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외전 3. if 외전-있었더라면 좋았을 세계
“루시, 네 약혼자가 정해졌단다.”
푸흡. 새콤달콤한 유자청을 탄 차를 마시던 루스벨라가 작게 쿨럭거렸다.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는 입도 대기 전인데, 먹기 전에 체할 것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약혼자라니!’
지펠론 백작가의 장녀이자 유력한 다음 대 성녀 후보인 루스벨라 지펠론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고작 파릇파릇한 열여덟이었다. 벌써부터 약혼자를 들여 결혼을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나이 또래들은 이미 다 약혼자가 있지 않니.”
“그게 뭐 어때서요? 전 싫어요! 가문에서 정해 주는 사람과 억지로 약혼하긴 싫어요.”
먹지 못한 딸기 케이크가 아까웠지만, 루스벨라는 잔뜩 심통이 나서 티 테이블을 박차고 나섰다. 씩씩대며 걸어가는 딸을 어머니는 조용히 말로 붙잡았다.
“그래? 하는 수 없구나. ‘그’ 데벤테르 후작가의 첫째 도련님이 네 약혼자가 될 기회를 마다한다니.”
“……네? 누구요?”
루스벨라가 멈칫했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데니스 데벤테르가 네 약혼자로 낙점되었다고 말했단다. 흠, 정말 좋은 혼처지만 아쉽게도 네가 싫다니 거절을 해야…….”
“자, 잠깐만요!”
곧바로 통신용 아티펙트를 꺼내서 약혼을 무르려는 어머니께 달려간 루스벨라가 외쳤다.
“할게요! 약혼! 하게 해 주세요!”
***
‘설마 그 데니스 데벤테르가 내 약혼자가 될 줄이야!’
루스벨라는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봄을 옮긴 듯한 화사한 옷차림 위로 회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데니스 데벤테르가 어떤 인물이던가. 부유한 데벤테르 후작가의 외동아들이자, 외모와 검술 실력, 지성까지 타고났다. 고만고만한 영식들 중 가장 빼어난 소년이었다.
부모인 후작 부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한 데니스는 그야말로 사교계의 별이었다.
따스한 봄볕 같은 금발에 피죤블러드처럼 영롱한 적안, 그리고 요정처럼 아름다운 외모. 이것만 해도 꼬이는 사람이 엄청났는데, 거기에 명석한 데다 황태자와도 친분이 있으니 단연 빛나는 신랑감이라 할 수 있었다.
황태자인 베네딕트를 제외하면 현재 딸을 가진 귀족 가문에서는 가장 환영할 혼처였다. 그와 또래 나이의 영애들은 데벤테르 후작가에서 열리는 연회에 한 번이라도 더 참석하여 눈도장을 찍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수작은 전부 데니스가 쳐 냈다.
‘이유가 기가 막혔지.’
“저는 신의 은혜를 입은 몸이니, 누구와도 교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의 심장은 신을 위해 바쳤습니다.”
섬세한 유리 인형 같은 데니스가 정결한 신관처럼 이 말을 하면 어떤 영애도 간 크게 떼를 쓰면서 만나 달라고 요청할 수 없었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집에 가서야 아차 하는 것이다.
“신을 위해 사는 사람과 약혼을 했다, 라…….”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루스벨라로서는 반기는 바였다.
‘나 또한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
성녀라고 해서 독신으로 살 의무는 없었다. 신성력 보유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이 제정되고 나서부터는 성녀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신을 위시한 선택은 또 아니었다. 루스벨라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마음에 드는 영식이 없잖아!’
그랬다. 곧 성녀가 될 루스벨라 지펠론은 심미안이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데니스 데벤테르가 그렇게 잘생겼나?”
그래서 궁금했다. 그쪽도 이 약혼이 달갑지는 않을 테니, 그 잘난 미모 구경 좀 하고 싶다고.
***
얼마 후 지펠론 백작가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아가씨, 아가씨! 데벤테르 가의 도련님께서 오셨대요.”
“알아, 유모.”
“아가씨의 약혼자가 될 분이 오셨다고요! 세상에나!”
“나보다 유모가 더 신난 거 같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루스벨라와 다르게 유모는 제 약혼인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님께서 잔뜩 벼르고 별러 고른 영식이시잖아요. 아가씨의 높은 눈을 만족시켜 주실 분을 구한 거라고요!”
“유모, 지금 나 욕하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드디어 남편 될 분을 찾은 거 같아 기쁜걸요.”
유모가 재잘재잘 노래하는 종달새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게, 루스벨라는 그동안 다음 대의 성녀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갈고닦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가문을 이을 소백작으로서의 업무까지 욕심냈고.’
일, 일, 일. 그녀의 관심은 온통 일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욕심만큼 얻기 위해서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른 영식들과의 만남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루스벨라의 친구들이 약혼자를 맞이하고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는 반면에 그녀는 혼자였다.
