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로레인의 출신
황제의 집무실.
“여보.”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푸른 하늘빛 머리카락을 곱게 올려 묶은 아리엘이었다.
수수한 것을 좋아하여 무늬가 없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던 아리엘은 황제에게로 총총 걸어갔다.
황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벌떡 일어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아리엘. 무슨 일이오?”
“실은... 귀부인들 티파티에서 들린 말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요.”
“음..?”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황제는 그녀를 집무실 의자로 안내했다.
의지에 앉은 아리엘은 황제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말했다.
“페르돈 후작이 후계자 문제로 사생아를 집에 들였다고 하네요.”
“형님이...?”
페르돈 후작은 황제의 단 한 명뿐인 형제였다.
황족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물려받지 못하고 능력이 보다 떨어져 황위권 순서에도 들지 못한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작은 끝없는 야심을 가진 위험한 자였다.
제 속을 아무리 숨겨봤자 황제의 눈에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황제는 곰곰이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후작의 걱정이었던 후계문제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후작부인이 결혼 5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손으로 턱을 감싼 황제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사생아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귀족들의 반발에서 그 아이가 버틸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
아리엘은 황제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음?”
“사생아로 태어난 그 아이가 분홍색 머리를 가졌다고 해요.”
“...!!!”
“후작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니잖아요. 아주 낮은 확률로 그 아이가 분홍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 난리인 것 같아요.”
“흠...”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사생아에게서 그것도 황족이 아닌 아이가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어찌 보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지도 모를 아이였다.
황제는 낮은 신음을 내뱉다가 이어 말했다.
“형님과 만나봐야겠군.”
“아직 갓난아기라고 들었어요. 제발 그 아이에게 좋은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보.”
“알겠소.”
황제는 아리엘의 말을 들으며 고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황제는 그 후 바로 서신을 날려 후작을 황성에 초대했다.
페르돈 후작은 금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모습으로 황성에 들어섰다.
“폐하. 페르돈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하라.”
웅장한 문이 열리고 황제의 붉은 눈과 페르돈 후작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페르돈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별고는 없었습니까. 폐하.”
황제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인사는 되었다. 자리에 앉지.”
페르돈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황제는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무슨 일로 소인을 부르셨나요?”
“그것은 후작이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흠....”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던 후작이 이내 말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로레인 때문에 그러신가 보군요.”
“호오... 로레인?”
황제는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며 한 쪽 입고리만 당겨 웃었다.
“네. 얼마 전 페르돈 성을 받은 제 아들입니다.”
“재밌군. 사생아를 그리도 멸시하던 자네가 아니었나. 그런 후작이 사생아를 자식으로 들이다... 라고?”
“폐하. 소인 벌써 나이가 위태롭습니다. 빨리 후계를 들여야 노후가 편하지요.”
황제는 거만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사생아라도 들이겠다 뭐... 이런 이야기로군 후작.”
“생각보다 거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게 피를 이은 아이가 생겼다는 것에 축복을 해주시기를 조금 기대했었는데요.”
“축하해주지. 로레인의 탄생을 말이야. 허나 그 아이의 미래가 불쌍해서 행복을 빌어줘도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단 말이지.”
“......”
"사생아라는 이름 뒤의 단어도 걱정이고 귀족들의 시선에도 걱정이고...”
“.....”
황제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재밌는 일에 휘말려 이리 저리 움직여 질까봐 짐이 너무 걱정이야.”
“... 걱정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차 한 잔 하고 가지. 얼마 전 새로 공수한 찻잎이거든.”
“감사합니다.”
페르돈은 그 후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신 후 후작 성으로 돌아갔다.
후작이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황제는 집무실 벨을 흔들었고 시종이 서둘러 들어왔다.
“후작이 다니는 장소, 보내는 서신과 편지 위치, 사생아의 생모, 지금 후작 성 상태 다 조사해와.”
“네. 알겠습니다.”
“보름 주겠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시종은 밖으로 나갔고 황제는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로레인의 친모는 그 성의 시녀였던 짙은 남색 머리를 가진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속 제비꽃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는 그 여인은 그저 후작의 하룻밤 실수로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했다.
‘과다출혈...’
과연 아이를 낳다 죽은 것일까.
그리고 요즘 다른 가문 귀족들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는다지...
