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이의 욕심
그런 황태자들의 사이로 황제가 슬며시 들어왔다.
“레이르망 황제는 좀 어떠하신가?”
그의 말에 기세를 누른 브론은 슬픈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병세가 짙어져 깨어 계시는 날이 적습니다. 그래도 좋은 약이나 좋은 의사를 붙였으나...”
“그렇군... 마음이 많이 심란하겠어.”
황제의 눈이 속상한 듯 일그러졌다.
남부제국과는 서로 다른 제국을 다스리며 많이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
마음이 맞는 황제들로서 서로가 많이 의지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남부의 황제는 병으로 인해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황제의 걱정을 안다는 듯이 브론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에 어려움이 있거든 알려주기를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테오는 그런 브론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세린을 바라보았다.
제이의 넓은 등에 가려졌지만 빼꼼이 보이는 풍성해 보이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귀여웠다.
테오의 시선이 바로 부드러워지자 브론의 눈도 다시 세린을 담았다.
갈수록 동북제국의 황녀가 궁금해져갔다.
같은 시각, 황녀 헤일리는 지금 난처했다.
자신의 앞을 버티고 서있는 동북제국의 3황자로 인해서 말이다.
트레일은 여자든 남자든 그 누구도 세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들이 황태자를 막을 동안 자신은 황녀의 앞에 다가섰다.
그녀의 시야를 제 상체로 가린 트레일은 작은 웃음을 담은 근사한 미소로 그녀에게 물었다.
“남부제국에서 오시느라 힘드셨겠군요.”
“아니요... 가는 길이 편해서 괜찮았습니다.”
“동북의 연회는 이런 식의 파티로 이루어지는데 남부는 어떤지요?”
“아... 남부는...”
헤일리는 할 말이 없어서 난처한 것은 아니었다.
말을 끊지 않고 계속 거는 트레일의 질문에 난처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트레일의 붉은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서 심장이 살살 떨리는 것이 난처한 것이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다부진 체격이 제복 밖으로도 느껴졌고 날카롭게 솟은 오똑한 콧날과 생기를 머금은 입술이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약간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도 붉은 색의 루비 같은 눈동자도 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서 헤일리는 심장이 너무나도 떨렸다.
난감했다. 난감하고 난처했다.
그녀의 얼굴이 화로마냥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의 상태를 모르고 질문하기 바빴다.
리사를 바라보면서 세린이 남녀가리지 않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기에 이렇게 여자마저 경계하는 트레일이었다.
‘리사 녀석은 위험해...’
1기사단과 2기사단의 단장들로서 훈련과 기사단관리를 위해서 자주 만남을 가지는 두 사람은 서로 이를 가는 사이였다.
‘2기사단들이 1기사단들보다 단합이 뛰어난 것 같군요.’
리사의 냉정한 말에 똑같이 냉정한 말투로 말한 트레일이었다
‘리사경은 관찰을 하는 눈에서 보다 많은 학업이 필요할 것 같아.’
‘그 학업을 아카데미에서 배워 작년에 졸업했습니다.’
‘아카데미도 쓸 때가 없어졌군. 이런 보는 눈도 없는 기사를 졸업시키다니’
‘듣다보니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황자전하께서는 그런 아카데미도 졸업하시지 않으셨다던데...’
‘졸업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입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게 그것이지요.’
‘전혀 달라!’
‘뭐가 달라요!’
‘우리 세린이 왜 이런 기사와 친구를 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그러는 우리 황녀전하께서 왜 이런 오빠를 두고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네요!’
‘뭐야? 말 다 했어?’
‘말 다 했답니다! 뭐요! 왜요!!’
점점 유치해지는 단장들의 대화에 기사들은 침묵했고 황제도 침묵했다.
대단한 실력들도 똑같았는데 하는 행동마저 둘 다 똑같았다.
그러다보니 트레일은 세린을 향한 시선이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이 느껴졌다.
리사마저 세린을 향한 시선이 저 모양인데 다른 여자들이라고 다를까 싶었다.
헤일리는 그런 트레일의 마음을 모르고 그저 수줍어 고개를 숙였다.
로레인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트레일은 분명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녀석...’
연회의 밤은 우습게도 빠르게 흘러갔다.
