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브론의 정체
세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이 매우 고요했고 향긋한 꽃냄새가 났다.
‘여긴... 어디지?’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초점을 잡아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마차를 덮치기 직전부터 기억이 없었다.
제이공자와와 리사경이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일까?
오빠는 무사한 걸까? 이엔은?
아니 애초에 리사경과 제이공자도 그 불덩어리를 정면에 받았다면 많이 위험했을 것이다.
세린은 눈이 올바른 초점을 맞추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컹!
“....?”
그리고 자신의 양 손에 굳게 잠겨있는 묵직한 족쇄를 바라보며 생각을 멈췄다.
‘이게 뭐지...? 이게 뭔데 내 손에...’
제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족쇄는 견고해 보이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큰 눈을 깜빡이며 쇠사슬이 종점으로 시선을 옮긴 세린은 사슬이 침대의 기둥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앉은 이 자리가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 손을 올리자 쇠사슬이 침대의 기둥에 부딪치며 철컹하고 소름 돋는 소리를 내었다.
세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여기가 어디인거야?? 내가 왜, , , !’
세린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창문이 없는 빈 방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고 바닥을 푹신하게 만드는 양털카펫이 존재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은은한 불을 밝히는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바라보며 세린은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누가 마법을 사용해서 마차에 불덩어리를 쏘았어... 그리고 그런 날 지켜주려고 제이공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고 그 뒤를 리사경이 막았어. 그 다음에 폭발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난 여기라는...’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누가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자신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정하자... 일단 마법으로 이 족쇄를 먼저 풀어버리자. 그리고 워프를 해서 오빠를... 친구들을 찾는 거야!’
세린은 심호흡을 하며 이내 마력을 움직이기 위해 눈을 감았다.
“.....?”
그러나 세린의 안으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을 머금은 연두 빛 눈동자가 다시 눈을 감고 마력에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왜... 왜 안 되는 거야??”
족쇄가 단단히 붙어있는 양 손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세린은 전혀 마력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신체를 원망했다.
‘이럴 때 하필...!!!’
저벅 저벅
“....!”
누가 멀리서 복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이 울리는 느낌으로 볼 때 지하처럼 깊은 공간은 아닌 듯 했다.
세린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철컥
끼이이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고 이내 누군가가 들어왔다.
세린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황녀”
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말끔한 얼굴의 브론이었다.
시원하게 빛나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가득 담겼다.
세린은 동그란 눈을 굳히며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신호가 그녀의 머리를 울렸다.
브론은 천천히 세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와 털썩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세린은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지려 뒤로 이동했으나 철컹거리며 그녀를 붙잡는 쇠사슬에 의해 퇴로가 막혔다.
브론은 그런 세린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여기는 어디에요...!”
세린의 다급한 음성에 브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기는 남부제국입니다. 이제 당신이 머물 곳은 여기고요.”
세린의 미간이 왈칵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세요! 대체 왜 이런 짓을... 얼른 풀어주세요.”
브론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풀어줄 것이었다면 이런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어.”
“....!!”
“그리고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
“네가 날 거절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이지.”
“....!”
“네가 너무 탐이 나서 벌여놓은 판이야. 동북에서 남부로 돌아오는 동안 널 데리고 올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계획은 생각보다 잘 진행되고 있지.”
세린의 입술마저 창백해지며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무슨 말을...!”
“마차가 터지기 전에 널 옮긴 것이 누구라고 생각해?”
“......”
브론이 부드럽게 세린의 머리카락을 쥐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동북제국에만 마법사가 존재한 것이 아니야. 황녀.”
“!!!!”
“나도 마법사거든.”
세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브론은 그런 세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피를 얻었기 때문에 널 옮기는 것이 가능해졌어. 네 손등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미안했지만... 널 데리고 오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
그럼 장미 정원에서 난 상처는 브론의 계획 중의 일부였다는 것인가?
세린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있다가 밥을 가지고 올 테니 기다리도록 해.”
“오빠를... 내 친구들을 어떻게 한 거야??!!”
브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세린이 다급히 외쳤다.
브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봤자 좋을 것은 없어.”
그리고 냉정히 뒤를 돌아 문을 닫고 사라졌다.
브론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면서 세린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갔다.
