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들어나는 과거
그릇 위로 올라오는 따스한 음식을 맛보면서 황제의 따뜻한 품에 기대던 나는 이 자세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과 닿는 온기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조금 불편한 것이 생겼다.
나와 황제를 아주 아주 무섭게 바라보는 오라버니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테오는 기분이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고기를 잘게 썰고 있었고 로레인은 부드러운 미소가 조금 불편해보였다.
트레일은 그저 황제를 불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는..... 거지...?’
불편한 시선에 저절로 땀이 흘렀다.
편안하면서도 불편한 식사시간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황제는 아들들의 그 시선이 안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한 것일까?
나는 정원을 시녀와 함께 걸어가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를 덜렁 올려 안아주는 손길에 놀랐다.
로레인이었다.
“세린, 밥은 맛있게 먹었니?”
아니요.
라는 대답은 굳이 내뱉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었어요.”
그러자 로레인이 기쁘게 웃으며 나를 든든히 받쳐 안고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저기... 세린?”
천천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묘한 이질감을 안겨줬다.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면면에 보여 나는 긴장감을 가지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로레인은 잔뜩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버지 무릎이 편안했니?”
“......?”
아 혹시 아버지 무릎에 앉고 싶었던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넘겼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로레인이 조금 실망한 얼굴로 변했다가 다시 밝아진 모습으로 말했다.
그의 다양한 표정변화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오빠 무릎도 편할지도 모르겠구나!”
“......?”
“오빠도 아버지만큼 튼튼하거든.”
어감이 묘하게 자신의 무릎에도 앉아달라는 기색인 것 같아서 나는 두 눈을 껌뻑였다.
로레인은 그런 내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그의 화사한 눈동자가 아름답게 휘었다.
“그러니 다음 식사시간에는 오라버니의 무릎에 앉아서 먹지 않을래?”
“......”
안 될 것은 없지만 굳이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안은 자세로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간절한 그의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로레인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 날 저녁시간에 또 한 번의 무서운 시선을 감당했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부탁은 거절했을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오늘도 황제의 품에 꼭 안겨 잠이 들었다.
금색으로 장식된 천장이 보였다.
온 몸의 보라색의 반점이 생긴 내 팔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이것은 꿈이고 첫 번째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임을 알았다.
아파보이는 그 팔의 문양이 뜨거워지는 듯 한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다급히 치마에 그 팔을 문질렀지만 반점은 더욱 짙어졌다.
무서웠다.
“으으....!!”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니 곤히 잠들어 보이는 황제가 보였고 창밖을 보니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보이는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잠을 자고 싶었다.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내가 머물 궁을 정하지 못하였다며 황제가 지내는 태양궁에서 그것도 황제와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있는 나였다.
나는 멍하니 아버지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 꿈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크고 아름다웠지만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엄마를 안아주고 있었다.
내가 죽어가는 것이 엄마와 그를 힘겹게 한 걸지도 몰랐다.
곰곰이 꿈속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엄마는 정말 제국의 황후였고 첫째였을 때의 내 아버지는 황제였다.
그렇다면 둘째였던 나는 왜 창녀촌에 숨어있었을까? 엄마는 왜 내 존재를 숨겼을까?
그리고 로레인 오라버니는 누구의 품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배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잠이 오지 않니?”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 이어 팔을 올려 나를 품 안으로 꼭 안아주었다.
딱딱한 몸이었지만 그 온기가 너무나도 따뜻해 가만히 안겼다.
“그래도 조금 더 자보자꾸나. 잠을 자야 키가 많이 큰다고 하던데...”
내 뒷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그의 다정한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아빠.”
잠에 들기 전까지 나에게 고집하던 단어였다.
독해...
“..... 아, 아빠...”
“그래 세린.”
그래도 그 단어 하나에 저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나는 그런 아빠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를 얼마만큼 사랑했어요?”
“......”
아빠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괜히 물어봤다.
저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슬퍼하시니 가슴 속에 죄책감이 담겼다.
