나보구나.”
“.......”
브론의 손이 분노로 떨려왔다.
“진짜 동북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브론이 두 손을 높이 들고 마력을 모았다.
방대한 마력들은 브론의 손 안으로 모이며 거대한 구를 형성했고 로레인은 그런 브론을 바라보며 이내 싱긋 웃었다.
“음... 좋아! 결정했다.”
브론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로레인의 제비꽃 눈동자가 살기를 담고 브론을 바라보았다.
“네게 내릴 벌은 이것으로 하도록 하자.”
그리고 로레인의 손가락이 가볍게 부딪혀 튕기며 소리를 내었고 딱! 소리와 함께 브론이 사라졌다.
트레일은 비어버린 허공에서 브론을 찾다가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형님... 어디로 보낸 거예요...?”
“음.....”
로레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
“......”
트레일의 온 몸에 소름이 돋은 것과 동시에 브론은 허공에 모아놓은 마력을 잃고 강제로 워프 되었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브론은 거대한 철장을 배경으로 서있었고 그의 건너편에는 한 남자가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브론은 침착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