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이렇게 작고 귀여운 영혼이 아슬란 윈체스터라니.”
루스벨라의 깜짝 놀란 목소리에 아슬란은 다시 살아나는 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창피했다. 다가갈 수 없어 마음을 접었다지만, 아직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려니 속상했다.
아슬란이 마리아의 옆에 찰싹 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마리아가 그를 손가락 끝으로 떼어 루스벨라의 앞에 대령했다.
[이야기를 해야지, 후손 씨. 살려는 의지를 고취하려고 여기까지 내가 데려왔잖아.]
낄낄 웃는 마리아의 웃음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루스벨라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 사람, 아니 두 영혼을 멀뚱히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구경거리가 되고자 온 거 아닙니다.”
[누가 뭐래? 나도 널 구경거리로 전락시킬 생각 전혀 없어. 누차 이야기하지만, 난 널 살리려고 온 거야.]
“그런데 왜 제게 이런 수치를 주시는 겁니까.”
[수치? 고작 이런 걸로 수치라고 하기엔 너무 귀여운데. 간절함이 아직 덜한가 봐?]
얄밉게 덧붙이는 말에 욱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영혼 상태에서는 그가 압도적으로 불리했으므로, 화를 겨우 삭이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루스벨라를 만나는 게 제가 살 수 있는 방법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음, 그건 전적으로 너한테 달린 문제라 나는 모르는데.]
뭐라고?
“그런 걸 왜 이제 말씀하십니까?”
[왜.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허.”
아슬란은 기가 막혔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기 주먹만 한 영혼 크기로 마리아에게 항의해 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었다.
“됐습니다……. 힌트라도 주시죠.”
[정말 몰라. 사람마다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건 다르니까.]
“…….”
[그나마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게, 네 어머니나 성녀 쪽이라고 생각했다. 네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만한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맞는 말이라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심지어 아슬란은 제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도 당장 살아야겠다는 결심만 세웠을 뿐, 적극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루스벨라에게 데리고 올 생각을.’
그녀 앞에 이런 꼴로 오다니. 쥐구멍을 찾아 숨고만 싶었다. 그리고 데니스에게도 폐가 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슬란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서 제 도움이 필요한 거로군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루스벨라는 아슬란이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이자 먼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자리가 불편한 아슬란 대신 마리아가 대신 답했다.
[맞아. 이 녀석의 육신이 갈가리 찢어진 바람에 고쳐야 하거든. 영혼이야 우리가 데리고 있어서 멀쩡한데, 혼이 다시 육신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의지가 필요해서.]
“……아슬란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어디에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살아 있겠다 싶었는데, 나타나질 않으니까요.”
[걱정했어? 아슬란을?]
루스벨라의 말에 마리아가 대뜸 그리 묻자, 아슬란은 몸을 움찔했다.
“왜 그런 질문을……!”
원래의 육신만 있었어도 마리아의 멱살을 잡아챘을지도 몰랐다.
‘답이 뻔하잖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비참해질 게 뻔했으니까. 루스벨라 데벤테르는 아슬란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았다. 무관심에 가까웠다. 그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오점과 같았으므로.
그런데 나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걱정했죠.”
[호오?]
“인간적인 도리로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도 우리와 같이 아벨을 잡으려 한 조력자인데, 동료로서 걱정은 해야지요.”
[그렇군. 아주 깔끔하네. 공과 사의 구분을 철저히 하고 있어.]
마리아가 슬쩍 아슬란을 향해 눈짓하며 말하자, 아슬란은 제 속내를 읽힌 것 같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부끄럽다.’
아주 잠깐이나마 루스벨라의 걱정했다는 말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녀가 얼마나 데니스를 사랑하는지, 또 힘겹게 엮였는지도 다 알고 있으면서 감히 그런 생각을 품었다.
“실종되어서 계속 나타나지 않아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어 다행이군요. 한시름 덜었어요.”
[황제가 그 건으로 너와 네 남편을 귀찮게 하나?]
“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아슬란의 빈자리를 저와 데니스로 채워 넣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까요.”
루스벨라의 사심 없는 목소리를 듣자 아슬란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정말 공적인 사안으로만 아슬란의 실종을 대하고 있었다.
‘무얼 기대한 거냐, 아슬란 윈체스터.’
마리아가 그를 이곳에 데려왔다고 해서, 뭔가 따뜻한 말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지. 욕심인 줄 알면서도 기어이 상냥한 말을 듣고 싶었다는 것인지.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루스벨라. 당신에게 폐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마리아가 나를 이곳에 갑자기 데려와서 나도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슬란은 마음 깊은 곳에 창피함을 꾹꾹 눌러 두고 루스벨라의 앞에 나서 사과했다.
