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나는 당신의 세 번째 딸
“엄마.”
“......”
“많이 힘들었지...?”
“......”
“테오오빠는 무사해.”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영혼이 살아 있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내 말이 들리는 거... 맞지?
세린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트레일 오빠도 잘 지내고 로레인 오빠도 잘 지내고 있어.”
“......”
“나도 오빠들이랑 아빠를 만나서 행복해.”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목에서부터 차오르는 핏물에 세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 제 삶이었던 엄마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세린에게는 이제 살아있는 가족이 몹시 중요해졌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빠
언제나 다정한 테오 오빠
자신을 지켜주는 로레인 오빠
든든한 지원군 트레일오빠
자신에게는 이리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이 존재했다.
그러니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어떤 수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해도 지켜줄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듯 한 느낌이었다.
챙그랑!!!
세린의 마력석이 부서졌다.
타아앙!!!!!
마도구의 총구에서 거대한 마력이 발사되었고 동시에 아리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힘을 풀었다.
“컥!!.... 엄... 마?”
세린은 차오르는 핏물과 밀려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런 세린의 동공이 점차 커져갔다.
아리엘이 형성한 마력이 모두 흩어진 것과 함께 아리엘을 향해 세린의 마력이 달려들었다.
쿠과과과광!!!!
대지를 갈라버릴 만큼 매서운 기세가 아리엘에게 다가왔고 세린과 아리엘의 눈이 마주쳤다.
세린은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의지를 잃어가며 쓰러지고 있었고 아리엘의 얼굴은 점점 부드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세린!!!!”
황제의 애탄 소리와 함께 세린은 피로 범벅된 입가를 닦을 힘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쓰러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아리엘은 너무도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마치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엄마.....’
그렇게 세린의 마력이 아리엘을 강타했고 동시에 마법사들의 시체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연두색 마력이 터지고 아름다운 가루처럼 대지로 쏟아졌다.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아리엘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황제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막이 사라지자마자 서둘러 세린에게로 달려갔다.
“세린!!!!!”
황제의 품에 힘없이 안긴 세린의 얼굴은 이미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녀의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고 황제의 눈가는 붉어졌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딸을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일그러져가는 얼굴 앞으로 푸른빛이 나타났다.
“세린!!!”
트레일과 로레인, 테오였다.
트레일은 테오를 부축하며 허공에서 등장했고 로레인은 땅에 안착하자마자 보이는 세린의 얼굴에 창백해졌다.
서둘러 황제에게로 달려가 세린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굳어간 로레인은 황제에게 다급히 말했다.
“아버지! 어서 땅에 내려주세요!”
황제는 그런 로레인의 말에 세린을 부드럽게 땅에 눕혀 주었다.
로레인은 서둘러 세린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레인의 손에서 푸른 마력의 빛이 터졌다.
그러나 세린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얼만큼 마력을 사용한 거니...!’
로레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도 슬프게 일그러졌다.
테오는 황성에서 세린이 워프를 하자마자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쿠당탕!
앞으로 구르듯 넘어진 덕분에 온 몸이 아팠으나 지금은 아픔을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때, 그런 테오의 앞에 로레인이 푸른 빛과 함께 나타났고 로레인은 세린의 궁에 있는 테오의 모습에 놀라 서둘러 달려왔다.
“형님!!”
창백해진 안색으로 테오를 부축해준 로레인은 테오의 모습에 저주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음에 조금씩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아까 세린의 방에서 폭풍처럼 몰아친 마력은 세린의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가 테오의 저주도 풀었다고?
로레인은 다급히 테오를 향해 물었다.
“세린이 저주를 풀었나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쓴 것 같구나. 서둘러야 해”
“세린이 지금 어디로 갔나요?”
로레인은 창백해진 낯으로 물었다.
테오는 고운 눈썹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다시 북쪽으로 갔다!!”
“....!!”
로레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진 것과 동시에 트레일도 세린의 방으로 들어왔다.
들소처럼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트레일은 테오의 무사에 놀라 허겁지겁 그에게로 달려왔다.
“형님!! 무사하셨군요!”
“로레인! 지금 당장 워프해서 세린에게로 간다!”
로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형님, 지금 형님의 몸으로는 여기서 있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황성에 숨어 있으라는 것이냐...”
테오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살벌한 기색의 가운데 트레일이 말했다.
“레인형님, 제가 테오 형님을 부축 할 테니 워프해주세요. 지금은 세린이 중요합니다.”
