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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75화 (75/218)
  • 75화. 남부에서 온 초대장

    남부제국에 브론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세린에게 보낼 초대장을 쓰는 것이었다.

    브론의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고 펜으로 글을 쓰는 소리가 그의 서재를 울렸다.

    사각사각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봉했다.

    붉은 인장이 굳어가며 편지에 스며들자 그의 남색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곧 다시 만나겠지...’

    브론은 자연스럽게 벨을 울려 시종을 불렀고 편지를 말없이 건넸다.

    시종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며 편지를 날랐다.

    *

    같은 시각, 헤일리는 성에 오자마자 병으로 깊이 잠든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붙은 개인시녀가 조금은 슬퍼 보이는 헤일리에게 말했다.

    “황태자전하께서 동북제국의 황녀전하께 초대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헤일리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고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동북제국의 황녀전하께 남부로 초대하는 초대장을 방금 발송했습...”

    “초대장이 방금 발송된 거냐!”

    “그게... 방금 시종이 발송을 위해서 이동하고...”

    헤일리는 시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뒤를 돌아 달렸다.

    “전하??”

    ‘안 돼...!’ 이를 악물고 달린 헤일리는 우편을 전달하는 서고장에 서둘러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말을 타고 멀어진 황태자의 시종이 시야에 보이자 창백해진 낯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돼.....!’

    헤일리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져갔다.

    안쓰러울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문 헤일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세린은 평소의 생활로 돌아와 마력운용을 시작하고 있었다.

    눈을 천천히 감아 내부로 들어오는 마력은 여전히 양이 적었다.

    스르륵 눈을 떠서 다시 운용해 보아도 똑같았다.

    “으에.....”

    “잘 안 되는 거야?”

    세린의 기어가는 한숨소리에 트레일이 물었다.

    세린은 동그란 눈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엄청 줄었어요... 이 정도 마력이면 쓸 수 있는 마법도 한계가 생기는데...”

    그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워서 조금 시무룩해진 세린이었다.

    트레일은 그런 세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에 단단한 팔을 두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이! 그런 걸로 풀이 죽으면 안 되지! 아예 마법을 쓰지 못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저도 알지만... 그치마안”

    “세린. 어차피 널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마력이었어. 오빠는 오히려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해. 더 이상 마력 때문에 네가 위험해질 일도 없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거잖아.”

    “.... 오빠.”

    트레일의 묵묵한 대답이 참 다정했다.

    언제나 마력을 한가득 품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깨질까 부서질까 무서워 걱정을 안고 살았던 가족들을 알고 있었다.

    세린은 애틋하게 그런 트레일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의 품에 기대어 웃었다.

    트레일의 품에서부터 느껴지는 안정감과 든든함이 세린을 감쌌다.

    트레일은 어리광부리는 세린을 귀엽게 바라보며 두 팔로 세린을 꼭 안아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고민은 그만하지?”

    “알겠다고요...”

    “기분도 좋은데 오랜만에 단거나 많이 먹을까?”

    “레몬시럽 아니면 안 먹어요!”

    “어째 갈수록 하는 행동이 아기 같지?”

    “그래서 뭐 싫은가요? 언제는 어리게 행동하라더니...”

    “아니 싫다는 건 아니지만... 봐준다. 정말!”

    “참나...”

    세린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트레일과 함께 티타임을 위해 정원으로 이동했다.

    그 날의 햇살은 밝았고 세린도 여전히 밝았다.

    세린은 트레일과 케이크를 먹고 난 후 바로 서재로 들어왔다.

    다시 책상을 가득 채운 편지들도 확인해야 했고 조금 있다가 로레인과 산책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세린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와 쌓여있는 편지들을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에휴...”

    이엔도 그 편지들을 보며 막 질린 참이었다.

    “전하... 편지가 왜 매번....”

    세린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일단 얼른 읽어보는 것부터 해야겠지?”

    “죄송합니다. 전하를 도와 드리고 싶으나...”

    “이엔이 도와주기엔 많이 무리지! 하하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세린은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위에서부터 쌓인 편지를 뜯어 읽어가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세린의 서재는 편지를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엔은 그 조용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편지에 답장을 대부분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세린의 서재에 조용히 노크소리가 울렸고 세린은 놀란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전하.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또...?”

    그녀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지며 볼을 부풀리자 이엔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졌다.

