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미래의 황제들
연회장 입구로 먼저 와 있던 테오는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워낙 먼 거리에서 온 남부제국의 황태자와 황녀를 위해 며칠을 묵을 수 있도록 궁도 마련해 놓은 참이었다.
남부제국 황태자와는 몇 번 무역을 통해 마주한 적이 있던 테오는 그 황태자가 까다로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보다 연회나 궁의 내부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테오의 눈에 세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골라준 아름다운 드레스가 세린을 빛나게 만들었다.
테오의 눈이 일그러졌다.
‘뭘 입어도 눈이 부시니 할 말이 없군.’
그냥 중증에 바보였다.
세린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세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마저도 너는 예쁘구나.”
“아빠는 오늘도 멋지세요.”
세린의 볼에 붉은 홍조가 올라왔다.
황제는 그런 딸의 손을 꼭 잡아주며 열리는 문 안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다시 찾아온 이 평화와 이 행복이 황제에게는 너무나도 애틋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세린은 황제와 함께 그리고 그런 세린의 뒤에 서 있는 오빠들과 함께 입장했다.
눈이 부신 가족의 등장에 귀족들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눈부신 샹들리에 밑으로 붉은 레드카펫을 밟으며 입장한 세린은 멀리서 보이는 하얀색의 머리카락에 눈을 크게 떴다.
제이였다.
제이는 세린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세린도 한층 밝아진 얼굴로 제이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제이는 짙은 남색의 턱시도를 입고 왔다.
그의 하얀 셔츠 위의 넥타이와 신체에 딱 붙는 턱시도가 제이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큰 키에 넓은 체격의 제이만을 위한 옷 같았다.
눈썹을 살짝 덮을 정도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한 제이는 평소보다 더욱 잘생겨 보였다.
세린은 그런 제이의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하다 옥좌에 금방 도착했다.
황제의 부드러운 손길에 맞춰 자리에 앉은 세린은 넓은 연회장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뽐내며 서있는 귀족들의 사이로 레드카펫을 밟으며 세린과 황족들에게 다가오는 두 인영을 발견했다.
푸른 하늘색의 머리카락은 제이의 눈보다 조금 더 연해보였고 남색의 짙은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나는 두 남녀였다.
닮아 보이는 외모를 보니 남매 같았다.
세린은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남자 쪽도 여자 쪽도 모두 외모가 아름다웠다.
“남부제국에서 온 브론 데 레이르망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평화를 다시 찾으신 것을 감축드리며 이 자리에는 남부제국의 황태자의 신분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남부제국에서 온 헤일리 론 레이르망입니다. 남부제국의 2황녀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부드러운 인사와 함께 두 사람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고 세린과 형제들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황제는 남부제국의 황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의 경사를 위해 먼 거리를 달려와 준 것을 감사히 여긴다. 짧은 기간이지만 편히 있다가 가기를 바라지.”
“감사합니다.”
“밤은 길다. 어서 연회를 즐기도록.”
브론은 고운 미소를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리다가 그대로 연두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린은 자신과 마주치는 날카롭지만 부드럽게 휘어있는 브론의 눈을 마주보며 생긋 웃었다.
브론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생긋 웃는 그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연한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 밑까지 내려와 찰랑였고 밝은 연두색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스런 이목구비와 도톰한 입술이 곱게 휘어 호선을 그리니 눈이 부셨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세린의 모습에 브론의 궁금증과 흥미를 자극했다.
저런 순수한 얼굴로 마탑을 섬멸했다고?
세린은 밝게 말했다.
“즐거운 연회가 되시면 좋겠어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황족의 고개를 숙인 것과 동시에 로레인이 세린의 허리에 손을 휘감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오빠?”
“제이공자와는 오랜만이겠구나.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오거라.”
“제이공자요...?”
세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평소 제이공자의 이름만 나와도 불쾌해 하던 그였는데 인사를 하라고?
몰론 세린이야 좋지만 로레인의 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워 눈을 깜빡였을 뿐이었다.
로레인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세린을 제이의 앞에 대령했다.
그리고 화사한 눈매를 달콤하게 접어서 웃으며 세린에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오마. 너에게 즐거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얼른 다녀오세요!”
세린이 웃는 얼굴로 말하자 로레인이 아쉬운 감정을 뚝뚝 묻힌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냉정한 눈으로 제이를 향해 말했다.
“잘 좀 부탁하지.”
“네, 전하.”
로레인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이동했다.
세린은 그런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향해 눈을 올렸다.
