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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42화 (42/218)
  • 42화. 시간은 빠르고 느리게

    아카데미 검술 연무장.

    거기서 이엔은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제이를 발견했다.

    기다란 목검을 들고 가만히 대련하는 두 쌍의 인영을 관찰하던 제이는 제게로 다가오는 이엔을 발견했다.

    푸른색의 깊은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를 정면으로 곧게 바라보았다.

    이엔은 그런 제이의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깨어나셨습니다.”

    “...!”

    제이의 얼굴이 바로 환하게 변했다.

    잔뜩 밝아진 얼굴로 한숨같이 숨을 내뱉은 제이는 이엔을 향해 말했다.

    “소식 고맙다.”

    “아닙니다...”

    이엔은 그리 대답한 후 제이가 관찰하던 대련중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하얀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연무복 차림의 리사였다.

    긴 목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탁! 타탁!! 탁!

    목검이 차례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리사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게 더욱 빨라졌다.

    휙!

    상대방의 고개 아래로 들어가자마자 리사의 목검이 휘둘러지며 거대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목검이 부러졌다.

    빠각!!

    주변이 환호했고 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목검을 바르게 잡으며 “수고했어.

    “라고 한 후 뒤를 돌아 이동했다.

    이엔은 그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제이는 놀란 모습이 가득한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 아이가 저 정도의 실력이라 놀란 것이냐?”

    “.... 네.”

    “저건 저 아이의 재능인 것이지. 어릴적부터 검에 소질이 다분했던 아이였다.”

    “......”

    이엔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들은 탄성을 내뱉기 바빴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칙칙한 연무장도 밝아진 것 같았고 대련보다도 소년들을 보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그리고 그것은 이엔에게 추근거린 자작영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이 욕심으로 번뜩였다.

    이엔은 리사의 대련장면을 떠올리며 자신도 공녀와 대련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의 실력에서 그녀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일 것 같았다.

    공자도 저만큼의 실력자라면 공자와 대련해 보고 싶어서 이엔은 제이를 급히 바라보았다.

    “공자님.”

    “.....?”

    “공자님과 대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 허?”

    제이는 엉뚱한 말을 내뱉는 이엔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진심으로 기사가 되고 싶어서 이 곳에 온 것을 알았지만 적극적인 저 모습을 보니 신기한 마음이 생겼다.

    “내 실력이 공녀보다 떨어지는 것이라면 어쩌려고?”

    “.... 강하실 것 같습니다.”

    “흐음...”

    제이의 얼굴에 웃음이 매달렸다.

    비웃음이 아닌 흥미 있는 미소였다.

    “좋다. 나오도록.”

    제이의 수긍에 이엔은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검이 부러지며 장렬하게 패배했다.

    검을 든 시간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여서 이엔은 수긍하고 만족했다.

    제이는 리사 만큼의 속도를 가졌고 리사 만큼 검을 잘 다루었다.

    그런데도 이엔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뭔가... 검에 재능이 있으신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뭔가 달라.’

    리사처럼 검에 재능이 넘치는 제이였지만 사용하고 있는 검술은 그의 것이 아닌 듯 느껴진 탓이었다.

    그 이질감은 뭘까?

    이엔은 한 번 더 제이와 대련해보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이엔 앞에서 리사가 나타났다.

    “야.”

    “... 안녕하십니까.”

    “너 뭐해?”

    “아...”

    리사의 시선이 이엔의 깨끗하게 부러진 목검을 관찰하다 질린 얼굴로 눈매를 찡그리며 물었다.

    “그거 오라버니작품이지?”

    “... 네.”

    어떻게 알았지?

    리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랑 대련해봤자 소용없어. 오라버니 검술은 우리랑 달라.”

    “.....?”

    “설명은 못하겠는데 아무튼 달라! 기사들 같은 우리 검무를 흉내만 내는 것뿐이고 원래 검술은 이런 게 아니거든 그 녀석.”

    은근슬쩍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날려버린 리사는 그 말을 해준 후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걸음을 이동하려 몸을 돌렸다.

    “저기!”

    “뭐?”

    왜 부르냐며 눈썹을 올리는 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엔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도 공녀의 검술을 알려주세요.”

    “.... 뭐어??”

    “부탁드립니다!”

    이엔이 고개를 숙이며 리사를 향해 부탁했다.

    리사는 동그란 눈으로 그런 이엔을 살펴보며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내 수긍했다.

