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제이의 다짐
이엔은 화사하게 빛나는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거두어주신 노예였습니다.”
“노예...? 그럼 아카데미에는 왜 온 것이냐.”
“배움을 얻고 기사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기사...?”
제이는 눈가를 찡그리며 되물었으나 경멸의 기색은 없었다.
그게 이엔을 놀라게 만들었다.
대귀족이라더니 노예라는 말에도 경멸하지 않는 걸까?
제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말했다.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넌... 황녀전하와 무슨 관계지?”
“........”
황녀와 자신은 무슨 관계일까.
그저 그녀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자신이었고 황녀는 보호를 받을 사람이었다.
그게 이 관계의 끝이 아니었나.
이엔이 입술을 달싹이려하자 제이는 손을 들어 말을 제지했다.
“억지로 듣고 싶지는 않군. 다른 이야기는 넘어가고 지금 황녀전하의 상태는... 괜찮나?”
“.... 아직 의식이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후....”
제이의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아픈 와중에 아카데미 입학이라니.
정말 나쁜 운들이 모두 자신의 앞에 쏟아 부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다 이내 같이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이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도 원하지 않았을 테지. 이 시기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
“......”
둘 다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의식이 없는 세린으로 인해 아카데미를 가고 싶지 않았던 둘의 마음은 같았다.
부정하지 않은 이엔의 모습에 제이의 얼굴은 굳어졌다.
알고 있는 사실에 확신을 얻으니 속이 쓰렸다.
“만약 황궁에서 황녀님의 소식이 들리거든 내게도 말해주기를 원해.”
“..... 알겠습니다.”
“고맙군.”
제이는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그러다 이내 자리에서 멈춘 후 무심하게 말했다.
“다른 귀족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 이곳에서 생활하기 좋을 거다.”
“...?”
“모두 멍청해서 내뱉는다고 다 사람 말인 줄 알거든.”
그 말을 끝으로 제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대기하던 시종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새하얀 장갑을 건네자 무심히 장갑을 받아 손에 끼운 제이는 이엔에게서 멀어졌다.
이엔과 세린의 관계는 나중이라도 알아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다.
지금은 그저 황녀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엔은 멀어지는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역시 같은 마음이었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저리도 확실한 모습을 보이니 이엔의 가슴이 철렁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모습은 보였어도 신분과 출신으로 인해 경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제이가 신기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이엔은 이내 입학식을 위해 아카데미 강당으로 이동했다.
이엔과 제이의 아카데미 생활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이는 황녀가 의식불명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과 동시에 아카데미 입학서를 받았다.
대공에게서 건네받은 입학통지서를 들고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대공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 자유고 네 선택이지. 하지만 네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황녀전하께서 의식을 찾는 것도 아니며... 섣부른 판단으로 네가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제이의 앞으로의 미래에서 기반이 될 인맥의 자제들을 만날 수 있으며 우수한 성적을 얻으면 그만큼 제 자신의 능력을 많은 귀족들에게 알려주어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 된다.
누가 보아도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것이 그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입학과 동시에 아카데미 밖으로 졸업 전까지 나올 수 없음이었다.
황녀가 쓰러진 이 시점에서 아카데미에 입학하라고?
언제 졸업할지 모르나 수석졸업을 한다고 가정해도 3년은 걸릴 것이다.
그 시간동안 황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제이의 깊은 고민을 아는 대공은 네 자유라고 한 번 더 이야기를 한 후 자리를 떴다.
제이는 깊은 고민을 하다가 이내 결심했다. 실력을 인정받고 수석졸업을 하여 돌아올 것을 말이다.
자신의 기반이 견고해질수록 황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그녀의 옆에 서기 위해서는 다른 황족들만큼의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며 보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 실력을 가져야 함을 인지하고 있다.
황녀가 의식이 없는 것은 맞으나 대공의 말로는 상처가 없고 치료가 잘 되었으니 의식은 분명히 늦더라도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공을 알기에 제이는 그 말을 믿었다.
황녀가 깨어나거든 제 빈자리를 느꼈으면 하는 못된 마음을 가지며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마음이지만 그에게는 진심이었다.
작은 소녀의 보석 같은 눈동자도 비단 같은 머리카락도 그 다정한 말과 수줍은 그 홍조까지도 제이는 매일 그리워하며 보고 싶었다.
그런 소녀의 옆에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할 것이다.
제이는 굳은 발걸음으로 입학서를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세린 예쁜 우리 딸.’
