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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27화 (27/218)
  • 27화. 조금은 슬픈 밤

    상자 속에는 세린이 정말 좋아하는 레몬시럽으로 만든 케이크가 들어있었다.

    “...? 케이크구나? 나 주는 거야?”

    “.... 이엔에게 주려고 하는 건 제가 5번째로 좋아하는 초콜릿 쿠키에요...”

    “으응..... 그렇구나.”

    이를 악 물으며 트레일은 세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세린은 천천히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빠한테 준 케이크는 제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레몬 케이크에요!”

    “.....”

    “그러니까... 오빠한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걸 줬으니까... 이엔에게 주는 쿠키는 질투하지 마세요.”

    “.....”

    세린의 얼굴은 이미 화로처럼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빠가 더 소중하니까 제일 좋아하는 걸 선물해준 거예요.. 알았죠?”

    “......”

    트레일은 멍하니 세린을 바라보았다.

    세린의 그 마음이 예뻐서 더욱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던 트레일은 이내 세린을 꽉 껴안았다.

    “!!”

    “으으으... 정말 넌....”

    이 사랑스러움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세린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이 모습들을 가족끼리만... 아니 어쩌면 자신만 알고 싶었다.

    동생이란 이렇게 귀여운 존재인지 미처 몰랐던 과거가 민망해졌다.

    트레일은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하며 세린을 품에 안았고 세린은 방긋 웃으며 조용히 '나도요.'라고 했다.

    따뜻한 일상의 하루였고 세린과 트레일에게는 소중한 기억들이 만들어졌다.

    그 날 저녁.

    로레인은 달이 뜬 늦은 저녁시간에 연구실에서 이엔과 함께 앉아있었다.

    저주에 관한 것이 적힌 책 한권을 보여주며 이엔이 걸 수 있는 저주는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생명을 재로 만드는 저주를 걸 수 있습니다...”

    “재?”

    “제 손에 닿은 것들은 모두 천천히 재로 변해서 사라져요.”

    “......”

    로레인은 피곤이 물든 눈빛으로 이엔을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저주라는 것들은 왜 다 하나 같이 잔혹하고 끔찍한지 모르겠다.

    미간을 문지르며 로레인이 말했다.

    “네가 가진 힘은... 스스로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한 거지?”

    “.... 저주를 걸고 싶을 때 걸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사용하는 것도 어둠을 사용하는 것도 제어하지 못한 경우는 처음 발현했을 때뿐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르지. 네가 자랄수록 그 녀석도 자라는 거니까.”

    “.....”

    “너는 그 능력을 제어하는 법부터 터득해야겠구나.”

    이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지옥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트레일의 기사단 훈련도 힘들지만 눈앞의 이 아름다운 남자는 너무나도 잔혹해보여서 저절로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로레인은 눈을 스르륵 올려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말이야...”

    달빛을 받은 그의 분홍빛 머리가 너무나도 고혹적이었고 제비꽃 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달빛을 받아 더 아름답고 더욱 섬세해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 밖에 나온 말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세린에게 다른 마음이든 어떤 마음이든 품으면 내가 네 손목을 재로 만들어 줄 거야.”

    “.......”

    사랑스러운 황녀님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흑심을 품고 다가갈 만큼 간도 크지 않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다.

    심지어 당신들 같은 오빠들이 3명이나 있다면 무서워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엔은 굳은 눈동자로 로레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로 황녀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다정하고 착한 분이구나.’

    정도가 감상평이었다.

    몰론 외모는 말할 필요가 없이 아름다웠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마음도 매일 황녀전하와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 감정 정도로 끝날지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엔은 그 말을 애써 숨기며 알겠다고만 했고 로레인의 수업은 시작되었다.

    이엔은 트레일에 이어 또 다른 지옥을 발견했다.

    공부라는 핑계로 자신을 과로로 죽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지독히 끔찍한 수업이었다.

    처음 접하는 단어들에 고통스러워하는 이엔을 바라본 로레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가 죄가 없음을 안다.

    어둠술사라고 다 똑같은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어둠술사의 저주에 걸린 동생을 지켜보는 것도 자신의 앞에서 몸이 썩어가며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보는 것도 그에게는 아직도 기억하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 악취와 그 신음소리와 어머니의 눈물은 평생을 가도 가슴에 남을 흉터였다.

    저 아이를 통해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또 다시 어둠술사로 인해 세린이 다치거나 조금이라도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면 로레인은 그 숨 막히는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로레인은 조금 안쓰러운 눈동자로 이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괴롭고 힘들게 자란 걸 알고 있어.”

