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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36화 (36/218)

36화. 오랜만의 재회

세린은 우물쭈물 이어 말했다.

“아빠랑 오빠들은 다 내가 예쁘다고... 막 사랑스럽다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예뻐 보인 것이 아닐까요?”

“.....”

“아니면 제가 그런 곳에서 와서 그런 걸까요...?”

그런 곳이란 아마 세린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있었던 장소. 즉 창녀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 한 줄의 문장에 의원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세린의 손을 주름졌지만 단단한 손바닥으로 감싸 잡았다.

“...?”

“황녀전하.”

“.... 네에....”

의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황녀전하는 무척 아름다우시고 무척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

세린은 가만히 주름이 곱게 만들어진 의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종들과 기사단들과 공자님 그리고 이엔도 마찬가지로 황녀전하가 참으로 곱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제가 지난 70년의 생을 걸고 장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두들 저를 피하나요...?”

의원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어 세린에게 말했다.

“피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요. 이 제국에서 제일 높은 여자라고 한다면 바로 황녀님이시니까요.”

“네에???”

“다른 높은 가문의 귀족들보다도 황후마마께서 없으신 지금은 황녀님이 '제국에서 제일 높은 여자'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시종들과 기사들은 황녀님이 자신의 앞에서 다치실까, 아프실까 걱정을 할 것입니다. 혹시 자신으로 인해 황녀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중죄로 지하 감옥에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네에에에???”

세린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의원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황녀전하가 싫다거나 어떠한 차별적 요인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분이 무서워서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날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세린의 연두 빛 눈동자가 눈물로 인해 반짝였다.

오밀조밀 모든 것이 귀여운 황녀의 모습이 의원의 마음을 따스하게 했으나 무엇보다 그를 따스하게 한 것은 세린의 마음이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서 버텼던 작은 아이가 남을 사랑하고 생각하려는 그 마음이 추운 겨울 날,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세린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의원은 말했다.

“황녀전하께서 다치지 않고 건강하셔야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네!”

“그리고 먼저 다가가시는 것이 두 번째지요.”

“... 다가가요?”

“네. 매일 밝게 웃어주시고 반갑게 인사해주시면 끝입니다.”

세린의 얼굴에 당황이 섞였다.

“그게 끝인가요?”

“네.”

의원이 웃으며 말하자 세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더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어려운 일이지요. 누군가 날 무서워하는데 먼저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까?”

“어.... 엄청 많이요...”

양 팔을 쭉 뻗어 의원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세린의 모습에 의원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답입니다. 황녀전하께서 먼저 다가가신다면 그 후에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바뀔 것입니다.”

세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린은 밝아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의원님은 정말 멋져요. 대단해요!”

“부끄럽지만 듣기 좋은 칭찬이네요. 그리고 편하게 벤이라고 불러주시기를...”

“네! 벤!”

세린은 의원의 이름을 발음해보며 작게 웃었고 벤을 도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동시에 로레인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빛들과 함께 나타난 로레인 덕분에 정리되어가는 문서가 또 다시 섞여 흩어졌다.

벤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지만 로레인은 더욱 창백한 낯으로 세린을 향해 다가갔다.

어마어마한 장미들과 함께 말이다.

세린은 커다란 눈동자로 로레인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레인 오빠...?”

“세린. 오빠가 그... 어떻게 너를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가져왔어.”

몇 백송이가 그의 손 위로 푸른 마력과 함께 허공에 떠 있었다.

거대한 양의 장미들 사이로 보이는 로레인의 모습은 그림책 속에서나 보았던 왕자들보다 아름답게 빛났다.

로레인은 화려한 이목구비로 멋지게 웃으며 말했다.

“받으렴. 너의 것이야.”

세린은 멍하니 로레인이 건네준 장미다발의 마력구를 받아들였다.

장미가 가득한 동그란 구 밑에는 가느다란 실이 손잡이처럼 내려와 보다 잡기 쉬웠다.

아름다운 장미와 더 아름다운 로레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세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이가 많더라도 어쩌면 괜찮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만 자신의 곁에서 늘 사랑한다고 해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세린은 그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이란 가까운 곳에 존재했다.

의원의 행복이었던 도시락과 완성된 서류는 망가졌지만 의원은 그저 행복해하는 세린을 보며 울며 웃었다.

‘내 밥... 내 서류....’

벤은 그 사건을 겪은 후 바로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벤의 맞은편에 자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오늘 황녀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저를 찾아오신 것을 아십니까?”

