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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74화 (74/218)
  • 74화. 남부로 돌아가다.

    헤일리는 1기사단의 기사들이 훈련에 임하는 연무장 멀리서 까치발을 들고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단들의 거대한 체격 속에서 유독 빛나는 한 사내는 약간 구불거리는 아름다운 분홍빛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고 있었다.

    눈부신 붉은 눈동자와 곱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콧대, 그리고 생기가 넘치는 입술은 헤일리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10바퀴 추가하겠다. 1기사단이 그리도 우습나!”

    호통 치는 그 목소리마저 멋있었다.

    검은 색의 제복 밖으로 느껴지는 탄탄하고 듬직한 체격도 헤일리를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헤일리는 멍하니 트레일의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붕붕 가로 저었다.

    ‘아니야. 안 돼...’

    곧 떠날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이제는 그와 닿을 일도 없었고 연결이 될 고리도 없었다.

    헤일리는 그 사실이 슬프면서도 애써 체념하기 시작했다.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고개를 숙인 헤일리의 푸른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첫 눈에 반한다는 그 말이 우스울 것이다.

    본인도 처음 보는 이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스스로가 어이없는 것을... 당사자는 얼마나 이해가 안 될까.

    믿지 못할 것이 분명하면서도 못내 그 진실이 슬퍼져서 헤일리는 눈에 열이 올랐다.

    그런 헤일리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들어왔다.

    “...!!”

    놀란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든 헤일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에 당황했다.

    트레일이었다.

    트레일은 신입 기사들의 훈련을 진행하다가 멀리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꼼지락 거리는 헤일리를 발견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나?’

    그런 의문을 품자 걸음을 바로 옮겨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그녀의 떨리는 손과 조금 풀이 죽은 기운에 트레일이 당황했다.

    그리고 서둘러 연무장 밖으로 나와 헤일리의 앞에 섰다.

    자신을 천천히 올려다보는 남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트레일은 물었다.

    “황녀 헤일리. 무슨 일 있나요?”

    “아.... 저.... 그게....”

    당황이 가득해진 헤일리는 말을 더듬더듬 잇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저 남부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아쉬움이 남아서....”

    “아아.”

    헤일리는 생각했다.

    그래, 이 환경에 익숙해지자마자 떠나려니 아쉬운 것이다.

    절대 저 사람을 다시는 못 보는 것이 슬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였을 것이다.

    헤일리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다시 눈이 녹듯이 스르륵 내려가 버렸다.

    트레일이 햇살처럼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겠군요. 그건 저도 아쉬움이 남네요. 언제든 좋으니 또 방문하시는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통증이 일었다.

    심장이 이러다 터지는 것은 아닐지, 얼굴이 폭발해서 죽는 것은 아닐지가 걱정되었다.

    헤일리의 첫 사랑은 그렇게 점점 깊어져만 갔다.

    트레일은 여전히 브론을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다행스럽게도 헤일리에 대한 오해는 풀었다.

    ‘일단 리사과는 아닌 것이 확실해.’

    왜냐하면 여가시간동안 그녀가 책을 읽거나 이리 연무장을 둘러보는 것을 보며 그녀가 세린에게 관심이 없을 뿐더러 세린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론을 대할 때보다 헤일리를 대하는 목소리가 보다 부드러워졌다.

    어찌되었든 내일이면 갈 사람이고 가기 전에 나쁜 추억을 서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저 즐거운 모습으로 헤어지는 것을 바랄뿐이었다.

    세린은 그 날 저녁, 아침마다 돌지 못했던 황궁의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로레인이 피어준 장미꽃을 눈에 담아가며 걷는 것은 세린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여전히 싱그러운 장미들 사이로 세린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브론도 남부로 돌아갈 것이고 헤일리도 돌아갈 것이다.

    더 이상 그를 피해서 도망갈 일도 없을 것이고 헤일리를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린은 탐스러운 장미를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가슴에 깊이 남을 기억들이 생겼다.

    “다람쥐 같군.”

    “...!!!”

    세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브론이 보였다.

    “황태자님...?”

    “황녀 세린. 그대가 너무 열심히 나를 피해서 조금 섭섭해질 뻔 했습니다.”

    “히끅...!!”

    세린은 급히 딸꾹질을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브론은 그런 세린을 다정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리도 제가 불편했습니까?”

