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76화 (76/218)

76화. 남부로 출발

황제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다가도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마음을 가졌다.

트레일을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트레일이 간다고 하면 황제도 마음을 놓고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세린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마탑의 사건 이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인 마력도 현저히 적어졌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늘고 여린 신체도 걱정스러웠다.

마스터를 4명이나 붙여도 제 눈에 세린이 보이지 않으면 너무 불안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지 못하게 그녀를 막고 성 안에서만 감싸는 것도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세린에게 말했다.

“네 안전이 우리에게는 최우선이란다...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안전하게 잘 다녀온다고만 약속을 해준다면 나도 오빠들도 안심할 것이다.”

세린은 황제의 말에 얼굴을 슬프게 일그러트리며 서둘러 황제의 품에 안겼다.

자신의 품에 폭 안기는 작디작은 딸이 애틋했다.

황제는 세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약속하겠느냐?”

“당연하죠!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요!”

“그래.”

황제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되었다.

트레일도 옆에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리사 녀석이 함께 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도 같이 가는 것이니 상관이 없었다.

브론인지 블록인지 절대 세린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테오와 로레인은 그런 트레일의 생각이 보이는 듯해서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 트레일이라면 세린을 지키고도 남을 실력이니 애써 불안감을 무시하며 넘겼다.

그렇게 세린이 남부로 가는 시간이 점차 다가왔다.

*

함께 남부로 이동할 인원을 추리던 황제에게 아인대공이 말했다.

“폐하, 마스터라면 저희 아들도 입문을 하였지요.”

“.... 그래서?”

“저희 아들은 일반 기사들과는 다른 검술과 재주가 있습니다. 만일을 대비하기에는 그 아이만큼 적절한 녀석이 없겠지요.”

“.....”

“아니면 다른 마스터라도 있습니까?”

제국의 마스터는 황제까지 포함해서 8명이었다.

황제와 테오, 트레일, 그리고 리사와 제이, 이엔이었고 나머지 인원은 기사단을 나오고 휴식기간을 취하는 전직 2기사단장과 현재 근무 중인 1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그만둔 기사를 세린에게 붙일 수는 없었고 1기사단 단장인 트레일을 세린의 남부여행에 함께 보냈는데 부단장까지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남은 녀석은 결국 제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황제는 심술이 났다.

사랑하는 딸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든 남자들은 다 늑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딸의 안전을 위한 중요한 사항이었다.

황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제이를 채용하도록 하지.”

“아들에게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도록.”

황제는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결정을 내린 사항에 번복을 주는 남자는 아니지만 저 유치한 태도가 무척 우스워서 대공은 피식 웃었다.

오랜 전장을 함께 누빈 동료이자 든든했던 친구는 갈수록 어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공은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아들의 방 앞에서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아버지.”

‘귀신같은 놈...’ 노크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맞히는 제이의 능력이 참 무서웠다.

대공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정장바지 위에 하얀 와이셔츠를 쇄골 밑까지 풀어헤친 제이는 대공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달빛을 받아 고고하게 빛나는 외모와 머리카락이 제 아들이지만 참 근사했다.

“황녀전하께서 남부제국에 오시라는 초대장을 받았더구나.”

“......”

제이의 아름다운 눈썹이 소리도 없이 일그러졌다.

“그 황태자한테 온 건가요?”

“집이니까 남부황태자에 대한 말투는 봐주마...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구나.”

“황제폐하께서 허락을 해주셨나요? 아니 애초에 전하께서 가고 싶다고 하던가요?”

제이의 다급한 듯 느껴지는 물음에 대공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너도 중증이구나.’ 싶은 것이 대공의 마음이었지만 애써 숨기며 담담히 말했다.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같이 호위 인원을 체크하던 차였는데...”

“제가 가고 싶습니다.”

“아직 내 말이 다 안 끝났는ㄷ...”

“여기 오신 것을 보면 저도 그 호위기사 인원에 포함이 되는 것이겠지요. 가겠습니다.”

“.....”

할 말을 잃은 대공은 이내 제 아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질 끌어봐야 제 아들 성격만 더러운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니 빨리 말해주고 빨리 끝내야 제 마음에 평화가 올 것 같았다.

“그러려무나. 내일 모레에 출발한다고 하니 철저히 준비를 하거라.”

“저 말고 또 누가 가는지요.”

“흠... 내가 알기로는 이엔이라는 전속 호위기사와 1기사단 단장과 2기사단 단장이 간다더구나.”

“... 리사도요...”

씁쓸한 물음에 대공이 시선을 피했다.

