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브론
세린은 테라스에 가만히 서 있다가 다가오는 이엔을 발견했다.
“이엔!”
이엔은 세린에게서 반가운 기색과 함께 조금의 피곤함도 보였다.
이엔은 그런 세린을 향해 말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들어가서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아... 그래 보여??”
세린은 난처하게 웃으며 자신의 볼을 쓸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닌 듯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세린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정히 웃었다.
“아빠한테 가자. 인사드리고 난 오늘 좀 쉬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세린은 그렇게 테라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엔은 그런 세린의 뒤를 지키며 따라 걸어갔다.
이윽고 황제와 눈이 마주친 세린은 그에게 맑게 웃으며 다가갔다.
황제의 미간이 약간 좁아지며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쓸어주며 물었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아니요~조금 피곤해서... 저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을까요?”
황제는 세린의 말에 눈썹을 안쓰럽게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미리 말하지 그랬느냐. 어서 들어가 보거라.”
“감사해요! 오늘 연회도 정말 즐거웠어요. 아빠.”
세린은 황제의 허락에 다정히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황제의 키가 워낙 커서 끌어 안겨진 것은 자신 같았지만 말이다.
황제는 그런 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잘 자거라”라고 속삭였다.
세린은 이내 한 번 더 인사를 한 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세린을 따라가던 이엔도 멀리서 보이는 푸른 머리카락의 미청년을 발견했다.
세린을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흥미를 읽은 이엔은 저절로 표정이 굳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세린의 등을 지켰다.
탐탁지 않은 자였다.
*
심란하면서도 아름답던 연회의 밤은 길었다.
다음 날이 되어 눈을 뜬 세린은 푹신한 이불 밖으로 빠져나오기 싫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루 종일 침대와 함께 있고 싶은 게으른 기분에 스스로가 웃겨 작게 키득거렸다.
‘아니야. 이제 일어나서 아빠랑 오빠들이랑 밥 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 팔을 양 옆으로 쭉 뻗었다.
온 몸을 비틀며 스트레칭을 한 세린은 “후우” 한숨을 쉬고 밝게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에서 내려온 것과 동시에 멜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들어와!”
세린의 대답이 끝나자 멜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멜은 세린에게 다정히 인사를 한 후 그녀의 준비를 도왔다.
단정하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세린은 길게 하품을 하며 멜을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다.
뒤에서 함께 이동하던 이엔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잠이라도 설치셨습니까.”
“아니이... 분명 푹 잤는데 오늘따라 막 침대에만 누워 있고 싶더라니까?”
왜 그럴까 하며 하하 웃은 세린은 이내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분홍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근사한 아빠와 함께 푸른 머리카락의 두 남녀를 발견하고 잠시 사고가 정지하며 굳어버렸다.
황제가 세린을 발견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오거라. 잘 잤느냐.”
그러자 바로 푸른 머리의 브론이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황녀 헤일리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하자 정신이 번쩍 든 세린은 이내 메리부인에게 배운 예법에 맞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실례를 저질렀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브론은 그런 세린을 향해 부드럽게 대답했다.
“전혀 실례가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그런 브론을 바라보다가 세린을 향해 걱정 말고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세린은 두 볼을 상기시키고 서둘러 황제의 옆 자리에 앉았다.
부끄러워하는 딸이 귀여워 황제는 나직이 웃었다.
이윽고 테오와 로레인, 트레일까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했고 함께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헤일리는 트레일이 들어온 그 순간부터 빳빳해진 모습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브론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세린을 바라보았다.
세린은 막 황제가 그릇 위로 음식을 옮겨주자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빠... 손님이 계신걸요. 혼자서 먹을 수 있어요~”
황제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고 속삭이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세린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안 되는데...’하고 중얼거리면서도 황제가 생각해주는 것이 기쁜지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담겨있었다.
브론은 그런 세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저 작은 미소도 붉어지는 홍조도 브론을 묘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식사시간동안 테오도 로레인도 트레일마저도 모두 세린에게 집중하는 것을 알고 난 후 또 한 번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같은 핏줄이고 가족이라지만 이 정도로 생각하고 챙긴다는 것이 브론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자신에게는 남동생 1명 여동생 2명이 있었다.
남부의 황태자로 태어나 1살 차이의 남동생은 황위계승권을 손에 잡기 위해서는 방해꾼이자 라이벌이었고 여동생들은 그저 예의를 다 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화목한 분위기도 다정한 공기도 굉장히 낯설었다.
브론에게는 묘한 식사시간이 끝나고 세린은 잠깐의 틈 사이로 황족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헤일리와 브론에게 다가가 물었다.