    “....?”

    “하지만. 세린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정말 많은 것을 너무 이른 나이에 겪은 아이야.”

    “.....”

    이엔은 그저 집중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지금은 밝아져서 잘 웃지만... 너만큼 힘든 시간 속에서 버틴 아이였어. 겨우겨우 지금에서야 밝아진 거야.”

    “.......”

    “그 괴로운 시간의 원인이 어둠술사였거든.”

    “..!!!”

    이엔은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자신과 같은 어둠술사로 인해 황녀가 괴로운 날을 보냈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보이는 트레일과 테오의 경계어린 시선과 경멸은 설명이 되었다.

    로레인도 저주를 푸는 방법을 연구한다는 것 또한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그 아름다운 황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어둠술사라는 것을 안다고 들었는데 사실은 잘 모르는 것이 아니었을까?

    감옥에 갔던 내가 걱정도 되었다고도 했다.

    이엔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로레인은 그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린은... 그런 애야. 어쩌면 우리 황족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울지도 몰라. 차별이 없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사랑이 가득한 눈동자 속에 숨겨져 있는 그 괴로운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세린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밤마다 꾸던 악몽도 이제는 횟수가 많이 줄었고

    잘 먹은 덕분에 살도 올라 부쩍 생기기 넘쳤다.

    그런 세린을 위해서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그녀의 앞에 있을 걸림돌, 진흙, 더러운 오물까지도 모조리 치워 꽃밭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밟는 모든 길에 꽃이 피어 향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게 세린이 잃어버린 시간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어둠술사인 너를 받아들인 것도 우리에겐 큰 결심이었어. 네가 정말 이 황궁에서 살고 싶다면... 부디 더 노력해서 네가 세린의 뒤를 지켜도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줘.”

    왜 황자들이 황녀를 그리도 감싸는지 이엔은 이해했다.

    제 자신이 세린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거나 세린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리도 화를 내는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황녀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저주와 관련된 일을 겪었다면 말하지 않아도 끔찍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마을들을 전멸시킨 이 저주가 나 자신도 끔찍한데 그걸 알아버린 다른 이들은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 네.”

    이엔은 마음을 다시 잡고 대답했고 밤은 깊어갔다.

    로레인에게도 이엔에게도 조금은 슬픈 밤이었을 것이다.

    세린은 평소처럼 황제와 오빠들과 함께 저녁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으로 그릇에 올려준 음식들을 다 먹은 세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잘 먹었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황제는 '잘 먹어주어서 고맙구나.'라고 대답하며 세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세린은 가족들과 언제나 행복했다.

    그러다 세린의 얼굴로 이엔이 스쳐지나갔다.

    세린은 오빠들에게도 인사를 한 후 서둘러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세린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멜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멜! 쿠키는?”

    잔뜩 상기된 볼로 두 팔을 뻗는 세린이 사랑스러워서 멜은 다정히 웃으며 쿠키가 들어 있는 상자를 세린에게 건넸다.

    “쿠키가 부서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드셔야 합니다. 아니면 제가 들고 이동할까요?”

    “아니야, 내가 들고 가고 싶어!”

    “네, 전하. 조심하십시오.”

    멜은 다정히 웃으며 세린의 작은 손에 상자를 올려주었다.

    세린은 즐거운 모습으로 초콜릿이 가득 들은 쿠키상자를 들고 총총 연무장을 향해 걸어갔다.

    붉은 볼을 하고 달리는 세린의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고 세린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이엔!”

    “....!”

    세린의 밝은 외침에 이엔의 눈이 커지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은 세린이 하늘색이 도는 미니 드레스를 입고 달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이엔의 앞에 선 세린은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이엔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쿠키야!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이엔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혹시 좋아하는 과일이나 간식이 있어?? 얼마든지 가져다 줄 수 있어!”

    “.... 없습니다. 이것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구나...”

    세린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엔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만 같아서 대화를 이끌기 어렵기만 했다.

    이엔은 자신을 챙기려 노력하는 세린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기한테 왜 이리 무언가를 해주려 하는 것일까?

    세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다급히 말했다.

    “이엔! 내일도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자!”

    “예...?”

    “알았지?? 내일 만나!!”

    그 말을 끝으로 세린은 허겁지겁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엔은 멍하니 세린이 건네준 쿠키상자를 잡으며 그 귀여운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거리감 없이 다가오는 세린의 모습은 이엔에게는 부담이자 걱정 그리고 작은 설렘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보이는 그 맑은 미소가 이엔의 가슴을 짧게 두드렸다.

    세린은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이엔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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