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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58화 (158/166)
  • 158화

    ***

    마리아를 따라나서니 곧 아슬란이 보던 익숙한 풍경이 나왔다.

    ‘북부구나.’

    하얗고 차가운 눈과 얼음이 가득한 북부, 그곳이 마리아가 영혼 상태의 아슬란을 데리고 온 첫 장소였다.

    ‘누굴 만나려는 걸까?’

    마리아와 아슬란은 영혼 상태여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만일 신성력을 가진 자가 있었다면 그 존재를 들켰겠지만, 그런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마리아와 아슬란은 유유히 사람들을 헤치고 공작성까지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설마 만나려는 사람이…….’

    마리아가 공작성의 벽을 통과하여 어느 방 앞에 도착하자 아슬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해 줄까?]

    “……아닙니다.”

    ‘설마 이곳에 계시진 않겠지.’

    아슬란은 제 어머니인 선대 공작부인의 방을 보자 곤혹스러웠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크게 실망하셨어. 쉬이 돌아오실 분이 아니시다.’

    그의 어머니는 마치 깊은 호수와 같은 분이었다. 고요한 내면 너머에는 차곡차곡 쌓아 온 분노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세월을 통해 식어 가는 중이었다.

    아슬란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 정부와 바람이 났을 때도 그녀는 고요히 분노했다. 선대 공작이 사고로 숨을 거두면서 그녀의 오갈 데 없어진 분노는 아들에게로 향했다.

    “너만큼은 나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

    그 말은 몹시 무거운 추가 되어 아슬란을 옭아맸다.

    ‘어머니가 슬퍼하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 마음만으로 아슬란은 어머니의 착한 아들로서 자랐다. 한 번도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적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어겼다.’

    착한 아들로서 자란다고 생각했던 건 오판이었다. 그는 마치 유리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지고 있었다.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한 것을, 아슬란은 후회하지 않았다. 설령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실망하여 영영 떠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 이 안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럴 줄만 알았다. 방 안의 불은 꺼져 있었고, 냉기가 흐르는 것이 절대 선대 공작부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슬란의 예상이 빗나갔다.

    “아슬란……. 내 아들, 대체 어디 있는 거니…….”

    “……어머니?”

    춥고 어두운 방 안은 분명 화려했건만, 그 안에서 울부짖는 여인은 한없이 연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평소 선대 공작부인이 즐겨 입던 화려한 드레스나 장신구는 어디로 치운 것인지 볼 수 없었다. 뺨은 퍼석한 밀가루 같았고, 눈두덩은 부어서 흉했다.

    자기 관리로 유명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형편없이 망가진 것에 대해 아슬란은 적잖이 놀랐다. 일순간 어머니를 보고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그녀를 붙잡으려 하기까지 했으니까.

    ‘……붙잡아지지 않는구나.’

    당연하게도, 아슬란은 현재 자그마한 푸른 영혼에 불과했기에 어머니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어머니가 펑펑 눈물을 쏟는 걸 구경하기만 해야 했다.

    마리아가 얼음처럼 얼어 버린 아슬란을 향해 물었다.

    [어때? 네 어머니가 너를 걱정하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은.]

    “어머니께서……. 나 때문에 울고 있단 겁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네 이름을 부르면서 저렇게 통곡하고 계시는데.]

    “…….”

    “아슬란, 아슬란……. 제발 살아 있다면 이곳으로 돌아와다오. 어미가 다 잘못했다.”

    반박을 할 새도 없이 선대 공작부인이 다 쉬어 가는 목소리로 아들을 찾았다. 그녀는 침대 이불에 얼굴을 묻고 끅끅대고 있었다. 이불은 넘쳐흐른 눈물로 축축했다.

    “왜……. 왜 이러고 계십니까.”

    아슬란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어머니가 그 때문에 울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있는 자식이 행방불명된 어미가 울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내 어머니는……. 그분은 다릅니다. 정말 나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생각으로 무도회장에서 나를 외면했어요. 당신도 내 머릿속에서 봤을 것 아닙니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슬란에게 보이던 노골적인 실망과 경멸의 눈빛. 만년설보다도 차가워 심장이 얼어 버릴 것 같았던 어머니의 차디찬 표정.

    그는 그때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보고 있었다.

    ‘어머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신다.’

    아슬란이 어린 나이에 윈체스터 공작 위를 승계했을 때, 그녀는 피의 숙청을 벌였다. 어린 아슬란의 지위를 노리는 방계와 가당찮은 피라미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사람을 시켜 그들을 죽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 아슬란은 아주 가끔, 그런 어머니가 무서웠다. 입을 잘못 놀리는 하인들은 그녀가 선대 공작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

    속으로는 아슬란 역시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쩌면 그는 제 아버지와 다르게 올바른 길만을 걷는 자가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단지 버려지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지금 네 앞에서 어머니가 슬피 우는 걸 보고 있는데도?]

