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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62화 (162/166)
  • 162화

    ‘무슨 사람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생겼담?!’

    가까이서 본 데니스 데벤테르는 소문이 헛되지 않았음을 얼굴로 증명하고 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티 없이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까지.

    데벤테르 후작가에 기를 쓰고 얼굴을 비치려는 영애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영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니에요.”

    ‘저, 정신 차리자! 루스벨라 지펠론!’

    루스벨라는 데니스에게 약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설득을 할 계획을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저 선이 고운 젊은 귀족 영식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미인계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었다!

    ‘저 얼굴에 휘말리면 안 돼!’

    설득을 하기 위해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게 기본이거늘, 루스벨라는 당황스러움에 그것도 잊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다.

    ‘왜 저러지?’

    “영애,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계속 제 눈을 피하시죠? 제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으아악! 으아아악!’

    의아해진 데니스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루스벨라는 미칠 것 같았다.

    ‘이 인간은 왜 몸에서 나는 향기도 좋은 거야!’

    향기로운 인간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존재감은 무시무시했다. 루스벨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똑바로 들어 데니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왜 계속 저를 피하십니까?”

    “제가 영식을 처음 만나 부끄러워 그런가 봅니다.”

    ‘그쪽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그렇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겠다고!’

    머리와 입이 따로 놀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침착하게 제 상태를 핑계를 대는 대답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평정을 가장한 낯의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응시했다.

    “그렇습니까?”

    “네. 한 번도 뵙지 않은 분을 약혼 상대로 마주하려니 많이 긴장했나 봐요.”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부모님께 들은 영애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만……. 알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뭐야. 나에 대해서 뭐라고 들은 건데?

    루스벨라는 본연의 목적도 잊고 데니스를 채근하고 싶어졌다. 그의 어깨를 붙들고 누가 허튼소리를 했거든 그건 다 거짓부렁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좋은 모습! 좋은 모습!’

    쿵쿵 뛰는 심장이 제멋대로 그녀에게 차분한 숙녀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은 루스벨라에게 약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닿지 않았다.

    데니스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실은 영애를 만나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라니.

    “그게 무엇인가요?”

    그게 뭐든 간에 루스벨라는 들어주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한 말에 자신을 마주친 적이 있나 하고 기대했다.

    무관심한 상대에게는 물을 것이 없었으므로, 루스벨라는 그녀의 생각이 퍽 타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굴러갔다. 아니, 어쩌면 원래 이렇게 가야 옳았을지도 모른다.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영애와 약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지?

    누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루스벨라는 얼어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데니스가 꺼낸 주제는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울고 싶어졌다.

    “영애께는 대단히 실례지만, 이 약혼이 성사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요?”

    “예?”

    “왜 저랑 약혼하고 싶지 않으신데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아니요, 영애.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면 제게 왜 이렇게 매몰차게 약혼을 거절하고 싶다고 말하세요? 신에게 한평생을 바치고 싶어서요?”

    ‘아, 최악이다.’

    기어코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창피했다. 루스벨라 지펠론은 데니스를 만나러 갔다가 쫓겨나는 영애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건만, 이해하고 말았다.

    최악이었다. 루스벨라의 드높은 자존감이 우르르 무너졌다.

    ‘잘난 얼굴에 홀려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당연히 그가 이상하게 보리라고 생각했다. 데니스라는 인간의 전적만 봐도 답이 나왔다.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할 소리가 무서웠다. 그런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스워서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절대 아닙니다, 영애. 영애에게 흠결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이는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데니스는 잔뜩 당황하여 루스벨라를 달래려 했다. 친밀한 관계도 아닌 사이여서 차마 어깨 위를 토닥거리지는 못하고 루스벨라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그저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 영애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으십니다.”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역시 성기사가 되기 위한 일 때문인가요?”

    에둘러 물은 질문이었다. 차마 본인에게 평생 신만 바라보며 사는 정결한 성기사로 남을 거냐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데니스가 경멸할 것 같아서,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막았다.