황제는 좁아진 미간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로레인에게서 들었다. 무슨 일이었던 것이냐.”

벤은 그런 황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황궁의 시종과 시녀들이 황녀전하의 주변을 피하시는 상황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계셨고 이엔이 황녀전하을 피하며 돌아다니는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스페라도 대공저의 공자께 약속을 나누었던 편지가 오지 않는 것 때문이라고도 하더군요.”

움찔!

“.....”

황제의 손가락이 작게 떨렸다.

벤은 그 손짓을 본 후 눈치를 챘다.

'역시 네 짓이었냐...'라는 기색이었으나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황녀전하께서는 지금 친구가 필요하신 시기 같습니다. 이 상태로 다른 이들이 주변에 다가오지 않는 다면 마음의 상처가 커지셔서 많이 힘들어지실 것 같습니다.”

“......”

황제는 침묵했다.

세린이 그 정도로 슬퍼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제이 스페라도는 남자였고 누가 보아도 세린에게 관심을 가지는 티가 났던 터라서 황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었다.

귀하디귀한 딸을 빼앗길까봐 무서워하는 딸 바보의 모습에 벤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의 마음은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황녀전하의 마음도 중요하다고 사료됩니다. 많이 우셨고 많이 속상하다고 표현을 하셔서 걱정이 됩니다.”

“...... 그랬었군.”

팔짱을 낀 자세로 미간은 좁힌 황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속은 뭉그러졌다.

그런 황제를 알기에 벤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며 황녀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건네었고 황제는 결국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황제와 황태자, 황자들은 눈물을 애써 삼키며 리사와 제이의 출입을 허가했다.

세린이 슬퍼하며 우는 것 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결과에는 세린의 행복을 위해서 함께 애써준 벤의 노력이 제일 컸을 것이다.

제이는 리사와 함께 애써 힘을 쓰며 들어갈 필요가 없이 수월하게 세린의 궁으로 들어섰다.

‘뭐...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생각보다 빨리 해결이 되자 제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해맑은 모습으로 신이 난 리사는 어서 세린을 볼 생각에 마차 밖을 바라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제이도 따라 웃어버렸다.

저렇게도 황녀전하가 좋을까 싶다가도 자신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이내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돌린 제이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금을 뿌려놓은 것 같은 눈동자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자신과 나이까지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황궁에 저런 아이가 있었나?’

그런 의문은 품었으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보폭보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로 인해 그 아이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

제이는 그런 아이를 향해 묘한 감정을 느끼며 이내 시선을 돌렸다.

“황녀전하!!!”

리사의 커다란 목소리에 한 쪽 눈가를 찡그린 제이는 그 묘한 감정을 잊고 멀리서 보이는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귀엽고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담고 있는 그 모습에 제이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마차에서 부드럽게 내린 제이와 허겁지겁 내린 리사는 세린을 향해 예법에 맞춰 인사를 올렸고 세린도 밝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와요!”

“황녀전하...”

찡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리사는 오랜만에 만난 세린을 격하게 안아주고 싶은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제이도 오랜만에 보는 세린의 모습에 작게 볼을 붉히며 웃었다.

세린은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라는 벤의 말을 들었으니 노력해야 할 때였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세린은 고개를 들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공자... 리사공녀!”

“....? 네 황녀전하.”

“그....”

세린의 머뭇거리는 반응에 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러시지?

어디 불편하신가?

걱정이 담긴 시선에 세린이 망설이다가 이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제이를 향해 말했다.

“다시 놀러 와줘서.. 기뻐요!”

부끄러움이 가득한 두 볼을 하고 맑게 웃으며 말하는 세린의 모습은 참 귀여웠다.

제이는 마음이 다 녹아내릴 것 같은 따뜻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옆에 있던 리사의 얼굴도 붉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황녀전하!!”

“네에??”

들소 같은 움직임으로 세린의 앞에 다가선 리사는 결심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사랑합니다!!!!”

“네에에에에?????”

대뜸 받아버린 고백에 세린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리사는 두 볼을 잔뜩 붉어지도록 내버려 두며 그저 세린의 귀여운 모습을 눈으로 담을 뿐이었다.

제이는 무언가 선수를 빼앗겼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이내 고개를 작게 저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동생의 저돌적인 말투는 따라갈 길이 없다.

세린은 그런 리사의 모습을 바라보다 청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세린에게도 제이에게도 그리고 리사에게도 유쾌하고 따스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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