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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8화 (18/218)
  • 18화 스페라도 대공작의 자녀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린이 멜을 향해 물었다.

    “손님이 오신거야?”

    멜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스페라도 대공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대공....?”

    대공... 로레인 오빠한테 배웠었는데...

    공작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을 대공이라고 했던가?

    우리 제국에서는 대공이라 불리는 사람이 한 명 뿐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구나.

    세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그러면 저기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데...”

    “각하의 자녀분들 같습니다. 대공각하께는 13살 공자님과 10살 공녀님께서 있으시지요.”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12살이니까... 나이가 비슷하다!

    세린은 호기심 있는 눈으로 아이들의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궁금해...’

    눈치가 빠른 멜은 세린을 향해 물었다.

    “가서 인사를 나누어 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인사..? 내가 해도 괜찮은 거야?”

    “대신 황녀님께서 먼저 인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신분이 더 낮은 사람일수록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예법이지요.”

    “그렇구나...”

    어렵다는 생각을 반, 얼른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세린은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코너를 돌자 더 크게 들리는 귀여운 음성에 마음이 떨렸다.

    ‘인사를 받으려면 뭘 해야 하나?’

    ‘내가 황녀인 것을 모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조금 무서워진 세린이었다.

    이윽고 코너를 돌고 마주친 아이들의 모습에 세린은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의 자녀라고 했던 아이들은 하얀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남자였고 키는 아빠의 가슴위치까지 올라갈 것 같을 정도로 컸다.

    소년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투명한 바다 같았고 하얀 은발은 빛을 받아 반짝여 보석처럼 빛이 났다.

    짧은 은발은 단정하였고 머리카락 밑의 이목구비는 로레인 오빠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여동생 쪽은 굵게 굴곡이 있는 긴 은발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고 아름다운 체리색의 리본으로 장식한 날카롭지만 고양이같이 귀여운 인상의 아이였다.

    마치 요정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세린은 말을 걸지도 못하고 멍하니 가만히 관찰하기 바빴다.

    잠깐의 정적이 끝나고 먼저 입을 열은 것은 소년 쪽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녀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이 스페라도 입니다.”

    약간 낮은 미성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을 무렵 여동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사 스페라도 입니다.”

    치마를 우아하게 살짝 잡아 올리며 인사하는 공녀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란 세린이었다.

    세린은 아직 예법교육을 완벽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살짝 웃으며 “세린 레이빈 레바스찬 이.. 입니다?”

    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공자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대를 부탁드립니다. 소문으로 들었던 모습보다 훨씬...”

    휙!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녀 리사가 세린을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세린은 갑자기 가까워진 리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고 리사는 푸른 눈에 불이 붙었다는 착각이 들만큼 세린을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그런 동생의 모습에 눈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고 그의 손보다 리사의 입이 더 빨랐다.

    “황녀님 혹시 요정이세요? 아니면 천사?”

    세린은 쩌적 굳어버렸다.

    “아닌데... 날개가 없는데 왜 이렇게 예쁘시지..?”

    “저.. 저기....”

    창피함에 얼굴이 뜨거워졌고 귀까지 붉어졌다.

    세린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고 리사는 세린이 멀어진 만큼 다시 붙어가며 열심히 세린을 뜯어 관찰했다.

    “세상에... 황성에서 피는 꽃도 예쁘던데 사람들도 예쁘네...?”

    “리사... 그만해.”

    리사의 손목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 제이는 세린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윗분들을 대하는 예법이 부족하여...”

    “괘.. 괜찮아... 나도 아직은 서툴러서...”

    제이의 난처한 얼굴에 당황하여 손을 휙휙 저으며 격려하는 세린의 모습에 리사는 말했다.

    “마음도 아름다우... 읍!!”

    동생의 입을 막은 제이는 깊은 눈매를 고이 접으며 다시 사과했고 세린은 도망치듯 “아... 안녕!”하고 외치며 돌아갔다.

    뒤에서 황녀님! 하며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태양궁 침실로 향했다.

    정원에 갈 힘도 없어졌다.

    덕분에 트레일 생각도 잊어버렸으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제이는 리사를 아니꼬운 눈으로 흘겼다.

    “너 때문에 황녀님이 놀라셨잖아.”

    “하지만 너무 반짝반짝 예쁘고 귀여우신 걸 어떡해...?”

    “후... 넌 예쁜 것만 보면 달려가는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어.”

    리사의 대답에 한숨을 쉰 제이는 세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짝이는 풍성한 분홍빛 머리카락과 싱그러운 새싹 같은 연두색 눈동자.

    커다란 눈망울 밑의 코와 입술은 작고 앙증맞았다.