    “꼭 대답해야 하나요?”

    “저는 듣고 싶어요.”

    데니스는 퍽 곤란한 눈치였다. 오늘 처음 만나 약혼할 수도 있는 상대가 맹랑하게 평생 결혼 안 할 거냐고 물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맙소사. 안 돼!’

    저 외모는 대대손손 물려줘야 마땅한 거 아니야? 어떻게 저런 인간은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 건지! 고리타분한 옛날 옛적 교리를 따라 미혼으로 남으려 하다니!

    오만 가지 생각이 루스벨라의 머리를 휩쓸고 갔다. 이젠 약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결심 따위는 휴짓조각이 되어 버려졌다.

    ‘이 사람은 잡아야 한다!’

    알 수 없는 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루스벨라의 유모가 들었다면 ‘아가씨, 제가 뭐랬어요?’라고 할 게 뻔했다.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우리의 약혼과 성기사가 되려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루스벨라였다. 그녀는 데니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얼굴도 취향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거절당하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이유라도 알아야겠다!’

    그게 지금 루스벨라가 맹렬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데니스의 답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안 되는 거죠?”

    “누구에게나 말하기 힘든 비밀이 있는 법이죠. 제겐 이 일이 그러합니다. 죄송하지만 더는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단호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더는 무어라 말을 걸 수 없었다. 초면인 상대고, 약혼을 하고 싶지 않으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밀은 핑계고, 사실은 그동안 쫓아냈던 다른 영애들과 나도 다를 거 없어서일지도 몰라.’

    데니스의 얼굴을 보고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았다.

    ‘뭐 하는 거야……. 실례되게. 저 사람은 내게 아무 감정도 없을 텐데 괜한 설레발이나 치면서 곤란하게 만들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루스벨라는 의기소침해져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는 아직 식지 않았다.

    “영식의 뜻이 그러하다면, 알겠습니다. 양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잡힌 약혼이지만, 서로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들어주실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잘됐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데니스를 보자 심장께가 찌르르 아팠다. 조금 속상했다.

    ‘성기사를 지망한다면 내가 성녀가 되었을 때 많이 마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사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친구 사이를 넘어선 관계가. 친구도 뭣도 아닌 지금 관계에선 꿈도 못 꿀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마저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일찍 간다면 부모님들의 의심을 살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 그렇지 않아도 차향이 향긋하여 그냥 떠나기는 아쉬웠던 참입니다.”

    루스벨라의 제안이 합리적이라 여겼는지, 데니스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새겨진 찻잔을 든 그는 소꿉놀이용 도자기 인형이 사람이 된 것처럼 아름다웠다.

    새콤달콤한 차향이 오늘따라 더 크게 의식되었다. 루스벨라는 찻잔 안의 찻물이 줄어들 때마다 조금만 더 느리게 줄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야속한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차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영애.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제가 저희 부모님께는 잘 말씀드릴게요. 담소를 나눌 만큼 시간은 지났으니까,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어서 가 보세요.”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루스벨라는 평소에도 독신에 대한 뜻을 간간이 내비쳤다. 약혼을 맺으려는 시도가 허사가 되어도 부모님은 그러려니 하면서 다른 상대를 물색해 볼 것이다.

    ‘싫다.’

    물론 루스벨라의 부모님은 그녀의 행복이 최우선이니 결국 딸의 의지에 못 이겨 항복을 외칠 것이다. 하지만 데니스를 만난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잡을 길이 없어.’

    붙잡으면 질척거리는 여자가 될 것 같아서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니스가 말했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네?”

    순간 울컥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그녀를 약 올리는 건가 싶어 살짝 화가 났다.

    “그렇지만 여쭤보고 싶은 건 있습니다.”

    “뭔가요?”

    질문을 건넨다는 건 상대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있다는 증거였다. 아까까지 울적했던 건 잊어버린 루스벨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저와 친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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