    “난 가르쳐주는 건 할 줄 몰라. 그렇지만 대련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리사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이려는 이엔을 향해 “아, 창피하니까 그거 하지마!!” 라고 소리친 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엔은 스스로의 기반을 위해 노력했다.

    아직 몇 년의 시간이 있다.

    수석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동안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든 몰리는 시선 속에서 제이는 빛나야 했다.

    높은 대귀족의 자제인 자신이 아카데미에서 뒤처지면 그의 자존심도 그의 목표였던 단단한 기반도 무너진다.

    제이는 수업에서도 연무장에서도 심지어 걸어가는 그 길에서도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그 몰린 시선 속에서 제이는 당당하게 걸었고 무엇이든 출중한 능력을 보였다.

    시작은 수월하였으나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검술도 교육도 최고가 아니면 소용없었다.

    제이는 입 안을 깨물며 한 쪽 눈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주변 영애들의 탄성이 있었으나 제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이는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황녀의 옆에 당당하게 서있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했다.

    폭신해 보이는 풍성한 분홍빛 머리카락과 싱그러운 새싹 같은 그 눈동자가 벌써부터 그리웠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이 세린을 그리워하듯 세린도 아카데미로 가버린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로레인과 매일 아침, 그리고 점심, 저녁까지 반복하는 마력의 운용과 트레일과 함께 하는 체력훈련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마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세린은 이를 악물었다.

    침대에 뻗어 누운 세린은 노곤한 눈동자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들 뭐하고 있을까...’

    그런 세린의 마음을 알았던지 방금 방으로 들어선 황제는 세린을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었다.

    “아빠...”

    황제는 조금은 기운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이 걱정이 되는 것이냐.”

    “... 네.”

    세린은 황제의 품에 기대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런 세린을 다정히 보듬어주며 말했다.

    “그 아이들도 각자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란다. 어쩌면 너랑 똑같이 네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다들 힘들 것 같아요...”

    세린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황제는 그런 세린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정히 말했다.

    “다들 힘들겠지. 하지만 말이다... 노력해서 이룬 대가만큼 기쁜 것은 없단다.”

    황제는 부드럽게 세린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들이 아카데미에서 노력하여 원하던 바를 이룬다고 생각해 보거라. 그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 것 같으냐?”

    세린은 생각했다.

    원하던 바를 이루기 위해서 힘들게 노력했고 그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어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면 그동안 겪었던 힘든 일들은 추억이 될 것이고 의미 있는 밑거름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엄청 기쁠 것 같아요...”

    “그래. 그 아이들은 그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란다. 세린 네가 지금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빠아...”

    세린은 응석을 부리며 황제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황제는 그런 딸의 모습에 귀엽다는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안아주었고 이내 세린에게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슬프게 빛났다.

    황제는 잃어버린 아리엘의 흔적에 너무 지독하게도 슬퍼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미래와 삶을 위해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갔다.

    누군가에게 경멸받고 천대받는 아이도 용기를 내어 이를 악물고 노력했으며 누군가에게 환대받고 시선이 몰리는 부담스러운 자리의 아이도 앞만 바라보며 노력했다.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도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사랑을 잃은 한 남자도 잃어버린 그녀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사랑하는 막내를 위해, 막내의 안전을 위해서 형제들도 보다 단단한 방패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고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세린은 17살이 되었다.

    그러나 세린은 아직도 리사도 제이도 이엔도 만나지 못했다.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한 소녀가 말을 타고 달리며 긴 장총을 나무에 달린 과녁을 향해 조준했다.

    기다란 팔과 다리는 굴곡이 아름답게 잡혀 있었고 검은 색의 훈련용 제복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탕!!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작은 빛 덩이가 쏘아지고 과녁의 정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장총을 내리고 고개를 든 소녀의 얼굴은 이제 소녀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성숙해진 세린이었다.

    긴 속눈썹 아래의 연두색 눈동자는 크고 아름다웠고 갸름한 얼굴 위로 보이는 오똑한 코와 곱게 휘어지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지나가는 기사들과 시종들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세린의 모습에 황족들은 한숨이 늘어갔다.

    누굴 닮아서 저리 예쁜지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세린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마장으로 향했다.

    총을 사용해서도 마력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세린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트레일을 발견했다.

    세린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몰아 트레일의 앞에서 뛰어 내렸고 그런 그녀를 가볍게 받아 안은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올해 20살이 된 트레일은 이목구비가 보다 선명해졌으며 선이 굵어지고 앳된 티가 사라졌다.

    심지어 넓어진 어깨만큼 키도 너무 커져서 부러움이 가득한 세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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