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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65화 (165/166)
  • 165화

    ***

    “그래서 그 아이는 너를 좋아하면 좋아했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무관심하지도 않을 거고.”

    “세상에. 너무 좋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루스벨라는 멍해졌다. 릴리안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진흙을 뒤집어쓴 꼬질꼬질한 아이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과거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게 중요하지!’

    주먹을 불끈 쥔 루스벨라의 입에 릴리안은 어미 새처럼 초콜릿을 넣어 줬다. 단것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루스벨라는 보다 높아진 데니스와의 결혼 성사 가능성에 행복해했다.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고모님!”

    “무얼. 귀애하는 조카의 사랑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뭘 못하겠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여기까지는 훈훈한 대화였다.

    “그런데 왜 데니스는 저와의 약혼을 거부했을까요?”

    릴리안을 찾아오게 된 원인을 떠올리게 되자 한껏 하늘 위로 솟았던 루스벨라의 어깨는 다시 땅으로 축 처졌다. 충분히 좋은 인상도 남긴 듯한데 어째서 그는 굴러들어 온 약혼을 걷어찬 것인가.

    “그, 그사이에 마음이 변한 걸까요?”

    ‘좋아하는 거 같다며! 첫사랑에 빠진 거 같다며!’

    릴리안의 증언(?)을 바탕으로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깊은 호감을 가졌다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대체 왜 잃은 건 없고 얻을 것만 있는 약혼 제의를 왜 거절했단 말인가?

    ‘설마 그사이에 내가 싫어졌나!’

    첫사랑의 열병으로 약간 맛이 간 뇌가 오락가락했다. 기뻐했다가 슬퍼하기를 반복하는 조카를 보며 릴리안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웃지 마세요. 전 진지하다고요. 심각해요!”

    “미안,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말이지.”

    “후. 영식이 저를 그렇게 봐 줘야 할 텐데 말이지요. 속내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뭐, 그런 점도 매력이지만.”

    구시렁대다가 결국 결론은 콩깍지 씐 발언으로 마무리되었다. 릴리안은 다채로운 조카의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중증이구나. 중증이야.’

    저러다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교제 즉시 청혼해서 식이라도 치를 것 같아 무서웠다. 루스벨라는 추진력이 아주 대단한 아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궁금하면 역시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겠니?”

    “그래도 될까요?”

    “그럼.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고 정확하지. 아마 그 아이도 그걸 바랄 거란다.”

    “제가 괜한 것을 물어본다고 흘겨보지는 않을까요?”

    “가기도 전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뭐든 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의외로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해 보고 나서야 어렵지 않다는 걸 알게 돼. 사람 간의 문제도 그렇단다. 대화를 하고 나서야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고 멋쩍어질 수도 있지.”

    릴리안이 해 주는 이야기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그녀는 현명하고 노련한 성녀님이었다. 루스벨라는 제 고모님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대련을 핑계로 물어볼게요!”

    ***

    - 일전에 말했던 대련, 그거 오늘 하도록 하죠. 장소는 중앙 신전의 연무장입니다.

    “……이거 혹시 결투장은 아니겠죠?”

    보좌관 제이크는 데니스가 받은 편지를 읽고서 얼굴이 희게 질렸다. 유력한 다음 대 성녀 후보이자 데니스의 약혼자가 될 뻔했던 루스벨라 지펠론의 휘갈긴 필체에 그는 연약한 위장이 당기는 걸 느꼈다.

    “아닐 거야. 대련은 내가 먼저 제의한 거고, 조금 더 앞당겨졌을 뿐.”

    데니스는 침착하게 신성력을 실을 튼튼한 검을 골랐다. 대련복으로는 은근슬쩍 평소보다 화려한 것을 고르는 것 같아 제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그 영애라면 도련님을 짓밟아 주고 싶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상관없어.”

    “아, 좀! 지금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 모르겠어요?”

    제이크는 불안했다. 태평한 데니스와 반대로 그는 돌아가는 정세에 민감했다.

