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고모님, 저 왔어요!”
“어서 와라, 루시. 잘 지냈니?”
릴리안을 본 루스벨라는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타고난 신성력이 풍부해 튼튼하고 강한 신체를 타고난 조카를 릴리안은 거뜬히 받아 냈다.
“잘 지낸 건 맞는데, 여쭤볼 게 생겨서 왔어요.”
“무슨 일이 생겼던 거구나.”
릴리안은 능숙하게 루스벨라를 맞았다. 곧 두 사람 앞에는 수북한 디저트의 산이 생겼다. 물론 루스벨라를 위한 릴리안의 배려였다.
부드러운 커스터드푸딩을 황금빛 스푼으로 냠, 하고 떠먹으면서 루스벨라가 발랄하게 이야기했다.
“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어머? 그래?”
“첫눈에 반했어요.”
“얼굴 보고 반했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첫눈에 반하는 게 얼굴 아니면 뭐가 있겠니. 나도 그렇게 우리 그이를 만났지.”
남편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릴리안의 눈은 먼 과거를 그리고 있었다.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릴리안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제가 고모님을 닮았나 봐요. 어쩜.”
개소리였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만나기 전만 해도 독신주의를 표방했다. 릴리안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카가 마냥 예쁘기만 한 그녀는 굳이 그 이야기를 들추지 않았다.
“사랑은 많은 것을 바꾸게 하지.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얼굴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 환상적이었어요.”
루스벨라는 시를 짓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데니스의 얼굴만 봐도 그의 미모를 찬양하는 시만 백 편이 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빛의 요정이 중간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난 게 그라고 해도 과분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저랑 약혼하고 싶지 않다고 먼저 거절 의사를 꺼냈어요.”
“뭐라고?”
“제가 싫은 건 아니래요. 그런데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어요. 왜 그럴까요? 비밀 많은 남자는 질색인데.”
“그렇지만 얼굴이 잘생겼다면 다 포용해 줄 수 있을 거란다.”
“제 말이요!”
이해자를 찾은 루스벨라는 흥분했다. 다행히 스푼에 묻은 초콜릿 가루가 튀지 않도록 가지런히 그릇 위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니?”
“데니스 데벤테르 후작 영식이요.”
“음? 데벤테르 후작 영식?”
우아하게 찻잔 속에 잼을 넣으며 숟가락으로 젓던 릴리안이 의아해했다. 루스벨라는 그 반응에 얼른 물었다.
“혹시 영식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렇진 않단다. 성녀라고 해서 모든 성직자와 친하지 않지. 그 영식은 아직 성직자도 아니니 나는 잘 몰라.”
이럴 수가. 가장 믿음직한 황금 동아줄이었던 고모님이 데니스와 인연이 없다 하니 충격이었다.
‘어떻게든 만남의 횟수를 늘려야 하는데!’
루스벨라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은 끔찍이 싫어했다. 그건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무를 포기한 무가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어제부로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은 터였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인내는 황홀한 결실을 낳아 줄 비료였다.
‘대련으로는 부족해. 자칫하면 우정의 싹만 더 키울 수 있어.’
우정으로 키우는 나무 따위는 필요 없었다. 루스벨라가 원하는 건 사랑! 사랑이었다. 그녀를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만드는 외모는 그녀 생애에 두 번 다시는 없으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이 남자, 절대 놓칠까 보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사랑에 대한 열정에 공기가 뜨거워지는 착각마저 일었다. 릴리안이 작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어 바람을 일으켰다. 첫사랑에 빠져 아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조카가 너무 귀여웠다.
“하지만 예전에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눈 적은 있단다.”
루스벨라의 귀가 그 말에 맹렬하게 반응했다. 먹이를 포착한 짐승처럼 안광을 번뜩이며 몹시도 간절하게 질문을 꺼냈다.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미 같은 거라도…….”
“그런 건 못 들었지. 그리고 지난 세월이 있어서 그런 소소한 것들은 기억에 남지 않아.”
“영식을 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쯤 이미 결혼해서 내 거라고 도장을 딱…….”
“아서라. 그리고 너희 둘은 만났어. 네가 기억하지 못할 뿐.”
“네?”
그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기억을 못 한다니. 루스벨라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기억력을 의심했다. 그렇게 눈에 띄는 미소년이라면 어릴 때도 예뻤을 텐데 잊어버릴 리가?
“혹시 그때…… 많이 못생겼었나요? 아니면 살이 많이 쪄 있다던가.”
“아니. 전혀. 그때도 예쁘장했고, 군살은커녕 애가 아파서 비쩍 말랐지.”
십년감수했다. 하마터면 어린 시절의 인연도 기억하지 못하는 냉정한 인간이 될 뻔했다.
‘아. 그런데 어쨌든 만난 건 사실이고 난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잖아?’
안색이 밖에 놔둬서 허옇게 일어난 빵 위의 곰팡이처럼 변한 루스벨라를 보고 릴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땐 그 애가 좀 꼬질꼬질했어. 영식을 질투하던 다른 가문 아이들이 그를 흙바닥에 패대기쳤거든.”
“아니.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그러다 얼굴에 상처라도 났으면 누가 책임져요?”