말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하려는데 아빠는 나의 등을 두드려주며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
“아주 많이 사랑했었단다.”
아빠도 그랬구나...
“강하고 아름답고 언제나 눈부신 사람이었지.”
나는 가만히 아빠의 품에 안겨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린. 너의 어머니는 대단한 실력의 대마법사였단다.”
“대마법사...?”
“"그래. 제국에서 그녀보다 마법이 뛰어난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
우와... 엄마 대단해...
아빠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먼 창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더 이야기해주세요.”
“......”
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심에 간절하게 그에게 매달려 말했다.
“나는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첫 번째로 태어났을 때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잘 안 나서...”
“.... 뭐?”
“... 웅?.... 헉!!”
난 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아빠는 당황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 다급히 물었다.
“세린. 지금 뭐라고 했지?”
“아... 아무것도...”
“세린.”
말해버렸어... 비밀이었는데..!!!
아빠는 몸을 숨기는 날 벌떡 일으켜 무릎에 올렸다.
나와 눈을 맞추며 아빠가 물었다.
“세린. 첫 번째로 태어났을 때라고...? 뭘 기억하고 있는 거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퍼뜩 저번 꿈이 생각났다.
엄마가 순간이동을 하고 보인 사람의 머리카락도 아빠처럼 은빛과 붉은빛이 섞여 있었다.
그럼 그 사람도 아빠...?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세린...!”
조금 엄한 목소리에 놀라 움찔 몸을 떨다가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았다.
“우으으으...”
“세린. 울지 말고 아빠를 보거라.”
나는 두 눈가가 붉게 물들어질 때까지 손으로 문지르다 아빠의 제지에 두 눈을 작게 떴다.
아버지는 세상 다정했던 그 표정 대신 내 이야기를 들어야 겠다는 다짐어린 표정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꾹 참고 말했다.
“아빠도... 아빠도 저한테 이야기해주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 드릴게요.”
“......”
잠깐의 정적이 끝난 후 아빠는 한숨 같은 말로 "약속하마." 라고 말했다.
그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첫째 딸이었을 때의 잊혀진... 그리고 혼란스러운 기억들, 병으로 죽어갔던 내 모습.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작디작은 아기였던 내 손과 발, 다시 만나게 된 엄마의 모습 그리고 창녀촌에서 시작된 고립된 삶과 엄마의 죽음아버지는 울면서 힘겹게 이야기하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등을 두드려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빠의 모습에 놀라움도 느껴졌다.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라니.
아버지는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나를 안아주었고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훌쩍임을 멈추고 아빠를 올려보았다.
아빠는 아주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기억을 가지고도...”
“......”
“말해주기 힘들었을 텐데... 내게 이야기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
아빠는 아주 한참을 내 등을 토닥여주다가 이어 나직이 말했다.
“아침 해가 떠야지 내 이야기가 끝날지도 모르겠단다. 들어줄 수 있겠니...?”
“네...!!”
아빠는 내 대답에 작게 웃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우선... 로레인에 대해서부터 해야겠구나.”
“.....”
로레인 오라버니는 엄마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는 것 마냥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슬픈 미소를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가 사생아라고도 했지...
“처음은 너도 트레일도 태어나기 전이였지.”
엄마의 이름은 아리엘.
성이 없는 평민이었지만 제국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마법의 힘을 받은 마법사였다.
그 실력을 황실에서 인정받고 황성의 마법사로서 성을 내려 받은 그녀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섭도록 성장했다.
뛰어난 미모와 함께 무서울 정도로 방대한 마력과 마법실력에 대마법사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황제를 도와 제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민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다양한 연구를 하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황제는 그런 아리엘에게 반했고 아리엘에게 끝없는 구애를 한 뒤 2년이 흘러서야 결혼에 성공하였다.
아리엘이 황후가 될 것이라는 소리에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민이라는 말도 옛말이었고 그 누구보다 제국을 위해 노력하는 아리엘을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제국은 그들의 국혼을 경사하며 축배를 들었고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며 첫째 테오를 낳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황제 부부는 로레인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