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정의를 논해? 그대들이?’
아슬란은 불쾌함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최근 그가 루스벨라와의 일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들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 멍청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북부의 행복은 곧 각하의 업적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저희의 뜻에 따라 주실 거라 믿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하는 가신의 모습에 아슬란은 낯선 감정이 제게 침투함을 느꼈다.
“내가.”
“예?”
“반드시 그대들의 뜻을 따라 줄 거라 자신하는 건가?”
“예? 아, 아니. 각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눈을 가린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몰랐을까.’
의기양양하던 가신의 모습이 깨지자 불만을 숨기려는 소인배 하나가 보였다.
“저희는 그저 북부와 각하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드리는 말씀이었지요.”
‘뜻대로 되지 않아 낭패에 빠진 것 같아 보이는 곤란함.’
“그런가?”
가신들은 영주이자 공작인 그를 허울 좋은 명목으로 회유하고 있었다. 아슬란이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정의로.
아슬란이 사랑하고 집착하던 정의는 이해관계에 얽매일 때 내세우는 명분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바란 정의는 이상적인 바른길을 걷는 것이었다.
영지민에게 윤택을 누리게 하고, 영주이자 공작인 자신은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의 북부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의 정의였다. 아슬란은 그의 정의를 위해 가신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제게 지워진 의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 결과가 이건가?’
제 아버지인 선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노라 더 노력했거늘, 가신들이 그를 쉽게 여길 줄은 몰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아슬란이 딱딱하게 일처리만 해 온 것이 가신들에게 선대보다 무르게 보이게 된 이유라 하더라도, 그 역시 엄연히 선대의 피를 이은 직계이고, 넘치는 무력 또한 가지고 있었기에.
“정말 나를 위해서, 북부를 위해서 한 말이라, 이건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해괴망측한 소리는 그만 지껄이게.”
“……예?”
“이렇게만 말하면 못 알아들으려나? 그만 하라고. 윈블 영애도, 연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귀족들 역시 나는 그냥 넘어갈 생각 따윈 없어.”
가신들을 존중해서 쓰던 말투가 달라졌다. 저작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자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지만.
“고, 공작님께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들을 버리시려는 겝니까?”
“버리다니? 죄를 지은 자들에게 적법한 처벌을 받게 하고, 피해를 받은 이에게 사죄와 보상을 내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지?”
“하오나 그리되면 북부의 평판이!”
“그대는 나를 가르치는 입장이 아닐 텐데, 아닌가?”
아슬란이 사납게 눈앞의 귀족을 노려보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딸꾹질만 했다. 살기 탓이었다.
“끄…… 끄윽…….”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보지. 명백히 피해자가 있는데, 그것을 모른 체하고 이익만을 앞세워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나? 언제부터 그딴 무뢰한 같은 짓이 정의가 되었지?”
아슬란의 목소리는 말이 끝맺어질수록 점점 격앙되어갔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 이 가신과, 그와 비슷한 짓을 했던 과거의 그에게.
“하지만…… 데벤테르 후작 부인이 앙심을 품은 짓일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가신은 끝까지 억지를 썼다. 아슬란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 가신의 멱살을 세게 잡았다.
“그녀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밀어붙이기만 한다는 걸 모를 줄 아나?”
“증거는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대들이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
손안에 잡혀있는 목에서 전해지는 맥동이 거세졌다. 루스벨라에게 저지른 일을 시인하는 증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아슬란이 그를 잡아 뒤로 내팽개쳤다.
“커헉, 컥.”
“이 일로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도록. 윈블 자작에게도 전해. 억지스러운 주장 그만하고 데벤테르 후작 가에 사죄할 준비나 하라고.”
“각하께서 저희에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북부를 최우선으로 하셨던 분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변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원망 어린 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아슬란은 겨우 화를 참고 가신을 끌어내라 명했다.
“내가 변했다고?”
변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오히려 그 말을 하고 싶은 건 나야.’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홀로 남은 아슬란이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그가 잘해 내고 있다고 생각한 가신들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멀쩡하게 반듯이 쌓아 온 탑이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부실 공사가 된 것을 보게 된 것 같았다.
‘올바른 길을 걷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슬란은 후회했다. 그 역시도 오만했다. 돌아보지 못한 사이 내실이 썩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게 수치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놓친 거겠지.’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세게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던 테라스 앞을 기억했다.
그는 겁쟁이였다. 비겁했고,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게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
지펠론 백작은 후작 가의 시종들 앞에서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백작의 명예를 지키는 범위 내의 사람들 중에 시종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가면서까지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후작 부인의 아비 되는 자가 나거늘, 어째서 못 들어가게 막는단 말이냐!”
