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제이 스페라도
“제이.... 공자...?”
세린의 놀란 목소리에 그는 곱게 입가를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 목소리보다도 더 낮고 굵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전하.”
세린은 그의 푸른 눈을 마주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제이공자 맞나요??”
제이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세상에....”
세린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간 찾아뵙고 싶었지만... 중립지역의 문제로 가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사정은 리사경에게 들었어요... 제이공자야말로 졸업을 하자마자 힘들었겠어요... 리사경처럼 제이공자도 기사가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기사는 될 마음이 없을 뿐더러 이번 지원요청도 대공작의 후계자로써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랬군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걱정해주셔서 기쁩니다. 다친 곳은 없으니 안심하시기를...”
제이는 세린의 걱정이 어린 말을 들으며 눈을 곱게 휘어 웃었다.
그리고 조금 미안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리 오랜만에 뵈어 기쁘기 그지없으나....”
“네??”
“제가 지금... 다시 가봐야 합니다....”
“벌써요....??”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떠난다는 것인지...
세린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고운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 후 고개를 들은 제이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달며 말했다.
“이미 없어진 예법의 하나지만...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이리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 아니에요 공자! 고개를 들어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세린의 모습에 제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중립지역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전하를 뵙고 싶어 이리 달려와 버렸습니다. 다시 대공저로 돌아가 보고서를 작성하여야... 다시 황궁으로 입궐하여 전하를 뵐 수 있습니다.”
“아아...!”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자신을 보러 오겠다는 소리에 세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싱그러운 연두색이 눈동자가 밝아지자마자 제이도 다정하게 웃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제이는 천천히 세린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럼 언제 오실 건가요 공자?”
“당장 내일도 가능할듯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전혀 무리가 아니오니 염려는 하지 마시길...”
제이는 두 손을 뻗어 세린의 어깨에 얹은 망토의 매듭을 곱게 묶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반달로 휘며 웃고는 “내일 뵙겠습니다.
“ 라고 인사를 한 후 테라스 밖으로 뛰어 내렸다.
“고.. 공자!!”
다급히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자 정원에서 멀쩡히 서서 팔을 작게 흔드는 제이가 보였다.
세린은 안심이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제이는 깊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세린은 사라진 제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천천히 휘장을 열었다.
잠시 뿐이었던 그 오랜만의 만남은 세린의 흔들린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다.
연회는 이제 시작이었고 세린은 오늘 그 누구보다 행복한 날일 것이다.
제이는 깊은 숲을 지나 황궁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붉은 머리의 에리스가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마차에 오르려 걸어가고 있었다.
제이는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재빠르게 잡은 후 황궁의 벽에 거칠게 밀어버렸다.
“꺄악!!!”
쿵!!
강하게 벽과 부딪힌 등이 아파 눈물을 글썽인 에리스는 자신의 멱살을 거칠게 잡은 손길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이였다.
제이의 푸른 눈을 보자마자 에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네가 드디어 미친 것이 분명해졌군.”
“제.. 제이 공.... 끅!!!”
떨리는 에리스의 말을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막아버린 제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부터 지독하게 따라다닌 것을 눈감아 주었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나?”
“그.. 그게 아닌...”
제이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에리스는 “끅끅”소리를 내며 바둥거렸지만 그의 손길에 자비는 없었다.
“그 사람은 네가 함부로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끄윽!!!”
“넌 눈도 마주칠 수 없어.”
에리스는 숨도 쉬지 못하고 창백해져갔다.
제이는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늘 좋은 것만 보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너같이 천박한 것들을 그녀의 눈에 담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내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어.”
제이의 한 쪽 입 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전하는 지금 많은 귀족들을 만난 것이 처음이고 너 같은 인물을 만난 것도 처음이라...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까...”
제이의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에 에리스의 노란색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제이가 환하게 미소를 입가에 담자 하얀 치아가 눈에 띄었다.
“내가 오늘 그녀를 대신해서 처리하도록 하지.”
그리고 곧바로 그녀를 바닥에 내팽겨 쳤다.
“꺅!! 콜록!!! 어헉... 허억 헉!!!”
바닥을 구르며 기침을 내뱉은 에리스는 점점 다가오는 제이를 피해 뒤로 기어갔다.
“오... 오지마!! 오지 말란 말이야!!!”
