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응?’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방금 약혼하기 싫다고 한 상대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라니.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왜, 왜요?”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루스벨라는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다며 속으로 자기 자신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이거 좋은 신호 맞겠지?’
앞서 약혼을 먼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데니스의 일은 잊어버렸다. 그동안 그가 거절한 영애들 중에 그가 친구가 되자고 한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 나쁘지 않았다!
루스벨라가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다면 친구가 되자는 건 더 명확한 선을 긋자는 철벽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실낱같은 희망에 가능성을 거느라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니스는 부푼 마음을 펑 터트리는 발언을 했다.
“영애께서 다음 대 성녀님이 되실 유력한 후보라고 익히 들어 왔습니다. 저 또한 성기사 지망이니, 함께 수련하면서 친분을 쌓아 가고 싶습니다.”
“네?”
“저와 같은 성기사 지망생들은 보다 강한 신성력을 가진 상대와 싸워 보길 희망합니다. 그러니 역대 최강의 신성력을 가졌다 평가받는 영애와 수련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아, 네.”
데니스는 정말 순진무구했다. 그는 순수하게 루스벨라와 신성력으로 대련하며 연무장에서 같이 수련하며 땀방울을 흘리는 사이가 되고 싶은 듯했다.
‘아까 약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랑 말하는 글자 수부터 다르잖아.’
힘이 쭉 빠졌다. 데니스 데벤테르란 인간은 루스벨라 지펠론에게 아무 사심도 없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에게 있어 붙어 보고 싶은 아주 강한 신성력 덩어리에 불과한 것 같았다.
“네……. 그럼 나중에 날 잡아서 교단 중앙지부의 연무장에서 뵙죠.”
“감사합니다, 영애!”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미소 지었다. 프리지어가 만개한 것처럼 웃음꽃이 활짝 핀 그의 표정을 보자 좋으면서도 착잡했다.
‘아니야. 친구가 어디야.’
친구부터 차근차근히 시작하는 거다. 릴리안 고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반드시 저 철벽을 뛰어넘어 주겠다고 다짐하는 루스벨라였다.
***
데니스가 간 뒤, 루스벨라는 유모에게 달려갔다.
“유모! 내가 졌어!”
“네? 약혼자 되실 분과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유모랑 한 내기에서 내가 졌어.”
“어머나.”
“나,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데벤테르 후작 영식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아…….”
당차게 시작한 첫사랑이었지만, 막상 얼굴만 보고 반했다고 말하기에는 창피했다. 어머니께서 누누이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 인성과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래서야 면목이 없었다.
“축하드려요, 아가씨. 너무 좋은 소식인데요?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분이 생겼다는 게 제게는 가장 기쁜 일이에요.”
“유모……. 진짜 유모가 최고야.”
루스벨라는 제 편을 들어주는 유모에게 울먹거리며 폭 안겼다. 이미 루스벨라가 유모보다 키가 더 컸지만, 그녀는 유모에게 예전처럼 어리광부리며 안기길 좋아했다.
“흠, 이렇게 되면 제가 내기에서 이겼어도 보상을 다른 것으로 바꿔야겠네요. 아가씨의 마음에 든 분이 계시는데 다른 영식들과 데이트하라고 말하긴 어렵죠.”
“고마워, 유모!”
“약혼도 무사히 하실 테니 걱정할 거 없겠네요. 벌써부터 약혼식 준비로 마음이 들떠요. ……어머나? 아가씨?”
유모는 신나서 이야기하다가 그제야 루스벨라가 시커멓게 굳은 낯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봤다.
“아니야. 데벤테르 영식은 나랑 약혼하기 싫다고 했어.”
“아니, 어떤 새…… 같은 놈이 그런 말을 하죠?”
“내가 먼저 말한 게 아니라, 그쪽이 먼저 말하더라고……. 그런데 이상한 게 나랑은 또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예?”
이건 뭐 닭의 머리에 돼지의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고. 유모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약혼은 싫으면서 친구는 되고 싶다니. 그 영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했단 말인가?
“아가씨를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고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 내게 정중하고 상냥했거든.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어.”
모시는 아가씨의 뺨을 붉힌 설명에 유모는 잠시 그녀가 콩깍지를 써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아가씨의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 하며 믿었다.
“위기는 곧 기회지. 나, 꼭 데벤테르 후작 영식이랑 잘되어 보려고. 친구부터 시작해서 연인 관계가 되는 일이 없진 않잖아!”
“그렇죠. 릴리안 님께서도 그랬죠.”
“맞아. 그래서 희망을 가지려고! 약혼은 안 해도 내가 싫지 않은 거면, 시작은 나쁘지 않은 거잖아?”
긍정적 회로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루스벨라의 유모는 아가씨의 기대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았다. 약혼하지 않겠다고 말한 상대가 과연 함락당해 줄지부터가 걱정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귀여우신 분인데!’
유모는 데니스를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날 때부터 키워 온 루스벨라는 유모의 눈에 어느 영애보다도 더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러웠다. 누구도 이런 아가씨를 사랑하지 않고 못 배길 거라 생각했다.