어느 날부터 제이는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키를 가졌고 아빠나 오빠들만큼 넓은 어깨를 가졌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도 남자다운 선이 생기면서 더욱 매력적으로 변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도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세린은 오늘따라 빛나 보이는 제이를 조금 쑥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공자는 오늘 너무 멋져 보이네요.”
“이런... 선수를 먼저 빼앗겨버렸군요. 황녀전하께서는 오늘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제이의 눈가가 사르르 접히면서 세린을 향해 웃었다.
주변의 영애들이 한탄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고 세린은 그런 제이의 모습에 수줍게 웃었다.
얼굴이 무기라는 것은 이런 외모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제이는 그런 세린을 향해 부드러운 몸짓으로 손을 뻗었다.
“저와 함께 춤을 추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세린은 다정히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두 사람은 무대에 올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이의 큰 손이 세린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
세린은 저절로 배에 힘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한 번도 가족을 제외한 남자와 춤을 추어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미묘한 긴장감에 세린이 빳빳해지자 제이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 미미한 웃음을 담았다.
그녀의 반응이 참 귀여웠다.
제이의 푸른 눈동자가 입술을 꾹 깨물고 시선을 피하는 세린의 눈동자로 향했다.
동그란 그 눈도 달콤해 보이는 입술도 천천히 눈에 담아가며 제이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첫 춤을 바라고 오지 않았는데 의외의 득을 보았다.
제이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세린을 부드럽게 리드했다.
세린의 머리는 하얗게 변해갔다.
‘으악!!’
허리에 닿는 제이의 커다란 손의 온기와 그의 매혹적인 눈빛에 생각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그의 리드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세린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발만 바라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최선인 것 같았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모습에 큭큭 웃으며 이내 허리를 받쳐주던 손을 스르륵 빼내고 그녀의 한 손을 잡고 무대 밖으로 안내했다.
“제이공자...?”
아직 음악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제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목이 마르실까봐 그랬습니다. 자, 여기...”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컵을 쥐여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세린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마워요” 인사를 한 후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제이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감추며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무대로 올라오자마자 얼굴이 찢길 듯한 살벌한 시선에 제이는 난감해졌다.
트레일의 눈은 이미 불타올라 있었고 테오의 눈도 서릿발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로레인과 황제도 마찬가지로 시선은 좋지 않았으나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제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제의 옆에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남성으로 향했다.
‘저 황태자 때문이겠지...’
샴페인을 한 입 마시면서 황태자를 본 제이는 이내 브론의 시선이 움직이자 몸을 옮겨 그의 시야에서 세린을 차단했다.
“공자?”
세린의 영문을 모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그저 웃었다.
“오늘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아! 오늘 오빠들이 골라주었어요... 잘 어울려 보인다니 다행이에요!”
그녀의 두 볼에 홍조가 가득 올라왔다.
뿌듯해 하는 시선과 표정이 괜히 귀여웠다.
그리고 남부의 황태자 즉, 브론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황녀와 자신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2황자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황제, 황태자가 그의 시선을 차단하며 무역과 이번 제국의 연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동생 헤일리도 마찬가지였다.
헤일리 앞에는 3황자가 그녀의 앞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황녀를 애지중지한다던데... 소문이 과소평가된 느낌이군.’
그냥 애지중지의 수준이 아닌 것 같아 브론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브론은 연회장을 바라보며 눈을 돌렸다.
연한 분홍색의 빛들이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두 볼에 홍조까지 들이며 춤을 추는 세린을 발견했다.
생기가 가득한 표정과 수줍어하는 기색이 가득한 그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조명 아래에서 유독 빛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리드하는 남성도 매우 빛나는 사람이었다.
티끌 한 점 없는 하얀 백발이 윤기 나게 아름다웠고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올곧게 황녀만을 담고 있었다.
영락없이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보는 이도 설레게 만들 정도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브론도 그 중에 하나였고 말이다.
브론의 남색 눈동자와 제이의 푸른 눈이 짧은 순간 마주쳤고 제이는 다시 시선을 돌려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자연스럽게 무대 밖으로 옮겨 그의 시야에서 그녀를 차단시켰다.
넓은 등에 가려진 작은 몸은 브론의 시선에서 전혀 닿지 않았다.
황족들에게만 보호받는 것이 아니었다.
브론은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며 이 상황을 즐겼다.
‘감출수록 더 궁금해지는 법이지.’
아직 동북제국에 머무는 시간은 많다.
브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동북 황태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제국 황태자들의 시선이 닿았다.
미래의 황제들의 기세는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 속에서 은근하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