“상처는 안 났지만 이후 데벤테르 후작 부부가 괴롭힌 아이들을 찾아 엄벌했고, 영식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네가 봉합해 줬으니 걱정 말거라.”
‘내가 그렇게 훌륭한 짓을?’
과거의 자신에게 고마웠다. 이런 복선을 깔아 주다니. 비록 첫 만남이 기억에 없는 건 애석했지만 인연이 되어 줄 포석을 깔았다는 것에 루스벨라는 만족했다.
“건국제가 다가온 날이었지. 네가 아직 셀레누스 님이 직접 선물을 들고 집으로 찾아온다는 말을 믿을 때였어.”
***
아직 어린 귀족 아이들은 성녀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중앙 신전으로 향했다. 성녀의 축복은 무척이나 고귀해서, 유력 가문들 외엔 받기가 어려웠기에 아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보석과 실크가 넘치던 저택이 아니라, 차가운 대리석과 석고상이 가득한 정갈한 신전에 들어오자 아이들은 심심했다.
“우리 모여서 카드 게임이라도 하지 않을래?”
마침 트럼프 카드를 들고 온 아이가 있었기에, 아이들은 둥글게 원으로 모여 앉아 도둑잡기를 했다.
그런데 그 놀이는 얼마 가지 못하고 엎어졌다. 한 아이가 너무 잘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다시 해!”
“왜 계속 쟤만 이기는 거야? 짜증 나.”
“반칙을 쓴 거지? 그렇지?”
“나쁜 애야!”
승률 백 프로로 이기는 아이의 정체는 데니스였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던 그의 두뇌는 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사회성도 다소 떨어졌다.
“너희들이 못 한 거잖아. 왜 내 탓을 해?”
이 말만 안 했어도 다른 아이들이 분노에 차서 그를 흙탕물 위로 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아이들은 자존심에 금이 가서 그를 대기실에서 내쫓았다.
“재수 없어! 너 같은 건 성녀님의 축복을 받으면 안 돼!”
한 아이가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부모님이 정성 들여 고른 옷이 축축한 흙빛으로 물들었다. 데니스는 그 아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난 안 받으면, 콜록, 큰일 날 수도 있다고 했다고.”
어린 소년은 똑똑하고 오만했으나 몸이 약했다. 그래서 후작 부부가 아들을 성녀의 축복을 받아 별 탈 없이 크게 해 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걸 망쳐 놓은 아이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래서는 성녀님 앞에 가지 못할 거야.’
성녀님을 만나기 위한 예의를 차리기 전에, 이렇게 엉망인 꼴로 가면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된다.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건국제는 중앙의 사제들이 여러 곳으로 파견을 나가고, 성녀님을 보조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두기 때문에 흙바닥에서 뒹구는 그를 봐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귀족 아이들이 대기하는 방 자체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신성력으로 결계를 씌웠는데,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추워.’
연약한 몸이 덜덜 떨렸다. 하필이면 감기에 걸렸을 때라, 흙탕물에 젖은 몸은 치명적이었다. 감기 외에 다른 질병도 앓고 있었기에 데니스는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오늘도 무리해서 나온 것이었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얘,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때 한 소녀가 다가왔다.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있던 데니스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소녀를 봤다.
“어디 아프니? 잠깐만 기다려.”
소녀는 소년에게 따스한 빛을 주입했다. 신성력이었다.
‘따뜻해.’
신성력이 기분 좋게 몸 안을 따스하게 데우는 동안, 골치 아팠던 질병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더는 춥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흙에 젖은 옷도 깨끗해졌다.
마치 성녀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성녀님이세요……?”
“응? 아니. 난 성녀 후보야. 현세대의 성녀님은 내 고모님이시지.”
“그렇구나.”
열이 내린 머리는 다시 차분하게 돌아갔다. 현 성녀는 지펠론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펠론 가문 소속이겠구나.’
데니스는 은인의 정보를 머릿속에 꼭꼭 눌러 담았다. 언젠가 이 은혜를 꼭 대갚음해 주리라고 다짐했다.
“루시? 어디 있니?”
“아, 나 고모님이 찾으셔서 가 볼게. 이 기간에 함부로 중앙 신전에 찾아오면 위험해.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잠깐…….”
잡을 틈도 없이 루스벨라는 멀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신성력을 사용하는 능력이 뛰어나 하늘 위로 날아가듯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문득 데니스는 제 얼굴이 어떠한지를 뒤늦게 살폈다.
“……흙.”
찐득한 진흙이 손바닥 위로 묻어났다. 옷은 깨끗해졌어도, 얼굴에는 여전히 흙이 묻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날 거지로 착각했구나.’
데니스는 허겁지겁 손등으로 얼굴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잘 닦이지 않았고 오히려 손만 더 더러워졌다.
“보답을 해야 하는데.”
보답은 핑계였다. 소녀의 따뜻한 신성력은 잊을 수 없는 축복이 되어 마음에 새겨졌다. 그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잔뜩 더러워진 낯으로 데니스는 소녀를 만난 순간을 잊지 않으려는 듯,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루스벨라와 길이 엇갈린 릴리안이 목격했다.
‘어머, 루시가 최초의 축복을 저 아이에게 내렸잖아?’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루스벨라의 따스한 친절에 매료된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소년의 발갛게 익은 얼굴을 보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소년은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