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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50화 (50/218)
  • 50화. 이엔과 호위기사

    제이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함께 기다리던 세린은 멀리서 다가오는 흰색의 마차와 백마를 발견했다.

    세린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지며 제이를 향해 말했다.

    “저기 오네요!”

    “그렇군요...”

    제이는 그런 세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부시고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제 저녁, 5년 만에 처음 보았던 세린의 모습에 제이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온 마음을 빼앗겼다.

    5년 전에도 그러했으나 지금도 그러했다.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춤을 추는 세린의 얼굴을 제이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름다운 미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뒤를 돌아 등을 보여주자마자 제이는 걷잡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 아름다운 등의 선을 관찰하는 영식들의 눈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고 저런 드레스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세린의 모습에 한탄하며 유혹까지 당한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작영애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황족들도 유난을 벌이며 사랑하고 아끼는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제이는 머리의 피가 말랐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다시는 그녀의 앞에 그런 오물이 나타나지 않도록 정리했다.

    그러나 제이는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화가 났다.

    이미 그녀가 깊이 상처를 받았으면 어떡하지? 자작영애의 말로 아직도 슬퍼한다면?

    다행스럽게도 다음 날이 되어 마주한 세린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고 그늘도 없었다.

    제이는 그런 애틋한 마음으로 세린을 바라보았다.

    저 아름답게 빛나는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보기 위해서 몇 년을 참고 버텼던가.

    5년의 지옥도 세린의 미소 한 번이면 모두 녹아내렸다.

    시간은 흐를수록 마음은 깊어졌고 점점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제이의 삶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에게 말했다.

    “전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공자!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부끄럽게 웃는 그 수줍은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녀전하. 귀한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세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조심스럽게 고운 손을 들어 제이에게 건넨 세린은 손등 위로 제이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자 거세게 심장이 요동을 부리는 것을 느꼈다.

    제이의 하얀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자취를 감췄다.

    세린의 얼굴은 뜨거워지고 제이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둘은 다시 한 번 서로가 붉어진 얼굴로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세린은 제이를 떠나보낸 후 서재 책상의 젖은 편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멜은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세린은 어차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젖어버린 편지에 답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 다 버려줘! 대신 꽃 한 송이씩 답장으로 보내주겠어?”

    멜은 부드럽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세린은 읽을 수 없는 편지에 대해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답장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세린은 책 한권을 꺼내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제이를 오랜만에 만나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러다 생각이 점점 이엔에게로 넘어갔다.

    졸업을 한 후 이엔은 왜 자신을 찾지 않았을까?

    그만큼 이엔은 여기 황궁이 싫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세린의 눈이 조금 찌푸려지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편지라도 한 통만 남겨줬으면 이해했을 거야...!’

    그런 세린이 고민에 빠졌을 때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황제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태양궁으로 지금 가보시겠습니까?”

    “아빠가??”

    세린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 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궁으로 향했다.

    천천히 태양궁으로 걸어가는 세린은 황제가 왜 자신을 불렀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기에 더욱 궁금해진 세린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태양궁의 집무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세린은 분홍빛의 근사한 머리카락을 찾지 못했다.

    대신 밤하늘 같은 윤기가 나는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속의 황금을 뿌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를 발견했다.

    세린의 몸이 굳어졌다.

    길고 탄탄해 보이는 몸과 잘 어울리는 검은 색 제복, 그리고 그 사람의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 창문 밖의 노을의 빛을 받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바라보며 세린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 엔...?”

    그는 이엔이었다.

    이엔의 눈도 세린만큼이나 커졌다.

    금빛 눈동자에 섞인 당황을 읽은 세린이 멍하니 이엔을 바라보았다.

    제이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엔도 마찬가지였다.

    훤칠해진 키도 트레일 만큼 넓고 단단해진 체격도 더욱 수려해진 얼굴도 모두 낯설었다.

    이엔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세린을 더욱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린만큼이나 놀란 이엔은 어릴 적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소녀가 이제는 아름다운 한 여인으로 자라있는 모습에 무척이나 놀랐다.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선을 돌리지 못한 이엔은 금빛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전하.”

    잔뜩 붉어졌을 제 얼굴을 보지 못하셨기를 바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세린은 그런 이엔에게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고개 들어! 인사는 그 정도면 충분해!”

