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녀의 드레스
그런 생각에 잠기자마자 리사가 말했다.
“오라버니도 저처럼 졸업을 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북쪽 지역의 전장으로 떠났거든요. 저도 오라버니가 졸업한 후 2년간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가 3개월 전에 북쪽에서 만났습니다.”
“전장이요??”
“네. 아무래도 2년 전에도 북쪽 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지원군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동한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 지역의 전쟁으로 제국민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서 꼭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립구역에는 마탑이 있기에 조금 더 조심해야 했고요.”
“마탑....”
예전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마탑이라는 단어에 세린이 놀란 눈을 했다.
황궁에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만 받으며 키워진 세린이라서 황궁 밖의 생활과 위험한 상황, 그리고 위험한 마탑의 마법사들에 대해 면역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위험한 인물들인지 이야기만 들어서는 가늠이 가지 않았기도 했다.
세린은 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려갔던 마음이 풀려갔다.
사정으로 인해서 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이내 이엔의 생각이 들어 다급히 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리사경... 이엔이라고 아시나요?”
“이엔이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린을 바라본 리사는 조금 분노가 담긴 얼굴로 비스듬하게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지요....”
“표정이... 이엔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조금... 그러고 보니 황녀전하. 이엔을 알고 계시나요?”
“아... 어릴 적에 알고 지냈던 아이였어요. 그 친구도 아카데미로 갔는데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리사는 조금 당황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저보다 1년 전에 먼저 졸업했습니다. 본래 저와 함께 2년 전 조기졸업을 노렸지만 오라버니에게 빼앗겼죠. 그 후 다음 해에 이엔이 조기졸업을 했습니다. 저도 조기졸업을 먼저 뺏긴 것이 여간 분하더군요...”
리사는 그 말을 끝으로 중얼중얼 이를 갈며 '망할 수학'라는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세린은 리사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엔도 이미 졸업?? 그럼 이엔은 왜 나한테......’
설마 이제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떠난 것일까...?
세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리사와 인사를 나누고 작별하는 그 순간까지 세린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이엔도 이미 졸업했고 제이도 이미 졸업했다.
제이공자야 졸업하자마자 지원군으로 자처하여 북쪽 제국민을 지키러 떠났다고 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떠난 사람에게 편지를 달라고 할 마음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안전하게 돌아와 다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엔은 지난 1년 동안 그의 소식을 몰랐다.
세린은 몇 년 전 붉어진 얼굴로 인사를 건네주던 이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물가물했으나 그의 금빛 눈동자만큼은 선명했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세린의 밤은 깊어만 갔다.
다음 날 아침이 지나고 그 다음 날 아침이 지나가며 세린은 성인식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갔다.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날이기도 해서 세린은 조금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세린은 긴장된 마음으로 멜의 안내를 받으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어떡해.... 벌써 10일도 안 남았잖아....!!’
너무 긴장이 되어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있는 느낌을 받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세린이었다.
멜은 그런 세린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며 말했다.
“전하. 성인식에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와 함께 황제폐하께서도.. 황태자전하께서도 2황자전하 3황자전하께서도 옆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 알고 있지만... 모두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세상에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본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남의 시선에 완벽해 보일 필요가 있을까요.”
멜은 다정히 웃으며 이어 말했다.
“황녀전하는 그저 황녀전하의 마음에 맞게 행동하시고 그저 즐기다가 오시면 됩니다. 제국의 단 한 분밖에 계시지 않은 황녀전하께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린은 다정한 멜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부드럽게 웃었다.
항상 멜이 해주는 말처럼 황궁에서는 세린을 위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랑만으로도 충분하고 배부르다는 것을 인지하자 무서움이 사라졌고 세린은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드레스 룸에 들어섰다.
그리고 굳었다.
“멜...”
“네, 전하.”
“저게 다 뭐야....?”
세상의 모든 하얀 드레스가 다 모여 있는 듯 보이는 드레스룸의 상태에 세린의 기가 죽었다.
모두 하나같이 매우 비싸보였다.
드레스의 종류고 디자인이고 세공된 보석과 악세사리도 그 아름다운 것들의 행진에 끝은 보이지 않았다.
멜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황녀전하의 원하는 것으로 골라보라는 황제폐하의 명령이셨습니다.”
“저... 저걸 다 입어봐야 해?”
멜은 다정히 웃었다.
“몇 개 먼저 골라보세요 전하.”
세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짐한 얼굴로 드레스를 관찰했다.
드레스를 고르는 시간만 3시간을 넘었고 악세사리를 고르는 시간만 1시간을 넘었다.