    최근 데니스가 저지른 약혼 무르기 때문에 지펠론 가와 데벤테르 가 사이는 어색해졌다. 나름대로 친분이 있어 맺으려던 약혼이 당사자의 거부로 파투가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타인의 수군거림도 덤으로 따라오고.’

    다음 대의 유력한 성녀 후보는 매력적인 혼처였다. 황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게 루스벨라였다. 신성력이 무작위로 축복을 받은 이에게 부여되는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강한 신성력을 타고난 이가 가문 내에 있으면 능력이 유전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제로 현 성녀인 릴리안 다음 대로 조카인 루스벨라가 지목되었으니, 사람들의 관심은 더 뜨거워졌다. 루스벨라와 또래인 영식들이 있는 집안이라면 언제든 그녀에게 제 아들을 소개해 주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그 영애가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 지금까지 약혼자 없이 살아온 거였는데.’

    만일 화가 난 루스벨라가 홧김에 연인을 만들기라도 하면 제 도련님의 순정은 꽃피워 보기도 전에 지는 셈이었다.

    “조급하지도 않으세요?”

    “매일 조급했어. 처음 마주친 이후부터 쭉.”

    “아오, 그런데 친구부터 천천히 시작하시겠다고요?”

    “연애에는 단계가 중요한 거랬어. 너무 급하게 다가가면 안 되고, 밀고 당기기가 필요하다고.”

    “누가 그래요? 도련님 옆에 자칭 연애 고수가 있나?”

    “책에서.”

    “…….”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이크는 뒷골이 당기는 걸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뒤로 걸었다.

    “모르겠습니다. 이젠 몰라요. 도련님께서 그분께 차이고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왜 저주를 하고 그래. 응원을 해 줘야지.”

    “네네. 응원할 테니까 잘 다녀오세요.”

    “응.”

    제이크가 뭐라고 답답해하든 간에 데니스는 설렜다.

    ‘드디어 영애를 마주 보고 설 수 있어.’

    일반적으로 성기사는 성녀보다 약하기 때문에, 이 대련에서 그가 이길 확률은 적었다. 게다가 루스벨라는 역대 최강의 성녀가 될 거라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어쩌면 한 방에 나가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좋았다.

    ‘그때 받았던 신성력의 따스함을 다시 맛볼 수 있다면.’

    대련 중이니 신성력이 절대 부드러운 오리털처럼 다가오지 않고 거센 바람처럼 휘몰아치겠지만, 그런 것은 괜찮았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루스벨라가 제게 황홀한 성녀의 축복을 내려 준 뒤로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따로 만남을 청하지 않았던 것은 용기가 없어서였다.

    ‘꾸준히 얼굴을 가꾸고 진로도 성기사로서 부족함이 없게 관리해 왔지만……. 그분이 좋아하실까.’

    냉정하게 다른 영애들을 내쫓던 것과는 몹시 상반된 생각이었다. 이걸 루스벨라가 알았다면 당장에 그를 보쌈해다가 결혼식을 치러 온 천하에 내 것이라고 인증을 했을 터다.

    복잡한 생각의 고리 속에 갇혀서 중앙 신전으로 향하자, 연무장에서 편한 바지 형태의 대련복을 입은 채 기다리는 루스벨라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펠론 영애. 오늘 대련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요.”

    검을 챙겨 온 데니스와 다르게 루스벨라는 아무 무기도 손에 들지 않았다. 구경꾼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알아서 왜 그런지를 숙덕거렸다.

    “역시 다음 성녀님. 신성력으로 무기를 형상화하셔서 싸우시려나 봐.”

    신성력으로 만든 무기로 싸우는 건 루스벨라의 자랑이었다. 넘쳐나는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무기는 지속 시간도 길고 쉽게 부서지지 않아 굳이 무기를 들 필요가 없었다.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이 나서서 시작 소리를 내자 두 사람은 무섭도록 빠르게 검을 부딪쳤다. 신성력을 주입한 검과 신성력 그 자체인 검이 맞부딪쳐 빛이 튀었다.