‘엄마.’
‘엄마가 너무 사랑해.’
‘엄마.’
푸른 머리카락과 새싹 같은 풀잎의 눈동자.
그 고운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세린의 가슴을 울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이 그리운 그 목소리에 세린은 급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잡히지 않은 아리엘은 연기마냥 세린의 앞에서 흩어졌다.
‘엄마!!’
‘세린.’
애타게 아리엘을 부르자마자 세린의 옆에서 아리엘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잔뜩 굳어있는 목소리로 세린의 어깨를 붙잡은 아리엘은 다급히 외쳤다.
‘엄마를 버려!’
‘엄마?’
‘엄마를 버려!’
‘엄...’
그녀의 말을 끝으로 세린은 눈을 번쩍 떴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뜬 세린은 이마에 가득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쓸었다.
생생하게 남은 꿈 속의 기억에 세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 몸을 두드리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으윽...!!”
욱씬거리는 팔과 다리에 세린이 고개를 숙이며 버티자마자 문을 열고 테오가 들어왔다.
“세린!!”
세린의 의식이 돌아온 듯 보이자 달려온 테오는 고통에 일그러진 세린의 표정을 보고 창백해졌다.
로레인의 말처럼 갑작스러운 성장에 의한 고통일 것이다.
테오는 항상 지니고 있던 포션을 들어 세린에게 먹였다.
세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으나 이내 천천히 잠잠해졌다.
고통이 줄어들자 세린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테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빠...”
“......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테오는 얼굴 가득히 안도감을 내비치며 세린을 품에 꼭 껴안았다.
세린은 다정히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모두에게 힘들었던 열흘이었다.
세린은 그간의 정황을 멜을 통해 들었다.
아빠와 오빠들의 걱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미안해졌다.
원치 않았던 마법의 사용에 당황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스스로도 마력을 조절할 필요성을 격하게 느꼈다.
이어 다짐하는 세린을 바라보며 멜은 말했다.
“스페라도 공자님과 이엔군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셨습니다.”
“아카데미?”
“네, 다양한 수업을 듣고 배워가며 인정을 받아가는 교육기관입니다만... 방학기간이 없어 졸업을 할 때까지 만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몇 년 동안 이엔도 제이공자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에 세린의 마음이 우중충해졌다.
멜은 다정히 세린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두 분 다 미래를 위해서 가는 것 입니다. 황녀전하께서도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하실 것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이 되옵니다.”
“... 멜 말이 맞아.”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린은 자신의 마력으로 인해 날아가 듯 구른 멜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으로 인해 소중한 이들이 다치는 것은 너무도 싫었다.
이엔과 제이공자 뿐이 아니라 자신도 몇 년이 걸리던 시간을 희생해서 마력을 제어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세린은 그리 생각을 다짐하며 자신의 커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힘내자...!’
“아, 전하... 또 한분이 아카데미로....”
“음...?”
누가 아카데미로 갔다고?
같은 시각.
황제는 세린이 깨어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뻐할 틈이 없었다.
로레인과 함께 찾아온 황후 아리엘의 묘지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야에서 차단하기 위해 봉인 마법과 결계를 쳐준 로레인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의 묘지에서 강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져 황제를 찾아온 로레인은 그와 함께 마력이 움직인 장소로 워프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황후 아리엘의 묘는 땅이 다 뭉그러져 구멍이 있었고 그 속에 있어야 했을 아리엘의 유골이 없었다.
누군가가 죽은 황후의 유골을 가져갔다.
황제의 안색은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세린에게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보이는 사랑스러운 딸의 미소가 따스하게 위로하며 그를 감싸 안아주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을 품에 안았다.
작은 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은 황제는 딸과 똑같은 눈동자를 가졌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급히 세린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 먼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빠?”
“......”
그 작은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 죽어서까지도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몰랐다.
남편이 너무도 못나서 그녀를 지킬 수 없었음에 하늘도 화가 났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하면 본인을 죽일 것이지 왜 죽은 그녀를 이리도 괴롭히는 것인가.
죽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불쌍했다.
그 결과를 자신이 만든 것 같아 더욱 그 괴로움은 배가 되었다.
황제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를 되찾아보려 하였으나 흔적이 미미해서 찾을 수 없었다.
귀신이 나타난 것처럼 땅만 파여 있었고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호마법을 해지한 자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는 로레인의 말에 황제는 절망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그녀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세린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늘어났다.
그 사실이 황제의 가슴을 난도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