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헤일리의 경고
“언제 다쳤... 아!”
아까 전에 브론을 피하려 뒤로 걷다가 다친 상처였다.
세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실수해서 다친 상처에요...! 정원에서 뒤로 걷다가 그만...”
“저런....”
제이는 고운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그를 닮은 새하얀 손수건이 작은 세린의 손등을 충분히 감쌌고 세린은 그의 손길이 손에 닿을 때마다 부끄러워 움츠러들었다.
제이는 세린을 향해 말했다.
“다치지 마십시오.”
“.... 네에.”
“아프신 것도 안 되십니다.”
“하하 네!”
이런 숨이 막히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도 자신의 걱정을 하는 제이를 보고 세린은 결국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아프지도 말고 다치지도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나누며 말이다.
제이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다정했다.
세린이 제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엔은 황제의 부름에 태양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바라보는 그 불타는 눈동자들을 무려 네 쌍이나 마주보며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엔의 큰 몸이 작아져갔다.
테오의 입술에서 싸늘한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남부황태자가 우리 세린에게 반했다는 뭐 그런... 어이없는 말을 세린의 앞에서 직접 그 말을 그것도 스스로 내뱉었다는 그런 말이냐?”
“.... 네. 맞습니다.”
테오의 손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이엔은 저절로 섬뜩해지는 차가운 온기에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분명 자신의 탓도 아니지만 죄인이 된 기분에 낯이 창백해져갔다.
황제의 눈에는 이제 불꽃이 보였고 로레인은 너무 휘어 웃어서 동공이 보이지 않았다.
트레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떠는 것이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부 황태자의 당당한 고백에 이엔도 가슴은 아팠다.
자신은 세린에게 제 마음을 고백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오랜 시간을 세린의 곁에 맴돌았던 자신보다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그 황태자가 참 대단해보였다.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영원히 전해줄 수 없을 제 마음을 되돌아보다가 이엔은 이내 씁쓸해진 입안 속에서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다시 마주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냥 무서웠다.
자기를 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울 것 같은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황제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말했다.
“어차피 글피에 가는 사람이다. 세린이 그 동안 혼란이 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시선과 생각을 분산시켜라...!”
“네.”
비장한 해결방법과 대답이었다.
*
세린은 제이를 마중해주며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의 빛을 가득 품은 그의 하얀 제복은 붉게 물들었다.
하얀 머리카락도 푸른 눈동자도 아름답게 주홍색의 하늘을 담았다.
세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이내 퍼뜩 놀라며 말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공자...”
세린이 당황이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언제쯤이면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생길까.
언제가 되어야 당신에게 내 모든 마음과 진심을 전해줄 수 있을까.
한 발을 다가서면 두 발이 멀어질까 무서워서, 이 관계가 그 한 마디로 모두 끝이 날까 두려워서 입을 열지도 못하는 내 마음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무슨 말부터... 어떤 목소리로... 어떤 눈빛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제이는 천천히 세린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제는 멈출 수 없어.’
붉은 노을 밑에서 제이의 눈은 감겼고 세린의 볼은 붉어졌다.
제이는 지워진 예법을 통해서 부족했던 모든 것들을 잊고 만족하며 대공저로 돌아갔다.
다음 만남에서는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
마차 밖으로 붉은 하늘 아래에서 세린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한 손을 붕붕 흔드는 그 귀여운 모습이 그림의 한 장면처럼 제이의 가슴에 천천히 담겼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제이는 애틋하게 웃으며 세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의 창문에서 시선을 주었다.
황족들에게서 벗어난 이엔은 그런 세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 우뚝 서게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행복하게 웃는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했고 그녀의 뒤를 지킬 수 있는 지금의 자리도 만족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황족들의 신뢰도 세린의 밝은 미소도 이엔에게는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행복이었다.
저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이엔은 세린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면서도 행복한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그녀만 행복해진다면 바랄 것이 더는 없었다.
세린은 제이의 마차가 사라지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이엔을 발견하고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하하... 돌아가자 이엔!”
“네.”