    “영식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요.”

    챙강. 챙강. 서로의 약점을 노리며 검을 놀리던 중 루스벨라가 말을 꺼냈다.

    “비밀이라고 알려 주지 않았던 약혼하기 싫었던 이유, 그거 어릴 때 나와 만났던 기억 때문에 그런 거예요?”

    “!”

    순간 틈이 생겼다. 당황하는 데니스를 놓칠 리 없는 루스벨라가 바닥에서 황금빛 사슬을 끌어 올려 그의 발을 묶고자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사슬을 피한 데니스가 대답했다.

    “……기억하셨습니까?”

    “솔직히 대답할게요. 못 했어요. 릴리안 고모님이 말해 주시기 전까지 몰랐어요. 말해 주신 이후에도 당신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서운해하면 안 되는 일인데, 데니스가 풀 죽은 소리를 냈다. 그것마저도 귀여워서 루스벨라는 내친김에 다음 질문도 던져 보았다.

    “난 영식이 좋은데, 영식은 나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예?”

    이번엔 진짜 큰 틈이 생겼다. 데니스가 너무 놀라 발을 삐끗한 것이다. 즉시 황금빛 사슬이 아가리를 벌린 뱀처럼 그를 에워쌌고, 데니스는 검도 놓친 채 고치가 되어 루스벨라 앞에 놓였다.

    “이런 말 하면 점수 깎이겠지만, 난 영식을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외모가 너무 취향이었어요.”

    “그, 그렇습니까.”

    “그래서 당신을 낚아채고 싶어졌어요. 음, 물론 더 알고 싶고요.”

    “……저를요?”

    “네. 그래서 영식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요. 전 절 싫어하는 사람에게 날 사랑해 달라고 강요하기 싫거든요.”

    결혼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데니스가 그 모든 생각을 뒤엎었다.

    “날 싫어해요? 좋아해요? 그것만 말해 줘요. 싫어한다고 하면 깔끔히 당신 잊고 모른 체할게요.”

    허세였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하면 펑펑 울면서 사흘 밤낮을 보낼 것이다.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발발 떠는 토끼처럼 불안해하고 있었다.

    ‘으악! 제발 싫은 건 아니라고 해 주길!’

    데니스가 비혼주의라고 한다면 기꺼이 사실혼 관계만 유지할 생각도 있었다. 이 생각을 들었다면 그녀의 부모님이 당장 때려치우라고 하소연했을 이야기였으나……. 다행히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 좋아합니다.”

    “뭐라고요?”

    “좋아합니다. 정말…….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당신과 어릴 적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얏호!’

    루스벨라는 신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 아름답고 순진하고 귀엽기 짝이 없는 남자가 기꺼이 제 품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중이니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흠흠. 그런데 왜 약혼은 거절했어요?”

    “그건……. 제가 직접 당신을 만나 교제하다가 청혼하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부모님께서 정략결혼을 추진하시려 하시길래 싫었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제가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이거군요?”

    “물론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늘 영애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많아서……. 괴로웠습니다.”

    미치겠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구속하던 사슬을 끊고 그를 잡아다 제 옆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 데니스 데벤테르 영식은 제 약혼자입니다!”

    “맙소사.”

    구경하고 있던 릴리안이 웃겨 죽으려고 했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도리질을 치더니 앞으로 나서 그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했다.

    “내가 이 급조한 약혼의 증인이 되어 주마. 결혼식 때도 꼭 불러 주렴.”

    “서, 성녀님?”

    “그래요. 예비 조카사위.”

    릴리안의 말을 듣고 데니스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흐물흐물한 초콜릿처럼 녹아 버리려는 그를 붙들고 루스벨라는 진하게 키스했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입술이 떨어지자 멍하니 있던 데니스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얼렁뚱땅 성사된 약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성녀와 성기사 부부로 이름을 남겼다.

    만일 그들에게 아무런 고난도 없었다면 있었을, 아름다운 세계였다.

    -외전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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