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예전의 모습
트레일은 결국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고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세린!”
“네, 오빠.”
“드레스... 너무...”
“.... 드레스가 너무?”
그리고 세린은 조금씩 그가 저러는 이유를 알기 시작했다.
'아... 하긴. 등이 이렇게 파여 있는데... 허락을 해준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제대로 못 들었던 거겠지’그러다 이내 트레일이 어떻게 말을 할지 궁금해 입술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트레일은 붉은 그 눈동자를 마구 흔들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 그 드레스 말이야! 너무 예쁘긴 한데...”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던 세린의 미소가 생각나서 입 밖으로 갈아입어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트레일은 고통스러운 얼굴과 달리 부드러운 몸짓으로 세린을 이끌어 춤을 추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세린은 노래가 끝나가자 점점 우울해져가는 트레일의 모습에 결국 크게 웃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
“아하하하하!”
“세린...?”
“풉! 크큭큭.”
웃음이 자꾸 나와서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은 세린은 눈을 올려 트레일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만 봐주세요!”
“....?”
“다음에는 제 드레스를 고를 때 오빠가 골라주세요.”
“...!!!!”
트레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세린!!”
안아주려는 듯 두 팔을 제게로 뻗는 트레일에게서 냉정히 뒤를 돌며 세린이 말했다.
“이제 노래 끝났거든요? 저도 첫 사교계 데뷔니까 영애들이랑 이야기 조금만 나누고 올게요.”
“히익! 세린 드.. 등!!!”
고운 등의 선과 잘록한 허리가 눈에 보이자마자 트레일이 비명처럼 세린을 불렀다. 안 된다나 뭐라나,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입고 와버렸고 지금 이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즐기고 싶었다.
트레일은 비록 작전에 실패했지만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변했다. 황제는 뭔가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로 다시 돌아오는 트레일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느냐?”
“아버지...”
트레일에게로 황태자와 로레인의 시선까지 모였다. 트레일은 피식 멋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세린이 다음 연회나 파티에서는 저에게 드레스를 골라줄 기회를 주었습니다.”
“!!!”
단번에 황제와 황태자, 로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보다 좋은 소식이 없다고 생각한 황제는 트레일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수고했구나.”
“감사합니다.”
화목한 부자들의 대화였다. 그러던 중 테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저 드레스를 계속 입고 있도록 해야 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트레일이 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세린이 도중에 갈아입는 것은 싫어하기도 하고... 거절을 해서...”
그러자 황제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도 성공하지 못한 건가...”
로레인도 황제의 탄식을 부추기며 말했다.
“실망이야... 트레일.”
“아, 아니 아까는 잘 했다면서요...!”
“웃기는구나. 그 말은 기각하겠다.”
“아니..!! 아버지...!”
참 다정한 부자들의 대화였다. 세린은 천천히 영애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세린이 다가서자 영애들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세린은 조금 어색해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꽃을 뵙습니다.”
영애들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세린에게 인사했고 세린은 그런 영애들을 향해 다정히 말했다.
“인사는 되었어요. 그보다 아름다운 영애들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다정한 눈동자와 부드러운 입가의 미소가 영애들의 여린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영애들은 각자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남작, 백작 등의 신분의 영애들은 세린의 눈에도 참 귀엽고 풋풋한 매력이 가득했다.
다정한 눈으로 세린이 “모두 다 너무 예쁘시네요, 하얀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라고 말하자 영애들의 볼이 붉어졌다.
“황녀전하께서 훨씬 아름다우세요.”
“저는 여신이 강림하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영애들의 칭찬어린 감탄에 세린이 난처하게 웃었다. 자신을 칭찬해주는 말이 고맙지만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세린은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어린 소녀였다. 세린은 말을 돌리기 위해 이번 연회가 어떠한지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
“제국의 꽃을 뵙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세린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밝은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영애와 그 비스듬한 각도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영애까지 총 두 사람이었다.
금발의 영애는 자신을 '메이 백작가의 장녀 렌 메이' 라고 소개했고 붉은 머리의 영애는 자신을 '로베론 자작의 장녀 에리스 로베론' 라고 소개했다.