이엔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마자 멀리서 한 인영이 세린의 눈에 들어왔다.
남부제국의 황녀 헤일리였다.
세린은 헤일리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자 놀란 눈동자로 인사했다.
“황녀 헤일리. 궁을 구경하고 계셨나요?”
“.... 차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리로 오세요.”
약간 굳은 얼굴의 헤일리가 걱정이 된 세린은 헤일리를 데리고 황성의 정원 티 테이블로 향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꾸며진 티 테이블은 아름다웠고 분위기도 따스했다.
헤일리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옅은 주홍빛의 차를 바라보다가 살짝 음미하며 마셨다.
“얼마 전에 들어온 찻잎이에요. 생각보다 달콤하고 꽃향기가 나서 제가 요즘 자주 마시고 있어요.”
세린의 다정한 어조에 헤일리는 눈빛을 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달콤하네요. 맛있는 차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린이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 그렇다면 세린도 저를 헤일리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네, 고마워요.”
세린이 밝게 웃자 헤일리는 천천히 차가 담긴 컵을 테이블 위로 천천히 올려놓았다.
잔뜩 굳은 그녀의 얼굴에 옅은 불안이 보이자 세린이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헤일리. 무슨 일이 있나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세린. 기사를 잠시 물려주었으면 좋겠어요.”
“.... 아 이엔을요?”
“네.”
세린은 큰 눈동자를 굴려 이엔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엔, 잠시 멀리서 기다려줄래?”
“.... 전하”
이엔의 불안한 눈동자에 헤일리가 말했다.
“잠시면 됩니다.”
“......”
세린도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엔은 헤일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멀리 떨어졌다.
세린은 그런 이엔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헤일리를 향해 물었다.
“헤일리. 무슨 일이신가요?”
“..... 세린.”
헤일리는 자신을 걱정하는 세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묵묵한 눈동자와 차가워진 표정에 세린이 당황하자마자 헤일리는 고운 입술을 열고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더는 가까이 오지마세요.”
“.... 네?”
단호한 음성 속에서는 굳은 다짐이 섞여 있었다.
세린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지며 다시 되물었다.
“헤일리? 그게 무슨....”
“브론 오라버니에게....”
헤일리는 고운 미성의 목소리로 다시 천천히 말했다.
“거기서 더는 다가오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요.”
“아실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아셔도 안 됩니다. 다만 더 이상 오라버니의 눈에 더는 세린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무례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 헤일리.”
세린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일리는 망설임 없는 굳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오늘 이후로는 더 이상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
“더는 오라버니의 관심이 세린에게 가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세린은 침묵했다.
헤일리의 마음도 잘 모르겠고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아 보여서 저절로 불편해졌다.
헤일리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기품 있게 인사를 했다.
“차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우셨을 것이라 믿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 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천천히 사라지는 헤일리의 푸른 머리카락을 보며 세린은 입안이 거칠어진 것을 느꼈다.
헤일리는 브론을 많이 좋아하고 따랐던 것일까.
브론의 관심을 빼앗겨버려서 질투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가 싫은 것일까.
세린의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한참을 티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긴 세린은 이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멀리서 대기하던 이엔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잘 된 것일지도 몰랐다.
브론의 고백 이후로는 그가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의 마음을 거절하려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거리를 두어야 했던 일이었으니까 세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헤일리에게서 직접 들은 경고는 생각보다 마음이 아팠다.
남의 따가운 시선이나 단호한 이야기는 여전히 들을 때마다 속이 쓰라렸다.
그러다 시선이 저절로 내려간 세린은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 하얀 손수건을 발견했다.
“......”
세린은 한 번 손수건을 쓸어보며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최대한 브론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궁으로 돌아온다던지, 늘 하던 산책을 하지 않는다던지, 가끔씩 식사도 제 궁에서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다만 세린이 간과하지 못한 것은 숨기면 숨길수록 피하면 피할수록 집념이 강해지는 브론의 성격이었다.
브론은 자신을 피하는 사랑스러운 황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놓고 자신을 피하는 다급한 뒷모습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브론의 눈이 소유욕으로 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