“주인님께서 안 된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주인마님 역시 같은 입장이십니다.”
시종들만으로는 안 될 거라 생각했는지, 집사도 나와 백작을 만류했다.
“저희가 모시는 분들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고 그만 떠나 주십시오.”
“허. 딸이 걱정되어 찾아온 아비를 박대하는 가문이라니. 데벤테르 후작 가의 유명세가 무색하군. 예의도 없고 생각도 없어!”
예의도, 생각도 없는 것은 지펠론 백작이었다. 그는 루스벨라에게 미리 연통을 넣지 않고 무작정 자식들까지 데리고 부랴부랴 후작 가로 쳐들어왔다. 미리 연락을 넣었다면 거절당할 것이 뻔하니 꼼수를 쓴 것이었다.
‘루스벨라…… 고것이 감히 걱정해서 찾아온 아비에게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것 같으니라고.’
누구 덕분에 시집을 잘 간 것인지도 모른다며 백작은 분개했다. 그는 강경하게 돌아가라는 집사와 건장한 시종들에게 자식인 카일과 레베카를 보여 주며 호소하는 척했다.
“누이의 아픔에 한달음에 달려오겠다 말한 동생들도 왔거늘…… 야박한 처사가 아닐 수가 없어. 내가 딸을 잘못 키운 거겠지.”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찍어내며 가족의 정에 매달리는 백작의 모습은 처량했다. 쌍둥이 남매도 그를 따라 울상인 시늉을 했다. 집사와 시종들만 난처해졌다.
“친정 식구들을 나 몰라라 하는 아이로 자랐다니,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잘하고는 있는 건지.”
은근슬쩍 루스벨라에 대한 비난까지 얹으면서 백작은 후작 가 고용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뭐야?’
그런데 백작이 루스벨라를 비난한 소리를 입에 담은 순간부터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맞아요. 그분이 얼마나 세심하게 고용인들에게도 다정하신데요.”
지펠론 백작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는 하인들을 도구처럼 여기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지만, 루스벨라는 달랐다.
다정함에는 다정함으로, 상냥함에는 조금 더 많은 상냥함으로.
데니스가 정식으로 후작위를 계승한 이후 후작 가의 고용인들은 새로 교체되었다. 전부 새로운 주인들에게 충성심을 바칠 수 있는 인력들로만 구성했다. 루스벨라에 대해 유의하라는 지시는 당연히 뼛속까지 스며들도록 교육했다.
덕분에 루스벨라도 고용인들과 정을 쌓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하고 모시기 편한 주인이었기에, 하인들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이거 괜찮다면, 나중에 써요. 일하다 보면 손발이 부르틀 때가 종종 있을 테니.’
‘마님, 이건 포션이잖아요!’
‘내가 직접 만든 치유 포션이니 걱정 말고 써요. 나도 무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만든 것이니, 괘념치 말고.’
얼떨결에 받은 치유 포션은 좋은 이미지를 쌓는데 톡톡한 공을 세웠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그 시간 안에 보인 루스벨라는 이유 없이 친정 사람들을 내쫓을 사람이 아니었다.
“돌아가 주십시오, 백작님.”
“마님의 휴식을 정말 방해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발 돌아가 주세요.”
“뭐…… 이런…….”
백작의 안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루스벨라가 나와서 꺼지라는 소리를 면전에서 했다면 여유롭게 받아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아랫것들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가라 마라야……!’
그것이 분할 따름이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상하니 시종 중 누구의 뺨이라도 치고 갈 셈이었다.
“그쯤 하지. 백작.”
‘이 목소리는!’
“데벤테르 후작 아니십니까! 잘 되었습니다. 사…….”
사위께서 어떻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돌아가십시오, 백작.”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백작에게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칼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사위의 칼이 장인 된 자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후작! 어떻게 같은 가족이 된 사람에게 이런 짓을……!”
“나는 당신의 가족이 아니야.”
칼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 했는데, 옷감 일부분이 잘려 나갔다. 백작이 차려입고 온 옷의 일부였다. 항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살의에 질려 오금이 저렸다.
“루스벨라가 전해 달라 했지. 나는 당신의 가족이 아니니, 그녀와 결혼한 나 또한 당신의 가족이 아니라고.”
“그…… 그런…….”
“그러니 꺼져. 꺼지란 말을 듣는 게 취향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빌붙어서 더 힘들게 하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