모두 무사한 것일까?
다친 곳은 없는 것일까?
온 몸을 감싼 두려움과 불안함에 세린은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무서웠다.
자신의 소중한 이들이 위험해 빠졌을까봐 너무도 걱정이 되어 심장이 아파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세린이 있는 방 앞에 또 다른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작은 인영의 구두소리에 세린이 다급히 눈물을 닦았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펴며 긴장한 세린이 문을 주시했고 곧이어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 사람은 헤일리였다.
“.....”
세린의 얼굴이 단번에 괴롭게 일그러졌다.
헤일리마저 이 일에 가담했을 것이란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여기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세린의 눈에서 진득한 경계와 원망을 읽은 헤일리는 천천히 세린이 앉은 침대로 다가섰다.
그리고 분홍빛의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미안해요...”
“.....?”
세린의 동그란 눈이 불신을 담으며 일그러졌다.
헤일리는 그저 세린의 손을 묶어놓은 족쇄를 바라보며 슬프게 미간을 좁혔다.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말했잖아요. 더 이상 오라버니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
“오라버니의 시선이 더 이상 당신에게 가지 않도록... 내가 말했잖아요... 경고했잖아요...”
“... 황녀 헤일리...”
세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헤일리는 천천히 세린의 손을 잡아주며 물었다.
“같이 온 일행은 누구였나요...”
“......”
“혹시... 3황자 전하도 있으셨나요?”
“......”
세린의 눈에서 긍정을 읽은 헤일리가 창백해진 낯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왔구나...
그가 이 지옥으로 와버렸어.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섞이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는데...!
헤일리는 잔뜩 일그러진 눈매에 매달린 눈물을 무시하며 세린을 향해 말했다.
“세린... 당신은 마법사라고 들었어요.”
“......”
“이 족쇄는 마력을 다루는 죄인들에게 채워 마력을 차단하는 마도구예요. 신체를 압박하지는 않지만 이걸 몸에 차고 있는 이상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
세린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어두워졌다.
헤일리는 그런 세린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이 족쇄를 풀어줄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 되든 일행을 찾아볼 테니... 세린은 조금만 버텨줘요.”
세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헤일리... 당신은 왜 나를...”
왜 나를 돕는 거죠?
삼켜진 세린의 말을 알아들은 헤일리는 슬프게 웃었다.
헤일리의 시선 속에서 세린의 얼굴에 트레일의 모습이 비춰졌다.
헤일리는 굳어가는 시선으로 말했다.
“오라버니로 인해서... 더 이상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 해요...”
“......”
“세린... 많이 힘들겠지만 약속할게요. 반드시 세린이 나갈 수 있도록 서둘러 당신의 일행을 찾을게요. 그리고 만약 나가게 된다면...”
“.....”
“부디... 오라버니를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려주세요.”
“!!!!”
헤일리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를 죄인으로 잡아들여 죄목에 맞게 벌을 주세요. 사형이 되더라도 멈추지 마세요.”
“헤일리...!”
“아직 세린에게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
헤일리는 세린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입을 열려하였다.
그러나 이내 자리에서 멈추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가 올 거예요. 조금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세린... 부디.”
“.... 헤일리!”
“미안해요.”
헤일리는 서둘러 뒤를 돌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세린은 멍하니 그런 헤일리의 푸른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믿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같은 피를 이은 핏줄이 소중한 것이 아니었나?
죄인으로 그를 잡으라고?
헤일리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세린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 손을 잡은 헤일리의 손길이 정처 없이 떨렸던 것과 슬픔에 젖은 눈동자가 계속 세린의 마음에 남았다.
세린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며 눈을 감았다.
세린의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려왔다.
복도를 거닐던 헤일리의 앞에 브론이 나타났다.
“헤일리.”
“... 오라버니.”
헤일리가 고개를 부드럽게 숙이자 브론이 물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 여전하십니다. 숨소리가 거치신 것으로 볼 때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군.”
브론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섬뜩하게 빛나보였고 그의 손에는 부드러운 빵과 스프가 담겨 있는 그릇이 들려 있었다.
헤일리는 그 음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그를 천천히 지나쳤다.
브론은 그런 헤일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세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브론의 남색 눈동자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유독 섬뜩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