    이엔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싱그러운 연두 빛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다워 이엔은 입안을 깨물었고 이내 세린이 환하게 지은 미소에 피가 나올 만큼 물어버린 이에 힘을 주었다.

    세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엔! 정말 이엔이 맞구나!”

    “... 네 전하.”

    “작년에 졸업했다고 들었는데... 그간 소식이 없어서 떠난 줄 알았어...”

    내가 그녀를 두고 어디로 떠날 수 있을까.

    이제 내게 돌아갈 장소도 찾아갈 장소도 전부 그녀의 곁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5년을 버텼고 그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엔은 애틋한 눈으로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제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제가 돌아갈 장소는 여기입니다.”

    “그렇구나... 이엔은 목표했던 기사가 되었네?”

    “네.”

    세린은 맑게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엔은 그런 세린의 미소를 바라보며 저 사랑스러운 미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 때, 황제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세린.”

    “아빠!”

    세린은 황제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주며 웃었다.

    황제는 따스한 온기를 담은 손길로 그런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엔이 돌아왔어요!”

    “그렇구나...”

    황제는 잠시 시선을 돌려 이엔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도 훌륭히 수석졸업을 했고 졸업 후 1년을 테오를 도와 북쪽 중립구역의 일을 함께했다.

    황후의 흔적을 찾는 중에 중요한 것을 발견해줬으니 황제는 이젠 그런 이엔을 신뢰할 수 있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이엔이 너의 기사가 될 것이란다.”

    “저의 기사요?”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너를 지켜줄 단독 호위기사로 오늘 임명했단다. 세린 네가 기사들이 많이 따라다니는 것이 싫다고 했다지?”

    “그, 그랬지만... 이엔의 의견도 중요해요 아빠!”

    “녀석이 원하던 일이었다. 너를 지키고 싶다더구나.”

    “네??”

    세린의 눈이 이엔을 향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눈동자에 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받아주신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세린은 그런 이엔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당연히 좋지!! 하지만 이엔, 정말 나 하나만 지키는 건데 괜찮겠어?”

    이엔의 꿈이 고작 한 명의 사람만 지키는 기시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 세린의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엔은 이어 말했다.

    “그것을 위해서 훈련했습니다. 부디 황녀전하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세린을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직접적인 맹세의 자세였고 종속되겠다는 표현이었다.

    세린은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그런 이엔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릎은 꿇지 마!”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손을 잡은 작고 여린 손의 온기에 이엔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담겨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아무한테나 이렇게 무릎을 꿇으면 안 돼.”

    “네.”

    황제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이내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엔은 황제를 향해 진심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마치 지난 이엔의 5년을 수고했다고 해주는 듯 한 그 잔잔한 미소에 이엔의 가슴은 따뜻해졌다.

    오랜만의 만남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하루는 깊어갔다.

    ‘세린.’

    엄마...

    ‘엄마를 버려줘.’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사랑스러운 눈동자에 고여진 눈물이 세린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엄마를...’

    그만해...!

    ‘버려줘....!!!’

    세린의 눈이 번뜩 떠졌다.

    세린의 눈동자에 가득 고인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아직 깜깜한 밤을 관찰하던 세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미간을 좁혔다.

    어릴 적, 마력을 사용해서 쓰러진 이 후부터 매일같이 꾸었던 엄마의 꿈은 이제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근 몇 달 만에 꾼 엄마의 우는 모습에 세린의 가슴은 짙은 고독을 품었다.

    ‘버려 달라니... 꿈이라지만 정말...’

    꿈속에서 흘리던 엄마의 눈물이 세린의 마음속에 계속 남았다.

    결국 눈을 뜬 채로 아침이 밝았고 세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훈련용 제복을 입기 시작했다.

    잠도 더 오지 않았고 기분도 좋지 않아서 마력훈련을 하며 기분이라도 풀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린은 아무렇지 않게 침실의 문을 열며 앞으로 나갔고 동시에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아야!”

    이마로 다가온 작은 충격에 이마를 감싸며 급히 고개를 들어본 세린은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발견했다.

    단단한 무언가는 바로 이엔이었다.

    세린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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