    리사가 눈이 돌아간 이유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의문이었다.

    ‘12살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작은 분이셨다.

    그런 생각이 끝나자마자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고 있었느냐.”

    흰 백발을 뒤로 깔끔하게 넘긴 대공이었다.

    제이는 아비를 향해 걸어가며 대답했다.

    “리사와 잠깐 성을 구경했어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더라고요.”

    “황성은 아름다운 곳이지.”

    제이의 말에 긍정하며 리사를 안아준 대공은 아들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제이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황녀님을 만났어요.”

    “... 그래?”

    대공은 약간 멈칫했으나 바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12살이시라는 말을 들었는데.....”

    말꼬리를 늘린 제이를 바라보던 대공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제 나이보다 작아 보였다는 거냐.”

    “...! 네.....”

    “그렇겠지.”

    한숨같은 대답이었다.

    제이는 영문을 몰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가만히 걸어가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안타까우신 분이시다. 너희가 황녀전하의 좋은 벗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대공의 말에 제이는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이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황녀님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리사는 그저 대공의 품에 안겨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나 황녀님 너무 좋아요! 너무 예뻐!!”

    “허... 네게 안 예쁜 사람도 있더냐.”

    “아버지는 안 예뻐요.”

    다정한 부녀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제이는 잠시 세린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작디작은 세린의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났다.

    리사의 거창한 칭찬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던 작은 소녀.

    소녀의 얼굴에는 '나 창피해요' 라는 글이 적혀있던 것 같았다.

    서둘러 도망가듯이 인사하고 뒤를 돌았을 때 조금 아쉬움을 느꼈던 제이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허... 참나... 우습구나. 네 눈에 아비가 안 예쁘다는 것이냐?”

    “아버지는 안 예뻐요. 예쁜 건 작고 귀여운 건데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얼굴도 무섭게 생겼잖아요.”

    “네가 산짐승이냐. 말로 제 아비를 물어뜯는구나. 그리고 네 외모가 나랑 닮았다는 것을 아직도 인지하지 못하였느냐?”

    “나 아빠 안 닮았어요!!”

    “소리 지르지 말거라. 못생겼구나.”

    제이는 부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자마자 웃음부터 튀어 나왔다.

    다급히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리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하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내뱉지 않으면 속이 뒤집히는 아이였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를 닮은 듯 했다.

    다음 날 황성.

    어느 날처럼 평범한 아침시간이었다.

    황제가 잘라준 음식을 열심히 먹던 세린은 황제가 드물게 한숨을 쉬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 왜 그러세요?”

    “..... 흠.”

    세린의 물음에도 열심히 고민하던 황제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세린을 향해 물었다.

    “세린. 너는 친구가 필요하겠지?”

    “... 네?”

    갑자기?

    세린이 당황한 것을 본 황제는 미간을 왈칵 구기며 고민했다.

    “역시 아직은 무리일까...”

    그러자 로레인이 물었다.

    “그 티파티 때문인가요?”

    “그래... 15살 이하의 영애들이 함께 하는 티파티에 세린 너를 초대하는 초대장이 왔는데... 흠...”

    티파티...?

    영문을 몰라 하는 세린을 향해 테오가 말했다.

    “여인들끼리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파티란다. 파티라기에는 규모가 좀 작지.”

    세린은 ‘그렇구나’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백작가에서 온 어린 영애들을 위한 파티에 나를 보낼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좀 무서운데...’

    아직 아빠와 오빠들과 대화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데 처음 보는 여자애들 앞에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신한테는 아직 어려운 일이라고 세린은 생각했다.

    그저 꽃향기가 나는 따뜻한 물을 홀짝였다.

    “백작가에서 감히 황녀를 오라마라 하는 건 좀 우습군요.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세린을 초대한 것도 어이가 없고요.”

    백작가에서 온 초대장이었나?

    테오의 냉정한 말에 황제가 수긍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황제의 음산한 대답에 세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 무슨 이야기요...?

    무언가 알면 다칠 것 같은 분위기의 말투에 세린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세린은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올려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로레인이었다.

    로레인은 방긋 웃으며 세린에게 물었다.

    “세린 너는 어떠니? 여자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어?”

    솔직한 대답은 '아니'였다.

    이미 아빠랑 오빠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데 굳이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휙 휙 저으며 대답했다.

    “아빠랑 오빠들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큽!”

    그 대답을 끝으로 식당에서는 누군가의 손아귀 힘으로 인해 완전하게 휘어버린 스푼과 나이프, 포크들이 5개나 나왔다.

    귀한 수저는 오늘도 쓰레기통으로 이동하였다.

    황제 : 나이프, 포크

    황태자 : 나이프, 포크

    로레인 :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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