“고작 자작가 주제에 감히 내게 반말까지... 대담하군.”
“꺄아아악!! 사, 살려줘!!!”
제이는 기다란 다리를 뻗어 에리스의 배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하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꺄악!!!”
에리스는 아카데미에서부터 끊임없이 제이에게 구애했다.
그의 모든 공간을 침범하고 뒤를 쫓아가며 눈을 번뜩이던 그녀의 모습에 제이는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만하라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욕심은 멈추지 못했고 제이가 아카데미를 다녔던 그 3년을 쉬지 않고 쫓아다녔다.
제이의 인내심은 바닥을 내려쳤으나 이내 졸업을 앞두고 여전히 쫓아다니는 에리스를 향해 마지막 경고를 하듯이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너 같은 것 따위에는 관심 없다.”
“제이공자께서 관심을 가지는 인물이 있기는 한가요?”
“여기가 아카데미이기에 네 어이없는 말투를 넘어간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
“여기가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네 목은 지금 얼굴과 분리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공자.....!”
“그 멍청한 입은 쉬는 시간도 없나?”
“.......”
수치심에 에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같은 것들에게 내가 왜 관심이 없는지 그게 그리도 궁금한가....?”
“....”
제이는 비웃음을 가득 지으며 말했다.
“제국의 황녀전하를 만나고 난 후 난 이미 그녀에게 종속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
“이제 답을 찾았기를 바라지. 더는 네 어이없는 행동을 눈감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제이는 냉정히 뒤를 돌았다.
에리스는 이엔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황녀의 저주에 대해서 제멋대로 이야기를 하던 에리스를 이엔은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제지했었다.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짙은 분노를 담으며 말했었다.
“황녀전하의 이름 한 자라도 모욕하신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제 목에 겨누어버릴 눈빛이었다.
에리스는 자신이 마음에 담은 그 두 사람의 중심에 올라선 황녀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 질투는 시간이 갈수록 거대해졌고 이내 그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져 제국의 황녀를 모두의 앞에서 깎아내렸다.
멍청한 그 행색의 대가는 컸다.
제이는 공포에 질려 동공이 하얗게 변해가는 에리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왜 제국의 기사를 하지 않은 줄 아나?”
그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이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기사는 레이디를 존중하고 지켜줘야 하지. 하지만 내게 레이디란 그 분 뿐이라서 말이야.”
“...... 윽....”
“한마디로 그녀 말고 다른 여자들은 굳이 존중할 필요도, 지켜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기사가 되지 않았노라고
그러기에 너를 이리도 망가트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잘 가거라.”
“제, 제발 용서를... 꺄아아아아악!!!!”
에리스의 비명은 연회장의 큰 노래 소리에 섞여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제이는 볼일을 해결하고 다시 황성 테라스가 보이는 정원의 밑으로 이동했다.
창문을 통해 세린의 모습을 찾던 제이는 이내 밝게 웃으며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세린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제이는 한참을 세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름다운 조명 아래에 황궁은 늦은 밤까지 빛났고 황성 밖의 백성들은 거대한 잔치를 열어 깊은 밤까지 즐겁게 먹고 마셨다.
황제는 황궁 테라스에 보이는 제국민들의 축제를 감상하며 입가게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운 날이었고 세린도 행복해 보였다.
황제는 애틋한 눈으로 휘장 밖의 세린을 바라보았다.
테오의 옆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 미소가 너무도 어여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 때 시종이 조심스럽게 황제를 불렀다.
“폐하.”
“말하라.”
“북쪽 중립구역에서 또 강한 폭발이...”
“.... 쯧.....”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이 구겨지며 혀를 찬 황제는 와인 잔을 시종에게 건넨 후 망토를 펄럭이며 자리를 이동했다.
작년부터 북쪽지역에 거주하는 제국민의 마을 근처에서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폭발의 피해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점차 커지고 있었고 점점 마을 백성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어 황제의 걱정이 깊어져만 갔다.
“국민의 피해는 큰가?”
“마을 하나가 형태를 잃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피해 인원을 조사하며 알아가고 있사오나... 모두 재로 변해서 그 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예측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마법에 의한 폭발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마탑의 짓인가...”
“그것도 아직...”
“어이가 없군....”
황제는 구겨진 미간을 피지 못하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