노리는 것이 로레인을 통해 황족을 압박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황제의 조카... 로레인은 반란을 일으키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어디 더 두고 봐야겠군.
황제는 후작에 대한 서류를 기밀서랍 안으로 넣었다.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고 증거가 없다.
조금 더 뒤에서 지켜보다 로레인을 후작가에서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아리엘은 황제의 품에 안겨 물었다.
“그러면 아직 그 아이를 후작성에서 지내게 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지금 당장 그 아이를 보호할 수단과 이유가 없으니까.”
“만약 방법이 생긴다면 어떻게 보호하실 생각이세요?”
궁금해 하는 아리엘의 얼굴에 황제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소.”
“뭔데요??”
“만약 때가 되어서 그 아이를 데려올 일이 생긴다면 그 아이를 내 자식으로 들일까 해서....”
“..... 그 말은.... 황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건가요?”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 의견도 내게는 중요해.”
아리엘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너무 좋아요!!!”
“음?”
“너무너무 좋아요!!”
“"허허... 좋아해서 다행이기는 한데...”
즐거운 모습으로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웃는 아리엘을 보던 황제가 입가에 심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로레인에게 벌써 밀린 기분이군.”
“어머. 웃기셔라... 자기가 말해놓고서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아름답게 웃는 부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이 따뜻해져갔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때는 늦게 다가왔다.
그 후로 5년이 흐른 후.
황성에서 열릴 테오의 7살생일 파티를 준비하던 황제와 황후는 후작성에서 들린 소문을 들었다.
막 3살이 된 트레일을 유모에게 보낸 아리엘은 만삭으로 변해가는 배를 잡고 황제를 따라 집무실로 이동했다.
그 소문은 놀랍게도 이것이었다.
후작부인이 임신을 하였으며 태몽과 진맥을 통해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진찰을 받았다는 것과 그 후 끝없이 학대를 당한다는 6살이 되었을 로레인의 소식이었다.
아리엘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학대라니...! 이 나쁜.... 씨ㅂ!!”
황후의 입에서 나올 귀를 멍하게 할 욕설을 한 손으로 막은 황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기가 들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나. 진정해 아리엘.”
“하지만...”
울상을 지으며 황제의 손을 잡은 아리엘을 바라본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때가 되었다고 해두지. 아이는 내가 지켜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녀의 배를 다정히 쓰다듬은 황제는 이어 냉정한 눈으로 서류를 보았다.
로레인을 데려올 때였다.
“1황자 전하의 탄생을 경하 드립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고 끝없이 들려오는 축하세례에 테오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테오는 거대한 선물로 이루어진 산과 케이크를 매 해 똑같이 보여주어도 매해 똑같이 좋아하는 순진한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아리엘과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리엘은 눈을 굴려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페르돈 후작의 위치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고립되어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다.
남편을 닮아 분홍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져 있지만 푸석해보였고 입혀진 장식이 가득 붙은 옷은 크기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는 너무나도 마르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아리엘의 큰 눈망울에 분노가 일렁였다.
누가 봐도 학대의 흔적을 애써 숨기려한 모습이지 않은가!
황제의 소매를 잡은 아리엘은 말했다.
“저기 로레인이 있어요.”
황제는 담담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닮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존재에 놀란 것은 둘째였다.
아이의 상태가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서 놀란 것이 첫째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로 아이를.... 황제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에게 말했다.
“모두 황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어 짐이 너무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귀족들은 황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파티는 테오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리를 빛내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음악을 켜라! 모두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도록!”
그 말을 끝으로 귀족들은 환호하며 음악에 맞춰 파트너와 춤을 추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연스럽게 페르돈 후작의 옆으로 이동했다.
“폐하."
“후작. 축하하네.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고.”
“하하 폐하께도 이야기가 들어갔습니까. 소문이란 무섭군요.”
“제국의 소문이란 바람 같은 것이지. 누가 불어버린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언제 가실지 모르니 말이야.”
황제의 뼈있는 말에 후작은 슬그머니 미소를 내렸다.
네 소문이 어떻게 들려지고 어떻게 사라질지 잘 생각하라는 간접적인 의사였다.
후작은 샴페인을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데...”
“.....”
“후계는 어찌할 건가?”
황제의 물음에 후작의 미간이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