“...”
로레인은 짙은 한숨을 쉬며 트레일과 테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탑의 성으로 워프를 한 것과 동시에 발견한 것은 진득한 피가 얼굴에 가득 묻은 세린이었다.
세린의 아름다운 연두색 눈동자는 감겨있는 속눈썹에 의해 보이지 않았고 파리해진 안색은 곧 죽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생기가 없었다.
로레인의 동공이 커졌다.
“세린!!!”
테오의 가슴은 무너졌고 트레일의 눈도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테오는 세린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세린을 말렸다.
시간을 돌리는 마법을 사용했으면서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말인가.
테오는 로레인이 세린에게 마력을 넘기며 치료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는 왜 이리 고통스러운 일을 자처하는 것이냐.
너는 그저 안전한 곳에서 사랑만 받고 좋은 것만 바라보며 살기를 원했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너는 왜 그리 무리를 하는 것이냐
테오는 트레일의 부축을 받아 세린의 옆에 앉았다.
입가에 가득한 핏물이 안쓰러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로레인은 땀을 흘려가며 세린의 치료에 집중했다.
대마법사의 마력을 갉아먹을 정도로 세린의 내상은 심각했다.
마탑에서 막 빠져나온 제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세린의 모습이 환영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세린의 생명은 꺼지고 있는 듯이 애처로워보였다.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제이의 눈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리사도 이엔도 마찬가지였다.
*
세린은 꿈을 꾸었다.
그것은 아리엘의 꿈이었다.
세린의 주변에는 온통 푸른색의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녀의 건너편에는 다정히 웃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세린.”
아리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세린의 눈이 점차 크게 떨려갔다.
“엄마...”
점점 세린은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하늘같은 머리카락도 저 연두색의 눈동자도,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미소도 분명한 아리엘의 모습이었다.
아리엘은 그런 세린을 향해 다정이 웃으며 말했다.
“세린 엄마가 미안해.”
“엄마...!”
아리엘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너한테 이런 일을 부탁해서 정말 미안해.”
세린의 눈가도 붉어졌다.
“하지만 너희 아빠한테 이런 일을 시킬 수 없었어...”
마지막까지 그를 아프게 만들 수 없었다며 미안하게 웃는 아리엘의 얼굴에 세린은 또 한 번 눈물을 참았다.
아리엘은 천천히 세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고운 손이 세린의 손을 붙잡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세린의 이마에 닿았다.
“사랑하는 우리 딸.”
“....”
“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어.”
세린은 그녀의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빠를... 오빠들을 잘 부탁해.”
“엄마...”
“정말 사랑해...”
아리엘은 그 누구보다 환히 웃으며 세린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이 부실만큼 환한 빛이 터지고 세린은 꿈에서 깨어났다.
로레인은 끝도 없이 빠져나가는 마력에 지쳐갔다.
세린의 눈이 떠질 것 같지도 않아서 그의 마음은 조급하기까지 했다.
괴로워하는 로레인의 얼굴을 보며 황제는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딸을 이대로 잃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던 그 때였다.
세린의 가슴에 올린 로레인의 손 밑에서부터 눈부신 푸른빛이 터졌다.
로레인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손 밑으로 느껴지는 푸른 마력은 '아리엘'의 마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푸른 빛이 점차 거대해지더니 세린의 몸을 모두 덮을 정도로 밝기가 비춰졌다.
기사단들도 황제도 그리고 형제들도 모두 눈을 찌푸렸다.
눈이 부신 환한 빛은 점차 약해지더니 이내 하늘 위로 흩어졌다.
로레인은 잔뜩 굳은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내려 세린을 보았다.
하얀색의 피부는 이제 홍조가 옅게 올라와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머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름다운 연두색 눈동자가 열렸다.
로레인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애써 웃으며 세린의 품에 힘없이 기대었다.
‘어머니...!!’
당신은 끝까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던지 세린도 눈물이 고인 눈으로 천천히 로레인에게 두 팔을 올려 그를 꼭 껴안았다.
그 따스한 품에서 로레인은 소리 없이 울었다.
세린은 힘없는 웃음소리로 말했다.
“아빠... 오빠...”
황족들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세린에게로 향했다.
세린은 그 어떤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사랑해요...”
세린은 그 날, 아리엘의 세 번째 딸로 다시 태어났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녀의 마지막 영혼의 조각이 세린을 한 번 더 살렸으니 어쩌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세린은 다시 엄마의 꿈을 꾸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