세린은 지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샐러드의 치즈큐브를 찍어 입에 넣었다.
로레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세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물었다.
“많이 힘들었니?”
“드레스가 다 예뻐서... 고르기 너무 힘들었어요...”
세린의 투정부리는 듯한 말투에 로레인의 눈이 곱게 휘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나보구나.”
“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드레스라서... 막 반짝이고 아래도 풍성하고... 등쪽에는!”
열심히 드레스에 대해서 설명하는 세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테오도 입가가 허물어져 있었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세린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올려 주었다.
황족들은 즐거워하는 세린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리고 성인식 당일 날 황족들의 피가 마르는 상황이 발생한다.
황족들은 세린의 드레스 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는 수많은 마차들이 들어오고 수많은 귀족들이 황성으로 바삐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개방한 황궁의 성문에 귀족들은 열광했다.
세린이 돌아온 후 귀족회의를 위해 입궁하는 일부의 귀족 말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궁을 막았던 황제 때문이었다.
그들이 꽁꽁 숨긴 황녀가 궁금했던 귀족들은 이번 성인식 파티에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음에 설레어 했다.
그런 그들을 알기에 황제는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미간을 풀며 세린의 드레스 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황제는 검은 색의 제복을 입고 분홍빛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넘겼다.
성인이 된 아이가 4명이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고 그의 다 큰 아들들도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했다.
테오는 눈썹을 간지럽히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옆으로 넘겼다.
황제를 닮은 날카로운 눈매가 귀족들의 마차를 정확히는 마차에서 내리는 남성 귀족들을 찢을 듯이 노려봤다.
로레인은 긴 분홍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며 푸른 제복을 입었는데 그 제복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화려한 외모에 담긴 근사한 미소가 환한 복도를 더욱 밝게 비추었다.
트레일도 다부진 체격에 꼭 맞는 검은 제복을 입었는데 굵은 선의 외모가 조각을 세공한 듯 섬세하게 빛났다.
끼이이익
“...!!”
그리 아름다운 황족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고개를 휙 소리가 날 만큼 돌린 황족들은 열어진 문 사이로 보이는 세린의 모습에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쇄골에서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부드러운 반투명한 레이스 실크와 그 밑으로 드레스의 원단이 상체에 딱 붙어 얇은 세린의 허리를 감쌌다.
허리 밑으로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 풍성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벨라인 드레스는 세린의 발목에서 조금 위까지 올라오는 기장이었다.
풍성한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위로 곱게 올려 묶어 세린의 길고 가늘어 보이는 목선이 눈에 띄었고 그 위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나뭇잎 모양의 핀을 달고 있었다.
머리핀에 달려있던 하얀 실크가 세린의 아름답게 묶여진 분홍빛 머리카락과 섞여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싱그러운 연두색 눈동자에는 화장을 연하게 했던지 다홍색의 붉은 입술과 깊어 보이는 눈매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곱게 휘어진 눈가의 미소와 붉은 홍조, 하얀 드레스의 세린을 말없이 바라본 황족들은 이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비를 강화시키고 기사를 세린의 뒤에 배치해야겠군.”
“좋은 의견이십니다.”
테오는 황제의 말에 바로 동의했다.
그 말을 듣지 못한 세린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와 밝게 웃으며 물었다.
“아빠 저 어때요?”
사랑스러운 딸의 물음에 황제는 마음속에서 수만 가지의 대답이 나왔다.
“너무 예뻐서 큰일이구나.”
그러나 입 밖으로는 부드러운 한 마디를 내뱉으며 세린의 등을 감싸 에스코트를 하려했다.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뒤를 보인 세린을 뿌듯한 눈으로 관찰하던 트레일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느학!!!”
“...?”
그런 트레일의 모습에 눈을 찌푸린 로레인이 자연스럽게 세린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고 바로 창백해지며 입을 떡 벌렸다.
세린의 앞에 있던 황제와 황태자는 영문을 몰라 뒤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시선을 주었다.
세린은 그저 즐겁게 웃으며 황제의 품에 가까이 기대었고 황제는 다정히 웃으며 세린의 등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에 누구보다 재빠른 속도로 세린의 등을 살핀 황제는 입 안을 깨물었다.
테오도 로레인의 시선에 세린의 등을 바라봤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세린의 등은 목 뒤에서부터 잘록한 허리라인까지 파여 있었다.
세린의 하얗고 고운 피부 위 등의 라인과 날개 뼈가 눈에 띄었다.
그 등에 가루도 뿌렸는지 반짝이기까지 했다.
황족들의 얼굴은 점점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