세린은 조금 불쾌해진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향한 인사가 그만큼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 느낌은 오해가 아니었고 말이다. 백작영애가 부드럽게 고개를 올려 세린에게 말했다.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는듯하여 궁금한 마음에 이리 인사드립니다.”
“그렇군요...”
세린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옆의 자작영애가 날카롭게 눈을 뜨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백작영애도 자신을 싫어하는 티가 났지만 이처럼 격하게 경멸하는 듯한 눈빛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이가 자신을 저리도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참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자작영애가 말했다.
“황녀전하께서는 피부가 참 하얗고 예쁘십니다.”
“... 고맙습니다.”
“다리도 하얗고 깨끗하시고요.”
“.....”
“다행스럽게도 아픈 곳 또한 없어 보이십니다.”
“레이디 에리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봅니다.”
세린이 눈을 찌푸리며 물어보자 에리스 로베론은 한 쪽 입 꼬리만 끌어당겨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요. 전 그저 황녀전하께서 다시 아프실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입니다.”
“다시...?”
그녀의 노란색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예전처럼 황녀전하께 또 다시 저주가 생겼을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요.”
세린은 말을 잃고 말았다. 에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애들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마치 무언가를 피하는 듯 세린에게서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에리스는 입가에 짙은 비웃음을 가득 담았다. 그러나 세린은 평온한 눈으로 그런 에리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리스는 편안해 보이는 세린의 모습에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제 걱정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황녀전하, 저주는 괜찮으신 것인...”
“레이디 에리스.”
세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고 에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네 전하“ 라고 대답했다. 세린은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무례하다고 해야 하는지... 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무 생각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니 제가 이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
불쾌한 수치심에 에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전하!! 이 무슨 모욕을...!!”
“그러니까. 영애의 말은.”
세린은 다급한 에리스의 말을 잘랐다. 냉정한 눈으로 에리스를 바라본 세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의 황제폐하께서 열어주신 이 성년식에서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를 황녀를 데뷔시켰다는 그 이야기가 아닌가요?”
“....... 그런...”
에리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세린은 그런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귀족도 평민도 모두 이 제국의 국민들입니다. 그런 국민들 덕분에 제국이 숨을 쉬고 땅을 밟아가며 살아갈 수 있음으로 배웠는데... 영애의 말은 지금 황제폐하와 우리 황족들이 그런 제국민들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표현이 아니신가요?”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말씀을 조심하세요. 저로 인해 모두의 오해가 깊어져 많은 귀족분들이 무서움에 떠실까봐 두렵습니다.”
“.......”
에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사과도 없이 뒤를 돌아 사라졌다. 그런 에리스의 모습을 분한 얼굴로 바라보던 백작영애도 고개를 한 번 숙이며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나갔다.
세린은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서 있는 영애들을 향해 짙은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연회를 마저 즐기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연회장의 테라스로 향했다.
휘장이 달려있는 테라스에 들어선 세린은 조용히 휘장을 내리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내가 저 영애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자신을 그리도 미워하는 것일까? 세린의 그런 고민이 점차 저주로 옮겨갔다.
자신의 하얀 손을 바라본 세린은 이내 저주로 몸이 썩어 죽어가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버렸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짙어지는 슬픔을 무시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두 손을 마주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항상 아빠와 오빠들의 사랑을 받느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무뎌져가고 있던 세린이었다. 그러나 자작영애의 날카로운 그 말을 들으며 세린은 다시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졌다.
스르륵
“...!!”
그런 그녀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부드러운 망토가 내려앉았다. 다급히 뒤를 돌아본 세린의 눈동자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깊고 아름다운 눈매 속의 푸른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은 붉은 색의 생기를 가지고 있었고 오똑한 코도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길고 고운 눈썹을 간지럽혔고 그 눈썹 밑의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서 세린은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세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금색의 자수가 달린 은색의 제복은 그의 몸에 딱 맞아 탄탄한 몸을 부각시켰고 넓어진 어깨와 매끈하게 들어간 허리 밑으로 뻗은 긴 다리도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예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세린의 기억 속의 소년 제이 스페라도였고 그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한 '남자'였다.
제이 스페라도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