‘내가 여기 와서 싫겠지.’
“금방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슬란은 재빨리 마리아의 옆구리를 찔러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루스벨라가 그를 보고 불쾌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본다면 틀림없이 연약해진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다시 살아날 수도 없을 터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루스벨라가 조용히 아슬란에게 말했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갈 필요는 없어요.”
“……예?”
“그날 우리를 구해 주려고 한 게 당신이란 걸 알아요. 내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속죄하고 싶은 것도 알고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포기하려 들지는 말아요. 난 당신을 한때 정말 사랑했고, 죽을 만큼 증오했지만, 당신이 죽기를 바라진 않아요.”
또렷한 푸른색의 눈동자는 담담했다. 그 속에는 아슬란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무관심이 아닌, 연민이 차 있었다.
“당신의 어머니, 선대 윈체스터 공작부인은 이미 만나고 온 것 같군요. 그분이 당신을 몹시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대로 영영 사라진다면 아까워할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그 사람들 곁에 다시 설 자격이 있겠습니까.”
의무와 책임감으로만 채워 넣은 공허한 마음에 루스벨라의 말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분명 미리 북부를 살피고 왔음에도 그녀의 말이 더 확 와닿는 것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이제는 닿을 수 없이 멀어진 상대에게 받는 인정이 너무나 달콤하고 씁쓸해서 행복하고 괴로웠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당신은 북부의 사람들에겐 훌륭한 지도자였고, 믿음직한 공작님이었어요. 제가 당신의 자격을 운운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죠. 폐하께서도 당신이 돌아와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당에.”
“그렇……습니까.”
영혼이라 눈물이 날 리 없을 텐데. 울고 싶어졌다.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속에는 어떤 사심도 없었다. 루스벨라는 아슬란이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를 논하고 있었다.
그녀의 증오는 아슬란과 아군이 되면서 잠시 누그러졌을 뿐,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있어 끊어진 인연이었다.
“난 당신이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깝게 죽지 않으면 좋겠어요.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라를 안정시킬 일손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법이고, 당신은 폐하를 도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신뢰는 깨졌지만, 얄팍하게나마 아군으로 에덴을 무찔렀던 기억이 가느다란 끈이 되어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있었다.
‘아마 이 만남을 끝으로 다신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가 이 세상에 남아 주기를 원한다고 말해 주어서.
“알겠습니다. 반드시 복귀하여 그리하겠습니다.”
책임감으로만 꾸역꾸역 메꿔 둔 마음에 애달픈 연모가 흘러 빈 공간을 채웠다. 따끔따끔한 후회가, 그럼에도 아직도 멈출 수 없는 사랑이 뒤섞여 그가 살기를 종용했다.
[오, 조건을 채웠나 보군. 나도 이제 돌아가서 편히 쉴 수 있겠어.]
마리아의 말을 듣자, 아슬란은 제 주위로 찬란한 황금빛의 실들이 올라와 그를 감싸는 것을 목격했다.
‘따뜻해.’
황금빛 실들은 아슬란을 마치 고치처럼 감쌌다. 요람에 들어가는 것처럼 고치는 포근했다. 완전히 시야가 실로 가려지기 전에, 루스벨라가 희미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잘됐군요.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요.”
‘아.’
그녀가 그를 보고 웃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서 다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루스벨라와 아슬란이 약혼했던 시절에는 쉽게 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때의 그는 그녀에게 무심해 자신에게 지어 준 미소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저 웃음이 얼마나 귀하고 보기 힘든 것인지를 아니 웃으면서 울고 싶었다.
[녀석. 사랑하는 여인 앞에 데려가니 바로 살고 싶어지는구나. 네 어미가 슬퍼할 것이다.]
마리아는 기뻐하는 아슬란을 보며 혀를 쯧쯧 차더니 곧 물에 녹아 사라지는 설탕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비로소 오랜 삶을 마치고 안식에 들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괴로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 상대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제게 주어진 삶을 가치 있게 쓰고 싶어졌다.
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이 시대를 끝까지 살아가고 싶어졌다.
‘사랑합니다.’
시야가 점점 암전되었다. 지나치게 가벼운 영혼의 무게가, 다시금 무거운 육신의 무게로 변해 가는 게 느껴졌다.
[살아가거라. 인간으로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업보의 힘을 타고난 아이야, 네 후회를 잊지 말고 주어진 삶을 다 살아가거라.]
꿈결처럼 셀레누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잠이 왔다. 눈을 뜨면 다시 그는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랑합니다, 루스벨라.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이 마음을 영영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외전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