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축제를 보고 싶어요!
제이는 고운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이엔은 다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십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그렇지.”
둘의 대화에 세린의 눈이 커지며 물었다.
“아! 둘이 아카데미에서 만났겠네요! 리사경도 이엔을 알고 계시던데...!”
“네, 아카데미에 함께 입학한 동기입니다.”
제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에게 말하며 조금 냉정하게 이엔을 바라보았다.
좋게 말해서는 아카데미 동기였고 나쁘게 말해서는 원하지 않은 인연이었다.
서로 같은 사람을 향해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으니 아무리 서로를 좋게 바라보려고 해도 친구는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세린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제이와 이엔은 그저 예의상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제이는 세린을 따라 티 테이블에 앉았고 세린의 요청에 이엔과 나란히 마주 앉게 되었다.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세린은 즐거워보였다.
제이도 이엔도 그런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웃으며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는 점차 연회에서 제국민들의 잔치로 흘러갔다.
“수도에 있는 백성들은 온 거리를 다양한 게임과 먹거리, 술을 유흥삼아서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꽤나 시끌벅적하고 보는 재미가 있지요.”
“와아....”
“제가 알기론 글피가 축제의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마지막이요...”
제이의 설명을 들으며 세린의 기분이 천천히 내려갔다.
한 번도 성 밖으로 나가보지 못해서 백성들의 축제와 그들의 생활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리 재미있어 보이는 축제는 곧 끝난다고 하니 세린은 밀려오는 아쉬움에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축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생각보다 체념하기가 힘들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시 잠겼다.
한 번도 성문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세린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제이는 이제 그녀가 성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였고 곧바로 세린을 올곧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 여쭈어보시고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축제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정말요...???”
세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이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인상이 확 일그러진 이엔은 제이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눈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제이는 그런 이엔을 무시하며 세린만을 바라보았다.
“몰론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고 하셨을 때입니다 전하.”
“네! 제가 오늘 말씀드려볼게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우는 세린의 모습이 귀여워 제이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티파티가 끝나고 제이는 세린의 마중을 정중히 거절하며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했다.
이엔은 그의 뒤를 따라 다급히 걸으며 제이를 날카롭게 불렀다.
“공자님.”
“.... 뭐지?”
“주제가 넘는다는 것을 알지만 황녀전하께 제안하신 이야기를 거두어 주세요.”
“주제 넘는 발언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이번만큼은 흘려들어 주겠다.”
“공자님!”
“하....”
이엔의 언성에 제이의 미간이 좁아지며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이엔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황녀전하께서는 아직 성 밖으로 나가기에는 위험한 요소가 많습니다! 왜 그런 제의를 하신 것인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제이는 그런 이엔의 말에 비웃음을 가득 지으며 말했다.
“웃기는군. 너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건넨 제의가 아니다.”
이엔은 으득 이를 갈며 날카롭게 말했다.
크고 건장한 몸에서 강한 기운이 풀풀 풍겼고 그것은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제안을 거두어 주세요! 황녀전하를 위험하게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묻지.”
제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엔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럼 황녀전하께서 안전하게 밖으로 나가실 때는 언제인거지?”
“...!!”
이엔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제이는 냉정한 얼굴로 그런 이엔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분이 밖으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때가 언제 오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언제지?”
“.....”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제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너도 그렇고 폐하와 전하께서도 너무 그녀를 가두고 살았다는 생각은 안 하나?”
“.....”
“이제는 그분도 성년이시며 자신의 의견에 따라 밖으로 나가실 수 있다. 그리고 넌 뭐가 그리 걱정인거지?”
“그건....”
“마탑의 마법사들과 그녀의 마력에 관한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뭐가 걱정인거냐.”
“.... 그걸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군. 그렇다면 넌 여태껏 무엇을 위해 훈련을 한 거지?”
“...!!”
“네가 지금 그녀의 전속 호위기사라지. 본래부터 그걸 목표로 훈련한 것은 너다. 그녀의 신변에 위험이 닥치기 전에 지키는 것이 호위기사의 일이 아니던가?”
이엔은 제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이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숨긴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지. 너도 전하를 호위하는 것에 있어서 생각을 조금 더 해보는 것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제이는 냉정하게 뒤를 돌았다.
이엔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이는 딱히 이엔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경멸하고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저렇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세린의 곁을 보호하는 기사의 그녀를 숨기고 감싸려고만 하는 태도가 용납할 수 없어서 한마디를 해줬을 뿐이었다.
모든 것은 이엔을 위해서가 아닌 세린을 위해서였다.
*
그날 저녁, 세린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슬금슬금 황제를 바라보며 타이밍을 노린 세린은 이내 다짐하는 듯 한 얼굴로 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이미 자신의 눈치를 보는 딸을 알고 있었기에 피식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느냐?”
“... 아빠....”
한 번도 부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먼저 성문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표현한 일도 없었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가족과 함께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을 추구했던 세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살았던 그 세상이 궁금했고 황궁 밖의 제국민들의 세계가 궁금했다.
세린은 맑은 눈동자로 말했다.
“수도의 제국민들 축제를 보고 싶어요!”
멈칫!
황제와 로레인, 트레일의 손이 멈췄다.
황제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세린을 바라보았다.
의지가 강한...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문 딸의 모습에 황제는 천천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슬픈 눈으로 세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도에 말이지...?”
“... 네! 제국민들의 축제를 보고 싶어요!”
“그렇구나...”
황제는 애틋한 눈길로 그런 세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날을 위해서 미리 예상도 해보고 대비도 생각해 두었던 황제였다.
세린이 안전하게 성문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했던 황제였으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 상황이 조금 서글펐다.
조금 더 제 품에 안고 지켜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나이도 그럴 아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레인은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여태껏 성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잘 지내준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답답함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한 황족들 덕분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내비치지 않으려는 세린의 마음에 뒤를 돌아봐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황제는 다정하게 세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그리도 성 밖이 궁금했느냐?”
“네... 저도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저도 황족이니까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황제는 세린의 호탕한 외침과 다짐에 수많은 걱정을 지웠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도록 하거라. 대신 이엔과 함께 가야한다.”
황제는 굳은 마음으로 다짐하며 딸의 외출을 허락했다.
“아빠!!!”
세린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며 두 팔을 뻗어 황제의 품으로 안겼다.
그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진작 밖으로 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그랬다며 미안해하던 황제는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세린은 그런 황제에게 안겨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이엔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꼭 안전하게 다녀올게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세린의 미소가 그리도 예뻐서 로레인도 트레일도 황제도 그저 웃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단어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이공자가 축제 안내를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달그락!
식기 위로 나이프가 떨어지는 애처로운 소리와 함께 황족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 제이공자...?”
미소가 일그러진 트레일의 물음에 세린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축제 안내를 도와주시기로 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 으득”
트레일은 이를 물으며 냉정한 눈으로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로레인도 그 꽃 같은 미소를 애써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말 허락하겠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외출을 허락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저 기뻐하는 얼굴에 다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더는 나쁜 아버지가 되기 싫었던 황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결국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황제는 백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제이공자의 실력도 잘 알고 있으니 어쩌면 더 안전하게 세린이 외출을 하고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카데미를 황태자 테오만큼 빠르게 졸업한 아이였다.
그리고 북쪽지역의 일을 통해서 황족들을 도와 이엔과 함께 마탑의 일을 조사해주던 제이를 알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역의 일을 함께 하며 이엔이 어둠술사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해주는 모습도 높이 평가했던 참이다.
무슨 일이던 세린만 안전하게 돌아온다면 황제는 상관없다는 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