    그러다 곧 다시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려 다행스럽게도 세린에게 허물어진 표정을 들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은 멜은 은쟁반 위에 붉은색의 화려한 봉투를 세린에게 건네주었다.

    “남부에서 온 편지입니다. 아무래도 황태자님께서 보내신 듯합니다.”

    “남부?”

    세린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이엔의 눈도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세린은 작은 손으로 편지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간결한 글씨가 종이 위에 가득했다.

    자신을 남부로 초대한다는 글귀와 남부 수도에서 열리는 축제는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알려주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린은 한 손으로 제 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도 괜찮은 걸까? 아빠나 오빠랑 가는 거면 좋겠는데...’

    그럼 든든하고 안심이 되니까...

    세린은 이내 고민하다가 잠시 서랍 안으로 남부제국의 편지를 넣었다.

    이엔은 세린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고 이내 다시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마음을 먹은 자신이었다.

    이엔은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세린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엔, 아빠한테 가자!”

    “네 전하.”

    세린은 가벼운 몸짓으로 문을 열고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양궁의 집무실에 금방 도착한 세린은 문을 지키는 기사에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자마자 열리는 문에 눈을 크게 떴다.

    ‘아직 기사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온 걸 알지?’

    황제의 듣는 귀가 너무 신기했다.

    “세린.”

    문을 벌컥 열어 놓은 황제는 커다란 손을 세린에게 뻗었고 세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황제다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으로 들이자 세린은 오빠들이 모두 아빠와 함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 다들 무슨 일이 있어요?”

    로레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테오형님이 즉위를 해야 해서. 즉위식 날짜나 식 진행사항 중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어.”

    “우와... 그렇구나!!”

    세린은 커다란 눈동자를 빛내며 테오를 바라보았다.

    테오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세린에게 손을 뻗었다.

    “너도 앉거라.”

    “네에!”

    세린은 서둘러 테오와 트레일의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트레일은 그런 세린을 귀엽게 바라보며 웃었고 황제도 다정하게 웃었다.

    “세린, 그보다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것 아니었느냐”

    “아...! 맞아요!”

    세린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말했다.

    “남부로 초대장이 왔어요! 여기서 좋은 기억이 감사하다고 그 곳에 축제나 남부의 황성을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편지를 써주....”

    뚜둑!

    세린의 말이 끝나기 전에 트레일의 주먹에서 뼈대를 맞추는 듯한 소리가 났다.

    테오도 표정관리가 안 되는지 미간을 무섭도록 일그러트리고 있었고 황제와 로레인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황제는 침묵하다 이내 세린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남부의 황태자가 너에게 남부로 방문을 오라고 초대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라는 것이냐?”

    “네...”

    세린이 자신감을 잃고 눈치를 보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나 보이지?

    로레인은 약간 금이 갔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세린, 너는 남부제국에 가보고 싶니...?”

    세린은 로레인의 물음에 고민을 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남부가 어떤 제국인지, 동북과는 어떻게 다른 곳인지 궁금했고 그 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궁금했던 참이었다.

    세린의 긍정에 트레일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지만 테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미간을 억지로 폈다.

    테오는 다정한 눈으로 세린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번 축제처럼 이엔만 호위로 따라가는 것은 안 될 것 같구나. 아무래도 우리 제국이 아닐뿐더러 낯선 땅은 정말 위험하니까 말이다.”

    “네! 맞아요...!”

    세린도 그 부분에서는 긍정했다.

    황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세린에게 가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지만 또 다른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 것은 다 했으면 하기도 했다.

    그런 세린이 남부에 가보고 싶다고 하니 허락은 하겠지만...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이 이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누구를 붙여야 세린이 안전하게 잘 다녀올까?

    테오는 지금 황위 즉위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다.

    그리고 로레인도 그런 테오를 보좌하기 위해서 할 것들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굴리다가 이내 트레일을 마주보았다.

    덜덜 떨리는 턱으로 보아서는 화를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트레일.”

    “... 네 아버지.”

    황제는 그런 트레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기사단들의 훈련은 잠시 나에게 맡기고 너와 2기사단의 단장, 그리고 이엔과 또 한 명의 마스터를 세린의 호위로 정하겠다. 같이 다녀오너라.”

    “아, 아빠??”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마스터를 4명이나??

    세린이 경악을 하며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보호하는 이들이 마스터가 아니라면 남부제국의 여행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인원은 네가 불편할 것이니 이 정도에서 네가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빠아....”

    자신을 걱정하는 황제를 알아서 세린은 싫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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