이런 딸을 부모님은 몹시 걱정하셨다.
‘가문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선 든든한 배우자와 후계자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분들이시니.’
루스벨라는 유모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하는 내내 미간을 찡그렸다. 부모님의 사이가 좋아 그리 생각하는 건 이해한다만, 자신에게까지 권하지는 말았으면 싶은 게 사실이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나비 모양 장식이 회색빛 머리카락에 꽂힐 때였다.
“유모도 내가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네?”
“지금도 난 부족할 게 없잖아. 재력 면에서야 데벤테르 후작가가 우리 가문보다 훨씬 압도적이지만. 그것만 빼면 아쉬울 건 없어.”
그 말대로였다. 루스벨라 지펠론은 가진 것이 많았다.
화목한 가정. 귀여운 동생들. 아주 부유하지는 않지만 제법 내실이 다져진 백작가라는 배경.
‘그리고 날 사랑해 주는 유모와 친한 친구들에, 강력한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능력까지.’
이 정도면 혼자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게 루스벨라의 바람이었다.
‘난 릴리안 고모님을 닮고 싶어.’
전대 성녀인 릴리안은 정말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독신으로 살았다. 릴리안이 성녀로서 떨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점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릴리안의 자유로움을 곁에서 직접 지켜본 루스벨라로서는 그것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안 하면 사교계에서 이상하게 보는 거 알아. 하지만 난 릴리안 고모님처럼 한눈에 반한 사람도 없는걸.”
“어머, 아가씨는 운명적인 사랑을 바라고 계셨나요?”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내가 결혼하고 싶은 인물을 못 만나 봤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해서.”
귀족은 어릴 때부터 결혼 상대자를 물색한다. 친분이 있는 가문이거나 같은 파벌에 속하는 가문끼리 엮이는 게 제일 좋았다.
루스벨라 역시 그런 식으로 자주 다른 가문의 티 파티나 무도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지만, 늘 따분함만 느끼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결 좋은 회색 머리카락을 꼼꼼히 빗어 땋아 준 뒤 유모가 말했다.
“아직 만나 보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죠.”
“난 벌써 열여덟이야, 유모.”
“열여덟밖에 되지 않으셨죠. 아가씨가 진심으로 사랑할 상대를 찾기에는 짧은 시간이에요. 어쩌면 오늘 만나 뵐 데벤테르 후작 영식께서 그 상대일지도 모를 일이고요.”
“에이, 설마 그러겠어?”
“인생은 모르는 일들의 연속이랍니다, 아가씨.”
‘유모는 내 편만 들어줄 줄 알았는데!’
루스벨라는 조금 심통이 났다. 유모마저 제 어머니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고서 데벤테르 후작 영식을 잘 봐달라고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로를 성기사로 택할 가능성이 높은 인간에게 무슨.’
심지어 신에게만 반응하는 심장을 가진 위인이 루스벨라를 보고 구애할 확률은 적었다. 그동안 숱하게 차인 영애들 속에 루스벨라마저 끼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다지 엮이긴 싫었다!
‘잘생긴 얼굴이야 보고 싶다지만 그건 별개고!’
그래서 루스벨라는 유모에게 제안했다.
“흥. 내기라도 걸어 볼까?”
“내기요?”
“응. 내기. 내가 그 데벤테르 후작 영식과 무사히 약혼을 이어 갈지, 아니면 파혼할지 말이야.”
가문과 가문 사이에 엮인 약혼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깨지는 게 약혼 관계였다.
‘저쪽도 날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게 뻔해. 분명 부모님에 의해 겨우 받아들여서 오늘 온 거겠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금발의 소년이 지을 표정은 쉽게 그려졌다. 지루해하고 따분해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어때? 내기 상품은 서로가 원하는 걸 걸어 주기로. 단, 들어줄 수 있는 범위에서!”
루스벨라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 영식을 설득해서 약혼을 파기할 생각이 만만했다.
‘유모가 내기를 들어 주려나?’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유모는 흔쾌히 모시는 아가씨의 청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아가씨. 대신 무르기 없기에요?”
“나야말로. 내가 이기면 유모한테, 어머니께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내 편 들어달라고 할 거야.”
유모는 어머니가 지펠론 백작가로 시집올 때 따라온 친구 같은 시녀였다. 유모의 간곡한 요청이라면 어머니도 재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아가씨께 한 번이라도 좋으니 또래 영식들과의 만남을 가져 달라고 요청할게요.”
“으윽. 무조건 이겨야겠는데.”
“항상 내기에서는 아가씨가 이기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죠.”
유모는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루스벨라의 드레스 차림을 점검해 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소녀가 거울 속에 보였다.
“그럼, 가 보자고.”
온몸에 단단히 기합을 넣고 성큼성큼 걸어간 루스벨라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지펠론 영애.”
‘와…….’
그곳에는 천사 같은 소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루스벨라는 소년을 보자마자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