“그래... 리사도 간다.”

“....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기색이 어지간히도 리사가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했다.

하긴, 리사가 가면 황녀와 있을 시간이 아마도 대폭 줄어들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대공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뒤를 돌아 사라졌다.

자신은 일단 맡은 바를 다 해줬으니 나머지는 제 몫이었다.

대공은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돌아갔고 제이는 찝찝해진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밝게 빛나는 황성을 바라보던 제이는 이내 한숨을 쉬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일단 이것으로 만족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다음 날, 아침부터 세린은 멜의 분주한 모습을 구경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남부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를 최대한 가벼운 재질로 넣어야... 아니지 이왕이면 동북에서 유명한 드레스를 선보여서 동북만의 미를 알려주는 것도 좋은 기회인데...”

“멜... 그냥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은...”

“전하! 그런 말씀은 마세요! 남부에는 ‘미(美)’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한 것을요!”

“아... 그래? 그, 그럼 멜이 챙겨주는 데로 입을게...”

세린은 다시 멍을 때리며 멜이 준비하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허공에서 빛과 함께 로레인이 나타났다.

“오빠??”

“세린.”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로 웃으며 세린에게 다가간 로레인은 세린의 손에 가득 포션을 쥐어주었다.

“이건 뭐에요?”

“이제 너는 마력이 너무 적어졌잖아. 널 보호할 수단이 필요하니까... 상처에 뿌리면 바로 나을 수 있는 치료포션이야. 마스터가 4명이나 가는데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라도 없으면 오빠가 불안해서 안 될 것 같아.”

“와아! 고마워요.”

“그리고 이건 통신석이란다. 네 옷 단추에 달아 놓으면 좋겠어.”

“네!”

세린은 단추모양의 통신석을 쥐여 주는 로레인의 온기에 웃었다.

로레인은 부드럽게 세린의 볼을 쓸어주며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혹시 남부에서 동북으로 워프를 할 수는 있겠니?”

“아마 될 것 같아요, 북쪽에서 동쪽까지 워프를 할 때에도 그만큼의 마력을 사용했거든요.”

“그럼 다행이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워프단추도 달아놓자. 힐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니?”

“그게...”

여러 질문과 대답을 들었어도 로레인의 걱정이 멈추지 않았지만 이윽고 세린이 남부로 가는 날이 밝았다.

테오는 황성의 입구에서 대기하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이내 세린을 바라보았다.

“안전하게 잘 다녀왔으면 하는구나.”

“당연하죠!”

“그럼 한 번 안아 주거라.”

테오가 넓게 팔을 벌리며 말하자 세린이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사랑해요 오빠!”

작은 여동생을 품에 꼭 안아주며 테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세린은 로레인과 황제의 품에 안기며 일주일동안 그리울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갔다.

트레일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두 팔을 벌리며 테오를 바라보았다.

“형님 저도 안아드릴까요?”

“죽고 싶지 않거든 거기서 입 꾹 다물고 마차에 들어가 있어라.”

“너무하네... 나도 싫거든요? 하여간 농담도 몰라”

“농담이 네 마지막 유언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으에...”

트레일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테오는 피식 웃으며 그런 동생을 바라보다가 이내 세린도 마차에 오르는 것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동생들을 보내려니 발걸음이 계속 멈춰졌다.

일주일은 긴 시간도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어떤 시간보다 길었다.

그러다 밝게 웃으며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외치는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어떤 추억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벌써 기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8명은 거뜬하게 태울 수 있는 마차 안에는 트레일과 세린, 이엔과 리사, 제이까지 타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 리사와 트레일은 세린의 옆에 딱 붙어 지키고 있었고 제이와 이엔은 본의 아니게 그런 세린을 마주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빠, 남부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음... 마차를 타고 이동하려면 일주일은 걸릴지도 몰라.”

“일주일이나요?”

세린이 질린 얼굴로 말하자 트레일이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중간마다 마을에 들어서 휴식도 취할 것이고 여유있게 가는 것을 계획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알고 있지만...”

세린은 투정을 부리듯 트레일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한숨을 쉬었다.

리사는 눈에 불꽃을 튀기며 세린을 향해 말했다.

“전하, 비록 일주일이나 걸리지만 제가 즐겁게 가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아하하 고마워요, 리사경”

“큽...!”

세린의 환한 미소에 리사가 다급히 제 코를 붙잡았다.

제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출발은 순조로웠다.

세린과 일행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고 곧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하늘은 벌써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고 트레일은 세린의 로브를 깊이 씌워주며 여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