“황궁의 뒤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요! 한 번 보러 가시는 것은 어떤가요?”
단번에 황제와 황족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브론은 그 틈을 타서 부드럽게 말했다.
“안내해 주시는 겁니까?”
“세리ㄴ....”
트레일의 다급한 목소리가 세린의 목소리에 끊겼다.
“네 그럼요!”
브론은 약간 승리한 기분으로 피식 웃으며 “그럼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그녀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황제와 형제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급히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이 더 따라가는 것이 좋겠구나.”
“제가 갑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트레일이 쏜살같이 달려 세린의 옆에 섰다.
커다란 트레일이 옆에 서자마자 세린이 매우 작아보였다.
세린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기사단 훈련은 안 하세요?”
“할거야. 산책 끝나고!”
“아아... 네 알겠어요.”
세린은 트레일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며 바람이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참 귀여운 오빠였다.
세린은 정원에 잔뜩 피어난 붉은 장미를 바라보며 맑게 웃었다.
그리고 브론과 헤일리에게 그 꽃들의 정원을 보여주며 함께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트레일은 불안한 눈동자로 그런 브론과 헤일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놈의 산책은 언제 끝나는 거야....!’
빨리 가서 기사단을 점검하고 훈련을 해야 하는 트레일이었다.
일단 마음이 급해서 오기는 했는데 정말 정원만 걷는 것이라면 자신은 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형님말로는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어.
테오는 로레인과 트레일에게 작은 경고를 했었다.
남부의 황태자는 매우 까다롭고 속을 알 수 없는 자이니 세린이 그의 시선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트레일은 그 말에 동의했다.
남부제국의 황태자는 스페라도 대공자만큼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트레일은 더욱 좁아지려는 미간을 펴고 이내 한숨을 쉬었다.
세린은 그런 트레일을 보며 물었다.
“오빠. 급하신 거예요?”
“응? 아, 아니야”
“아니긴요! 이 시간이면 기사단 훈련시간이잖아요. 얼른 가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에이... 괜찮...”
“오빠. 자기 일을 뒤로 넘기고 마무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최악이에요!”
“........”
트레일이 입이 다물어졌다.
그렇다고 널 두고 갈 수는 없는데... 라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이었다.
세린은 이들이 남부 제국의 사람들에게서 왜 이리 자신을 싸고 도는 지 알 수 없었다.
“얼른 다녀오세요. 이따가 다녀오시고 저랑 또 산책하면 되죠!”
“..... 정말?”
“네.”
“형님들도 함께인 산책이야?”
“오빠랑만 산책할게요!”
“..........”
“오빠?”
“알겠어! 약속한 거야, 너...!!”
“네에!”
세린은 머뭇머뭇 뒤로 걷는 트레일을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트레일은 브론과 헤일리는 묘하게 바라본 후 이내 고개를 내려 세린의 그림자를 살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세린은 그런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정하게 웃으며 황족들의 산책을 도왔다.
“정원사의 솜씨가 좋군요. 정원의 꽃들이 다 아름다워요.”
황태자 브론의 칭찬에 세린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보여서 다행이에요. 정말 실력이 대단한 정원사이기는 하죠.”
동북제국의 대마법사 로레인이 그 정원사니까 말이다.
세린의 그 미소를 바라보며 브론은 함께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진 브론은 묘한 감정을 오늘도 느꼈고 천천히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헤일리와 황궁을 거닐었다.
이엔은 세린의 그림자 속에서 숨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바로 어둠으로 끌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다른 제국의 황태자든 뭐든 이엔에게는 중요치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헤일리는 트레일이 사라진 곳을 반복이 바라보며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더 그와 정원을 걸어보고 싶은 스스로의 마음에 놀라 고개를 저으며 잊으려 노력했다.
헤일리의 가슴은 일정하지 않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이 생각보다 마음을 간지럽혔고 불쾌하지 않았다.
헤일리가 깊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브론은 세린에게 느끼는 제 호기심과 흥미를 파악해보기 시작했다.
왜 그녀가 흥미로울까.
대마법사의 마력을 막아서?
아니면 아름다워서?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 번 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라 더욱 궁금해졌다.
조금만 더 그녀에 대해 알아 가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원 말고도 아름다운 명소가 많아요. ~ 힘드시지 않으시다면 보러 가보시겠어요?”
세린이 태양처럼 밝게 웃었다.
움푹 파인 보조개와 곱게 휘어진 아름다운 눈매에 헤일리처럼 브론의 가슴에도 일정하지 않은 두근거림이 생겼다.
“그렇다면 한 번 보고 싶군요. 부탁드립니다.”
“네!”
생각보다 그 두근거림은 브론을 즐겁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