    마리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아슬란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가 슬피 우는 선대 공작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이름을 부르면서, 저렇게 오열하는데 그 이상의 증거가 뭐가 더 필요할까.]

    “…….”

    아슬란은 침묵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어머니의 진의를 의심하는 그였다. 마리아가 그것을 들추자 지금은 있지도 않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인정해. 네 머릿속에 있으면서 봤던 네 어머니는 날카롭고, 냉철한 분이셨지.]

    하지만 자식을 잃는 고통 앞에서 어떤 부모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그것이 불의의 사고로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면, 어떤 인간이 진정할 수 있을까.

    “아슬란, 제발……. 제발 무사히만 돌아와다오. 이 어미가 그리 매몰차게 말했던 순간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네게 그런 모진 말을 하진 않았을 거야.”

    “……어머니.”

    아슬란은 마리아의 말에 선대 공작부인인 제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인하고 우아하면서 오만했던 귀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 아들, 불쌍한 내 아들…….”

    그녀는 단지 상처받은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아들에게 해 주지 못한 일들과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후회를 가득 안고서.

    [네 어머니는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이런데도 너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이런 건 너무 낯설어요.”

    아슬란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을 줄만 알았다. 그가 되돌아봤을 때 그의 인생은 실패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너무 낯설었다.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광경이. 색채를 잃고 바랜 것처럼 우중충한 어머니의 방 내부가.

    ‘그러고 보니 성 내부가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것 같아.’

    아슬란은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고 마리아의 뒤를 따라왔기에 윈체스터 공작성 내부를 잘 둘러보지 못했다.

    “잠시 성 곳곳을 살펴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야. 내 곁에서 너무 떨어지지만 않도록 해. 괜히 지박령 같은 원혼들에게 붙잡히면 골치 아파지거든. 아, 물론 셀레누스 님께서 귀찮아진단 소리야. 너도 마찬가지고.]

    “알겠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겠습니다.”

    작은 푸른 불꽃 형태의 영혼이 익숙한 성안을 이리저리 훑고 다녔다.

    ‘이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는데.’

    윈체스터 공작성은 시커멓게 타 버린 숯처럼 침울했다.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검은색을 비롯한 어두운색 옷을 입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디 공작님께서 다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기도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아슬란 윈체스터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소망이 사람들의 입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혹 초를 치려는 사람도 있긴 했다. 언제 어디서 냄새를 맡고 기어 왔는지 모를 공작가의 먼 방계 친척들이었다.

    “흥. 동행했던 데벤테르 공작 부부 말에 의하면 신성력 폭탄이 터졌다는데, 아무리 공작의 무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폭탄 앞에서 버틸 수나 있었겠어?”

    ‘검은 속내가 뻔하군.’

    거드름을 피우며 안락한 공작가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아슬란은 비소를 흘렸다.

    ‘내가 죽으면 공작가를 집어삼킬 속셈이야.’

    행동거지만 보면 그들은 이미 공작가의 실세가 된 것처럼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설마 폭탄이 터진 현장에서 아슬란이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처럼 아슬란의 육신은 갈가리 찢겼다. 마지막 순간에 셀레누스와 가브리엘, 마리아가 수습하여 살려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면 저들의 바람대로 될 수도 있었다.

    영혼 상태이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그때, 손님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가시오, 다들. 이곳의 주인의 행방이 아직 묘연하거늘, 어찌 승냥이 떼처럼 아득바득 달려와 눌러앉으려는 거요?”

    “서, 선대 공작부인?”

    “말이 지나치시군요. 부인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공작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그 입 닥치시오!”

    선대 공작부인이 호통을 치며 묵직한 지팡이를 내던졌다. 지팡이는 무례한 방계 친척의 뺨을 스쳐 벽에 꽂혔다.

    주륵, 피가 상처에서 흐르자 그 친척이 기겁했다.

    “이, 이런 폭력을 사용하다니!”

    “폭력? 그대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건 폭력이 아니던가? 어디서 감히 북부를 능멸하려 드는가? 나가서 마수와 싸워 본 적도 없는 애송이 주제에.”

    “뭐요?”

    선대 공작부인, 카밀리아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다른 지팡이를 들고 그들의 목을 향해 조준했다.

    “내 아들은 기필코 돌아올 것이오. 나는 그 아이를 죽음의 위기에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소. 반드시 그 아이는 돌아와 다시 북부를 굳건하게 지킬 것이오.”

    “어머니…….”

    그걸 바라보는 아슬란의 영혼 깊숙한 곳이 강렬하게 반응했다.

    [이래도 너는 돌아가지 않을 텐가? 아슬란 윈체스터.]

    너를 필요로 하는,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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