세린은 제이가 잠시 아인대공과 이야기를 하러 간다고 하자마자 바로 자연스럽게 테라스로 이동했다.
제이와 자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선이 너무도 몰려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이엔은 리사경과 함께 밖을 지킨다고 했는데... 여기서 리사경이랑 이엔이 보일까?’
세린은 긴 연회가 조금 지루해졌고 이엔과 리사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휘장을 천천히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세린의 눈에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남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황태자 브론이었다.
그는 휘장을 올리다 놀란 얼굴로 굳어버린 세린을 보고 함께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곤 부드럽게 움직여 한 손으로 그녀를 테라스 안으로 안내하는 손짓을 보였다.
“저는 다 쉬었으니 필요하시다면... 들어 오십시요.”
“아... 미안해요! 사람이 계시는지 모르고...”
“제가 신경이 쓰여서 기사들을 물린 탓입니다. 신경 쓰시지 마시고 쉬십시오.”
휘장을 지키는 기사를 물렸으니 자신 탓이라며 부드럽게 말한 브론은 이내 와인 잔을 들고 뒤로 비켜주었다.
세린은 당황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연회가 많이 피곤하셨나요?”
“아니요. 오는 길이 길어서 조금 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겠네요... 저희가 무심했어요... 원하시면 들어가셔서 쉬시는 것이 어떤가요?”
브론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말하는 세린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초면이고 남남인데 이 정도로 신경을 써주는 것이 신기했다.
태생적인 성격인지 남을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브론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신경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 제가 황녀님의 휴식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네요.”
“전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세린의 아름다운 눈매가 곱게 휘었다.
반짝이는 연두색의 눈동자가 휘어진 눈매 사이로 반달모양이 되었고 브론은 그녀의 웃는 눈매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할수록 마탑과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그 마탑을 섬멸하는 것에 이 작은 아가씨의 역할이 컸다고 표현이 되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이내 그 속마음을 숨기며 웃었다.
그것은 언제든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브론은 천천히 세린에게 다가갔다.
세린의 눈이 커졌다.
살며시 뻗는 브론의 손길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도 당황스러웠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또 당황했다.
‘뭐지...?’
당황한 마음을 얼굴에 담아가며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 못하던 때에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그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올리자 잔뜩 굳은 제이의 얼굴이 보였다.
“제이공자?”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브론은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담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려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도록. 황녀의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어서 말이야...”
“.....”
세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제이의 눈이 더욱 싸늘해졌다.
알 수 없는 공기의 기류 속에서 이내 브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알겠으니 그 살벌한 눈은 저리 치워주도록. 선의로 손을 뻗어도 이리 눈칫밥을 주니 서러워서 살겠나.”
“제이공자...! 왜 그러세요...”
그의 말에 잔뜩 당황한 세린이 제이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그제야 제이는 천천히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황녀전하를 염려하는 마음에 했던 행동입니다. 심기에 불편함을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부드럽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을 당황하며 바라본 세린은 “그럼 저는 이제 다시 연회를 즐기러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떠나는 브론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들에 난처해졌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가만히 안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떼어 그녀에게로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아주 신중한 손길로 넘겨준 제이는 부드럽지만 조금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공자 실례는 아니에요...!”
“예 감사합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쉬십시오.”
“공...!”
제이는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휘장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세린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제이의 온기와 그의 슬퍼 보이는 미소에 당황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제이는 휘장을 내리고 연회장을 나서며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자제력을 잃고 있다.
갈수록 그녀와의 문제에 닿을 때마다 자제를 할 수 없었다.
몰아치는 분노도 치밀어 오르는 그 감정도 제어가 안 되어가고 있었다.
제이는 연회장 문 밖에서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 멍청해지는 것 같아...”
욕심이 났다.
자꾸 세린을 생각하고 세린에게 닿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들이 욕심이 났다.
자신은 정말 감정에 휘둘리는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이는 깊은 한숨을 쉰 후 다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이엔을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네가 그녀의 곁에 있기를 바라지. 난... 지금은 안 될 것 같군.”
“알겠습니다.”
“부탁하지.”
제이는 그 말을 끝으로 연회장을 나갔다.
이엔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붙잡아서는 안 될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엔은 서둘러 걸음을 옮겨 세린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