    “아니... 히끅!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저 본심을 솔직히 말했다가 그대를 난처하게 만들었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세린의 눈이 당황이 가득 담겼다.

    따지고 보면 그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조금 민망해졌다.

    세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불편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단지... 이제 곧 떠나시기도 하고 여기서 더 정이...”

    “정이 깊어지면 제가 그대와 헤어지기 힘들어 할까봐 그런 것인가요?”

    “.... 네에...”

    브론은 부드럽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다정한 마음도 말투도 점점 더 브론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시선도 그 상냥한 마음도 아름다운 저 모든 것들도 갈수록 욕심이 났다.

    점점 더 놓아주고 싶지 않아져갔다.

    브론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정답이기도 하고 오답이기도 하군요.”

    “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세린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닙니다. 대답은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브론은 그런 세린을 다정히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덕분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황녀, 제가 그대에게 초대장을 보내면 우리 남부에도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남부제국에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세린의 눈이 커졌다.

    브론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북제국의 문화와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제게 소개해주셨으니 저 또한 우리 남부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시켜주고 싶어졌습니다.”

    “아.....”

    “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린은 잠시 고민했다.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그에게 오해를 줄 것만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런 세린의 마음을 알았는지 브론이 이어 말했다.

    “제안에 수긍해주셔도 아무 오해도 하지 않습니다. 이 제안은 남녀의 관계가 아닌 한 제국의 황족으로서 드리는 초대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하고 세린은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감사히 수락하겠습니다.”

    세린의 수락에 브론의 눈이 곱게 휘었다.

    아름다운 달빛 아래에서 그 모습이 유독 빛이 났다.

    그리고 남부의 황족들이 드디어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헤일리와 브론은 아침 햇살이 뜨자마자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와 테오 그리고 트레일과 로레인은 그런 그들의 마중을 위해 이미 황궁의 입구로 모여 있었다.

    황제가 브론의 손을 잡고 악수하며 이를 갈았다.

    “우리 딸이 그대가 이리 일찍 간다는 것을 알았다면 섭섭할 것이야.”

    세린이 네가 지금 가는 것을 모르니 마중이 없어도 알아서 이해하고 혼자 가라는 이야기였다.

    브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황녀와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기에 만족하며 돌아가지요.”

    난 세린과 즐거운 일들을 많이 만들었으니 신경 하나도 안 쓰인다는 브론의 대꾸에 황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테오는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그와 악수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가기를.”

    ‘다시는 만나지 말고.’ 다행스럽게도 테오는 마음의 소리를 삼켰다.

    그러나 브론은 그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아 작게 웃었다.

    로레인은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한 번 숙여주었고 트레일은 불타는 눈으로 브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밌는 가족이야.’

    브론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헤일리는 트레일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빛나는 사람.’

    그 짧은 시간동안 트레일의 생각으로 잠을 못 잤던 헤일리였다.

    이제 다시 만날 일도 보고 싶어도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게 못내 헤일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헤일리는 서글퍼지는 마음을 묻고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즐거운 시간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황제와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악수를 했고 로레인도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트레일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가시는 길 안전하시기를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더 이상은 안 돼.

    헤일리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브론도 부드럽게 인사하며 마차에 올랐고 그렇게 마차는 남부로 출발했다.

    헤일리와 브론에게는 조금 아쉬운 그리고 황족들에게는 기쁜 이별의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 시간이었다.

    황제는 남부의 황족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네에? 벌써 가셨다고요?”

    세린의 경악스러운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툴게 눈을 피한 황제는 나직이 말했다.

    “어쨌든 남부의 황태자니까. 일이 많으니 서둘러 아침 일찍 간 것이겠지.”

    “그렇지만... 인사도 못 드렸는데...”

    세린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물들여지며 시무룩해지자 로레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도 괜찮다고 하더구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선 밥이라도 든든히 먹거라.”

    “.... 하지만...”

    “이미 떠났기도 했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되어 만난다면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란다.”

    “... 네에, 알겠어요.”

    그래, 이미 가버린 사람이니 어쩌겠는가.

    세린은 조금 미안해진 마음을 담고 아침을 먹었다.

    어차피 남부에 초대장이 오거든 그 때 남부로 가서 사과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황족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세린이 남부로 가는 초대장을 받기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허락했을까?

    황제와 형제들은 그저 세린이 빨리 브론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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