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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59화 (159/166)
  • 159화

    마리아의 말에 아슬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없어도 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북부의 단단한 성벽보다 튼튼해 보였던 어머니는 아슬란의 실종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슬퍼했다.

    ‘눈가가 붉으시다.’

    선대 공작부인이 하이에나처럼 모여든 방계 친척들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아슬란은 어머니의 미처 추스르지 못한 슬픔을 잡아낼 수 있었다.

    화장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울어서 벌건 눈가를 숨길 수는 없었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방계 친척들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아들인 그는 알 수 있었다.

    “당장 나와 내 아들의 성에서 나가시오! 불복할 시 매질해서라도 당신들을 쫓아내겠소.”

    “히익!”

    “이, 이 일은 잊지 않겠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방계 친척들은 입만 살아서는, 걸음아 나 살려라, 잽싸게 앞다투어 도망쳤다. 화려하고 안락하던 손님방은 금세 비어 허전해졌다.

    “허…….”

    “마님! 괜찮으십니까!”

    선대 공작부인은 귀찮은 피라미들을 몰아내자마자 긴장이 풀려 바닥 위로 주저앉았다. 시녀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다.”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며칠 내내 아무것도 못 드시고 불안해하셨지 않습니까.”

    “이까짓 수모 따위야 아슬란만 돌아온다면 참을 수 있다. 몸이 쇠약해진 것은 나의 불찰이니 개선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몸을 잘 챙기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뺨이 홀쭉해지셨어요. 이러다 마님께서도 큰일이 날까 두렵습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시녀들의 말대로, 선대 공작부인의 몸은 연약해져 있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후들거리는 몸이 눈에 밟혀 떨어지지 않았다.

    “아슬란, 그 아이가 제발 살아서 나타나기만 하면 좋으련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어머니의 모습에 아슬란은 있지도 않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슬란을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괜찮은 줄만 알았던 카밀리아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두 손을 묻고 흐느끼자 시녀들이 서둘러 잠자리로 안내했다.

    “쉬세요, 마님.”

    “공작님은 꼭 발견되실 거예요. 이 북부에서 가장 강한 분이시잖아요. 저희가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 머지않아 돌아오실 거예요.”

    시녀들은 선대 공작부인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카밀리아는 기운이 다 빠졌는지 몇 분을 더 눈물을 흘리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

    [어때. 이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이 나와?]

    마리아가 영혼뿐인 몸을 가볍게 날려 공중에서 아슬란의 머리를 톡톡 쳤다.

    “……돌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네 어머니가 슬퍼하시니까? 네가 아꼈던 북부가 위태로워서?]

    “그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의무와 책임만으로 대답하는 거잖아, 지금. 진심은 사실 별로 들어가지 않았지?]

    “그건…….”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아슬란은 마리아의 말처럼, 그의 삶을 끌어왔던 동력인 책임감만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겁니까?”

    [안 되지.]

    마리아가 아슬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미 찢어진 육체를 소생시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자비인 줄을 모르는구나, 꼬맹아. 너는 영혼이 분리되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의 고통을 몰라.]

    알 턱이 없었다. 아슬란 윈체스터는 살아생전 피식자의 입장에 선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고, 포식자였으며, 약한 이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있지. 아주 큰 상관이. 육신을 잃은 영혼은 다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책임감에서 비롯된 삶의 의지 또한 욕망 아닙니까?”

    [다르지, 그건. 너야말로 정말 단언할 수 있니? 네가 정말 살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말이야.]

    아슬란은 마치 얄미운 고양이처럼 신경을 건드리는 마리아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반박할 수는 있나?’

    하지만 막상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끝내 대꾸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침묵하는 아슬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거봐. 못 하지.]

    “……어차피 신께서 저를 살려 주겠다 약조한 이상, 저는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살 수 있다고 했지, 그게 언제라고는 밝히지 않았지. 내가 왜 너를 끌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네 텅 빈 마음에 살고 싶다는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서지.]

    “그렇습니까.”

    모르겠다. 아슬란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미아처럼 마리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책임감만으로는 안 된다는 건가?’

    어머니의 슬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광경을 바란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라는 존재 하나가 사라져도 괜찮을 거란 확신이 있어 편히 잠들고 싶었을 뿐인데,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는 인생을 헛산 걸까?’