“영식이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건 대련하고 싶어서래. 성기사 지망인 건 확실하고,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과 힘을 겨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 그래요?”
유모는 당황스러웠다. 이건 친구가 되자는 것을 빙자한 결투 요청이 아닌가? 그 잘난 후작 영식에게 루스벨라가 어떻게 보이는 건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신성력이 강해서 맞붙을 순간이 많은 건 다행이야. 무조건 내가 이길 테니 영식이 승부욕이 강하다면 많이 만나겠지. 난 그걸 노릴 거야.”
“그건 맞는 말이죠. 응원할게요, 아가씨!”
“응!”
다소 이상한 흐름으로 의욕이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유모는 루스벨라를 응원했다. 당장 내일부터 신성력 증강에 좋은 보양식을 차려 줄 생각이 만연했다.
“참, 유모. 그래서 내기에 이긴 보상은 뭘로 받고 싶어?”
“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아가씨의 사랑 문제가 더 먼저인 것 같아서요.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요.”
“에이. 보너스 필요하면 말해. 큼직한 보석을 달라고 해도 유모에게라면 줄 수 있으니까.”
루스벨라가 침대 위에 눕기 전 유모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유모 역시 루스벨라를 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전 아가씨께서 행복해지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에요.”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유모를 사랑해.”
루스벨라가 침대 위에 눕고, 유모가 불을 끄고 갔다. 어둠 속의 적막에서 루스벨라는 내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릴리안 고모님을 찾아가야겠어.’
그분께 친구와 연인이 되는 단계를 어떻게 밟아 갔는지 낱낱이 파헤칠 거다.
그날 밤, 루스벨라는 행복한 꿈을 꿨다. 데니스에게서 청혼받는 꿈이었다. 홍옥이 박힌 반지를 받고 루스벨라는 기뻐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좋았다.
그런데 반지를 끼우려는 순간, 데니스의 얼굴이 무표정해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제 얼굴만 좋아하셔서 결혼하시는 분은 사양합니다.]
“아. 안 돼!”
달콤했던 꿈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어 깨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깬 루스벨라는 멍해졌다.
“꿈은…… 반대라고 했어. 난 절대 포기 안 해.”
루스벨라는 기운차게 일어나서 릴리안을 보러 갈 채비를 마쳤다. 릴리안이 좋아하는 다과를 실은 마차가 천천히 이동했다.
‘할 수 있다, 루스벨라 지펠론!’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고 했다. 루스벨라는 릴리안과 더불어 그 산증인이 되리라 단단히 결심했다.
***
“이상하지는 않았을까.”
루스벨라가 첫눈에 반한 사랑으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을 들쑤신 데니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뭐가요. 약혼도 거절하고 나오신 분이 퍽이나 안 이상하겠습니다.”
“너 그렇게 못되게 굴래?”
“보좌관으로서 당연히 올려야 할 말이었습니다만.”
데니스의 보좌관이자 오랜 친구인 제이크가 깐족거렸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같은 약혼을 걷어차고 온 데니스가 바보 같아서였다.
“도련님, 그분 좋아하시잖아요. 그것도 오랫동안 혼자서 몰래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요.”
“알면 내 편 들어줘야지, 너는.”
“이해가 안 되니까 그렇죠. 저 같으면 내가 멀리서 좋아하기만 했던 상대와 약혼한다고 하면 바로 받아들여요.”
“부모님끼리만 상의해서 맺어지는 거잖아.”
“뭐 어떻습니까? 결과가 좋으면 됐지.”
“나는 싫어.”
데니스가 루스벨라와의 약혼을 거절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와 정략적으로 맺어지는 게 싫었다.
‘그러려고 키운 연심이 아니란 말이야.’
적어도 당당하게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노라 고백하고 연애 감정으로 이루어진 사이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약혼하러 가라고 통보받고 가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친구부터…… 시작할 거야. 그편이 영애께도 더 거부감이 덜하시겠지.”
“글쎄요. 그분도 도련님 얼굴을 본 순간 그동안 독신주의를 고집하셨던 걸 잊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펠론 영애는 그러실 분이 아니야! 무, 물론 얼굴도 좋아하시길 바라서 잘 가꿔 놓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시길 원해.”
“아, 네.”
제이크는 더 이상 말하는 걸 포기했다. 이 지나치게 잘생기고 순진한 도련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약혼 거절한 것만 봐도 그쪽이 엄청 싫어할 수도 있겠구만.’
심지어 이유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거절했다니. 레이디의 명예를 잘근잘근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제이크는 제발 저 순진한 도련님이 상처받을 일은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어떻게 자연스러운 연애를 하시려고요?”
“우선 가장 좋은 핑계인 대련으로 접근을…….”
“아오, 이 바보 도련님아!”
제이크는 자기 가슴팍을 퍽퍽 쳤다. 도련님의 순탄한 연애는 벌써부터 힘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