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6화 (6/218)
  • 6화. 감사와 사과

    “황궁의가 부드러운 음식부터 시작하면 좋다고 했는데... 몇 입 먹었다고 탈이 나다니... 황궁의와 요리장을 당장 다시 들여라.”

    “아, 아니에요!”

    그 싸늘한 말투에 황궁의와 요리장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은 후 아니라고 외쳤고 주변의 집중된 시선에 슬슬 눈을 피하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싶어서...”

    그의 손이 내 손안에서 움찔 떨렸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마신 후 아버지를 향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

    아버지는 나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곤 나직이 말했다.

    “그럼 나는 감사인사와 사과를 해야겠구나...”

    “... 네?”

    “지금까지 그런 곳에서 버텨줘서...”

    “.....”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세린.”

    내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리고 미안하다. 엄마를 지켜주지 못해서... 너희를 늦게 찾아서 정말 미안하다.”

    냄새나고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이 악물고 버틴 나와 엄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우리의 안전과 무사를 위해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생사도 알 수 없는 가족을 찾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겪어보지 않아서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나는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

    내가 엄마를 잃어가며 고통스러워할 때에도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찾았다는 것을 뒤늦게 이제야 알아차렸다.

    다정한 아버지의 그 따뜻한 눈빛 속에서 옅은 고독과 슬픔이 보였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안도감과 죄책감에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태어났음에도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에 괴로워졌고 볼품없는 나를 지켜주려는 가족이 엄마 말고 더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당황하는 모습으로 나를 품에 안으며 등을 두드려주었고 오라버니들도 당황하며 나를 달래주려 이러쿵저러쿵 무슨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저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껏 흐느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처절하게 울었음에도 엄마를 마음속에서 놓아줄 수 없는 내 고집과 욕심에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엄마를 내 품에서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린다고 하여도 말이다.

    울다 지친 세린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 애처롭게 우는 작은 소녀의 모습에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차마 왜 우냐고 물어볼 수 없던 것은 소녀가 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자신을 키워준 엄마를 단 하루 전에 잃어버렸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을까?

    답은 “아니.”였다.

    황제는 말없이 소녀의 고운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아름다운 옆얼굴이 슬프게 빛이 났다.

    황제의 옆에 서 있던 황태자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괜찮으신 겁니까?”

    황제는 계속 세린의 머리를 넘겨주며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말했다.

    “세린이라도 찾았으니 괜찮다.”

    “어디에서 숨을 거두신겁니까.”

    “....”

    “아버지. 저에게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황제는 스윽 시선을 돌려 자신만큼 커버린 첫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

    황제는 다시 시선을 돌려 세린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의 분홍빛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연두색 눈동자.

    그는 계속이 그려왔던 그리운 딸의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창녀촌 구석에 있더구나.”

    “....!!!”

    순식간에 황태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핏줄이 설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말아 쥔 아들을 바라본 황제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편지도 있었다. 세린에게 저주 따위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다고...”

    “......”

    황태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세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세린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면밀히 살펴야겠지요.”

    천천히 세린에게 다가온 황태자는 아침에 보았던 싱그러운 눈동자를 생각했다.

    잔뜩 겁먹은 눈동자와 움츠러드는 몸짓

    사람을 만나본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린에게서는 홀로 고립되어 살아간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황태자의 눈이 더욱 붉게 짙어졌다.

    “세린에게 말하려는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는 어린 여동생의 지난 과거 흔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잘 먹고 잘 크는 동안 세린은 못 먹고 성장도 느렸다.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세린의 이불을 정돈해주며 생각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그 사람과 이 아이가 겪었던 죽음의 위기, 그리고 잃어버린 세린의 기억.

    황태자는 세린이 그토록 궁금해 하던 모든 과거의 연결고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린이 그러한 모든 것을 궁금해 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요.”

    나직이 그가 말했다.

    “세린이 조금 더 건강해지고 견고해진다면... 그때 알려주세요.”

    황태자는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냉정히 돌아섰다.

    “그동안은 그 아이에게 방해될 모든 것들을 제거할 것입니다.”

    황제는 말없이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씁쓸히 웃었다.

    세린은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황태자 또한 자신의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다.