    강하다고 생각했던 아슬란 윈체스터는 그저 허상과 같이 느껴졌다. 푸른색으로 타오르는 자그마한 불꽃. 그 형태가 진실한 아슬란의 정체성 같았다.

    언제든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꺼져 버릴 작은 불꽃. 강한 척했으나 실은 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

    “모르겠습니다.”

    루스벨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에게 절대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그의 뇌리를 쓸고 지나갔다.

    “알려 주십시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오. 이제야 좀 의욕이 났어?]

    “당신의 말에 따르면 그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졌습니다.”

    마리아의 말이 옳았다. 아슬란을 기다리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북부의 차가운 성에서 남아 있었다.

    ‘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해.’

    그것만큼은 아슬란에게 있어 진심이었다. 그가 미숙한 지도자였건, 껍데기만 멀쩡한 인간이었건 간에 남겨진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망설이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진심이 담긴 요청에 마리아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너도 결국 그 사람의 후손이라 그런지 벽창호인 건 똑같구나.]

    마리아는 아마도 아슬란의 선조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던 자를 떠올리며 아슬란과 겹쳐 보고 있는 듯했다. 아슬란은 잠자코 마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좋아. 어떤 결심을 했건 간에 조건을 충족시킬 마음이 들었다니 다행인 일이지. 그렇다면 네가 정말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겠구나.]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

    이미 어머니를 만난 터였다. 아슬란은 외동이라 다른 직계 가족이 없었다. 그의 일생에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깐죽거리는 다니엘 크렌베르는 삶의 의욕을 불태워 주기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눈치챘군.]

    마리아는 아슬란이 싫다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긴……!”

    [데벤테르 공작저지. 네가 몸을 던져 살리려 했던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살고 있는 곳.]

    아슬란이 기가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정확히 짚자면 여긴 수도의 데벤테르 공작저가 아니라, 리스냐의 아름다운 성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아벨이 던진 신성력 폭탄에 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을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마리아가 그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겠답시고 이동할 때도 그들을 차마 떠올릴 수 없었다.

    ‘난 그 두 사람에게는 걸림돌이니까.’

    아슬란 윈체스터가 살아 있는 한, 루스벨라는 이미 사라진 시간대에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상기할 것이다. 또한 데니스 역시 아슬란을 눈썹에 낀 눈곱처럼 거슬리게 여기고 있으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초대받지도 않은 불청객 노릇은 사양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아까 남은 이들을 지켜 줘야 한다는 결심은 눈처럼 녹았나?]

    도망치려는 아슬란을 붙잡은 마리아가 그를 데리고 어느 아담한 방으로 향했다.

    햇살이 가장 잘 비치고 온도와 습도를 아티펙트로 맞춰 쾌적함을 즐길 수 있는 방에는 은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깃펜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루스벨라였다.

    “거기 누구 있나요?”

    그녀는 편지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녀를 부를 수 있는 설렁줄은 건드리지 않았다.

    [역시 성녀의 존재는 다르다 이건가. 우리가 보이는군.]

    “누구시죠?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떠돌아다니는 영혼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스벨라의 발밑에서 환한 금빛의 쇠사슬이 튀어나와 마리아와 아슬란의 영혼을 붙잡으려 했다.

    [잠깐! 잠깐!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죠?”

    신성력을 가득 담은 금빛의 쇠사슬이 두 영혼을 낚아채려던 때, 마리아가 다급하게 셀레누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셀레누스, 셀레누스 님의 자비를 빌어 네게 한 사람을 도와달라 청하기 위해 왔어.]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죠?”

    셀레누스의 이름이 나오자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의 루스벨라였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그녀에게 마리아가 그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야. 마리아. 아슬란 윈체스터의 머릿속에 의탁했던 그의 먼 선조.]

    “진짜 마리아라고요? 당신은 아벨이 죽었을 때 성불한 게 아니었나요?”

    [뭐, 그럴 수 있었는데……. 가엾은 후손 씨의 부활은 돕고 가려고 해서.]

    “후손? 설마…….”

    루스벨라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그녀는 곧바로 마리아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더니, 그녀의 옆에 엉거주춤 붙어 있는 파란 영혼을 봤다.

    “세상에, 설마 이 작은 영혼이 아슬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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