    아니지, 어쩌면 자신에게 모든 자식들은 다 아픈 손가락일지도 몰랐다.

    '세린! 정신 차리렴!! 엄마를 봐!!'

    다급한 그 목소리에 절망이 섞였다.

    쓰러지는 내 몸을 받아 든 엄마의 모습은 흙투성이에 핏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부끼는 하늘색 머리카락 속에서 눈물에 젖은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첫째였을 때 기억이구나.

    맞아 나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어.

    전신을 휘감는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울다가 급히 나를 안고 빠르게 다른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가루가 아름다웠다.

    마법인가?

    맞아, 우리 엄마는 마법사였어.

    엄마가 이동을 한 곳에서는 누군가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키가 큰 사람이었다.

    밤인가 보구나.

    어두운 달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은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붉은 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급히 상처 입은 엄마와 죽어가는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나는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다.

    “......”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나는 여태껏 꾸었던 첫째 딸이었을 때의 기억이 보다 선명해짐을 느꼈다.

    그는 누구지? 엄마는 날 어디로 데려갔던 걸까?

    그런데... 내가 죽어갈 때 엄마가... 다쳤었나?

    알 수 없는 의문의 소용돌이와 낯선 공간에 대한 인식이 섞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폭신한 신발을 신고 문을 향해 걸었다.

    방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걸어가는 것도 일이었다.

    그리고 방의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손을 위로 올리는 것과 동시에 사건은 발생했다.

    콰앙!!! 쿠당탕탕!

    손잡이를 잡아보지도 못하고 열린 문에 나는 나가떨어졌다.

    볼품없이 뒤로 굴러 넘어진 나는 코에서부터 이마까지 몰려오는 고통에 숨도 쉬지 못했다.

    “우우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부들부들 떨자 큰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세린!!! 괜찮니?”

    따뜻한 손 하나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눈을 조심조심 뜨자 보이는 것은 화사한 얼굴에 잔뜩 걱정을 담은 로레인 오라버니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볼 수도 없이 밀려오는 아픔에 코를 감쌌다.

    뜨뜻한 무언가가 손에서부터 느껴져 손바닥을 펼쳐보자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로레인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그리고 시녀를 향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의원을 불러와!!”

    로레인은 다급히 날 안아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세린. 걱정 마렴. 단순한 코피야.”

    알고 있는데...

    나는 내 코를 부드럽게 닦아주는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안겨있었다.

    그리어 곧바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격하게 열렸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녀도 황궁의도 아닌 황제였다.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그 둘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한걸음에 내게 달려와 양팔을 뻗어 나를 안아들었고 로레인은 순순히 나를 보냈다.

    “무슨 일이지?”

    “열린 문에 얼굴을... 코피가 조금 나고 이마가 부었네요.”

    “로레인. 네가 문을 열은 것이냐.”

    “송구합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한 겁니다.”

    “후....”

    내 이마를 곱게 문질러주며 황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로레인 오라버니의 잘못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나는 급히 로레인 오라버니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잘못이 아닌데...”

    “세린?”

    “오라버니 혼내지 말아요...”

    내 말을 들은 황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로레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날 걱정해 준거야 세린?”

    “.... 우웅....”

    난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바로 의원이 도착했다.

    “황녀는 어떤가?”

    “저.. 다행스럽게도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다만 콧대가 조금 연약하시어 조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이상이 없는 것이냐.”

    “어.. 없습니다. 폐하.”

    황제의 기세에 눌려 고개도 들지 못하는 황궁의가 안쓰러웠다.

    황제는 결국 몇 번이고 내가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를 데리고 아침밥을 먹으러 이동하였다.

    오늘도 황제는 음식을 잘라 내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포크를 사용하여 그 음식을 열심히 집어서 먹기를 반복하였다.

    황태자와 로레인 트레일 오라버니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황태자가 말했다.

    “아침부터 다쳤었다고.”

    “히끅”

    놀란 마음에 딸꾹질부터 나왔다.

    아버지가 당황하며 내 등을 두드려주었고 황태자는 더욱 당황하며 물을 내게 넘겨주었다.

    꼴깍꼴깍 물을 마시며 딸꾹질을 멈춰보려 애쓰자 다행스럽게도 멈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