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죽으면 다 헛수고다! 살아서 미안한 상대에게 속죄를 해야지, 죽음으로 갚으려 하다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분노한 마리아가 아슬란을 붙잡고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영혼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제 멱살이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을 받았다.
[사내새끼란 것들은 어쩜 이렇게 자기 자신만 아는 줄 몰라. 멋지게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그게 죗값을 다 치르는 줄 알지!]
“그게 아니라, 저는…….”
아슬란이 마리아의 말에 당황해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이는 마리아의 분노에 묻혀 버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네 육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 했잖아.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이나 지었지.]
“…….”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 삶을 붙잡고, 구차하더라도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게 일반적이거늘, 한심하게도 순순히 죽음을 맞으려 드는 게 뭐가 속죄라는 거야!]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소리치시는 겁니까?”
마리아의 말에 아슬란도 뿔이 났다. 그는 일평생 명예를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한심하게도, 루스벨라가 약혼녀로 결정되었을 때 그녀를 편견으로 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아니, 그 이외에도 그가 놓친 부분은 많았다.
아슬란은 오만했고, 그 대가를 지금 이 순간까지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당신이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의 비참함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선조라는 이유로 올바른 척 구는 게 싫었다.
아슬란이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마리아가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위선적으로만 들리지? 꼬맹아.]
“……꼬맹이 아닙니다.”
[부정은 안 하는 걸 보니 맞군. 삐졌군, 삐졌어.]
혀를 쯧쯧 차는 마리아의 행태가 퍽 얄미워 보였는지, 셀레누스가 마리아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그만하거라, 마리아. 저러다 애 뼈 다 부러져서 살만 남겠다.]
“……신께서는 누구 편이신 겁니까?”
[적어도 네 편은 아니지. 넌 내가 선택한,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괴롭게 만든 장본인 중 한 명이니까.]
셀레누스마저 아슬란의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누구의 앞에 서도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이로군.’
척박한 북부의 영주이자, 제국의 충성스러운 공작으로서는 절대 받아 본 적 없는 홀대에 아슬란은 침울해졌다.
마리아가 영혼 상태의 아슬란에게 다가가 토닥여 줬다. 푸른 불꽃 같은 작은 영혼은 그 손길을 피했다.
“저리 가십시오. 절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으시잖습니까.”
[정녕 내가 네게 아무런 애정도 없이 다그칠 마음만 있었다면 그랬겠지.]
“뒤늦게 와서 좋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안 넘어갑니다.”
[네가 왜 너를 달래려 하겠느냐? 너도 어쨌든 나의 후손이고, 외롭던 나를 네 머릿속에 받아들여 준 게 너 아니냐.]
“…….”
아기 주먹만 한 푸른 영혼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슬란이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자 마리아가 제 속사정을 꺼냈다.
[내가 그러했다. 내가 겪은 바가 있어 네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택하지 않기를 바랐다.]
“……마리아 님도 이랬습니까?”
[정확히는 내 남편의 선택 때문에. 그이는 나를 지켜 주려다가 결국 죽었거든. 명예로운 죽음이었지.]
“그랬습니까.”
[하지만 그건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불행이었어. 먼저 간 사람들은 절대 몰라. 사랑하는 이가 사라진 고통을 이겨 내야 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를.]
마리아의 남편은 윈체스터 공작가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벨에게 쫓기는 마리아를 구해 주고, 혼인하여 평생을 북부의 품 안에서 지켜 줬다.
하지만 그의 끝은 마리아를 지키다 대신 죽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오랫동안 아벨의 저주로 영혼만이 지상에 남아 떠도는 일을 겪었지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끝이야. 죽는 순간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은원을 갚아라. 네 경우는 후회를 청산해야 하니 더 살아 있거라.]
“……제가 감히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슬란은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가 보기엔 살아서 돌아가도 자신에게 남은 건 고작 허울뿐인 공작 위였다.
‘더는 착한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였으니, 어머니도 나를 보려 하시지 않겠지.’
그리고 공작가 휘하의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공공의 적인 아벨과 에덴을 상대로 단단히 뭉쳤지만, 이제 그 적이 사라졌으니 그들은 다시 기득권을 추구하며 아슬란을 압박할지도 몰랐다.
한 번 깨진 신뢰는 다시 붙이기 어려웠다. 아슬란은 한때 그를 북부의 왕처럼 받들었던 가신들을 더는 아낄 수 없었다.
‘게다가 루스벨라가 성녀라는 게 밝혀졌으니……. 그동안 그녀를 모함했던 사람들은 거의 북부 출신이 많으니…… 여러모로 어려울 거야.’
그동안은 북부가 경계선을 넘어오려는 마수들과 외부의 적들을 처리한다는 이유로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명예로운 일을 한다는 뜻에서 윈체스터 공작가를 포함한 북부의 일족들을 높게 쳐주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었다. 어렵사리 평화를 가져온 존재인 성녀를 핍박한 것이 북부이니 조만간 그들은 옛날처럼 야만인 취급을 당하며 고립될지도 몰랐다.
“어리석고 멍청하게 보이겠지만, 저는 살아나서 제 몫으로 올 모든 일을 책임질 자신이 없습니다.”
애정과 신뢰를 잃은 영지의 사람들을 이끌어 가기도, 그렇다고 루스벨라의 앞에 나타나는 것도 버거웠다.
‘마리아 님의 말씀이 옳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싶은 거야.’
죽기 전의 아슬란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이성의 줄을 끊어 놓기라도 한 것인지, 아슬란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영원한 안식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가 저지른 과오도, 다른 이들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도 다 잊고 싶었다.
“쉬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허. 그것이 네 진심이더냐?]
“예.”
‘저 녀석을 어찌한담.’
마리아는 내심 아슬란을 아끼고 있었다. 외로웠던 마리아에게 아슬란은 구원자나 다름없었으니까.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는 주제에 미련퉁이 같아서 속 터질 때가 있다는 점은 큰 흠이었지만, 그래도 아슬란은 마리아가 사랑한 이와 아주 닮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후손이었다.
‘그리고 아벨과의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어 준 고마운 인연이다. 그러니 더욱 저 녀석을 죽게 놔둘 수는 없어.’
이게 마리아가 바로 떠나지 않고 아슬란의 영혼을 붙들어 둔 이유였다. 셀레누스나 가브리엘도 마리아의 뜻을 존중하여 아슬란을 살려 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였다.
[어쩔 거야, 마리아? 저렇게 강경하게 죽음을 바라는데, 억지로 살려 놓는 것도 예의는 아니잖아.]
[아, 쫌. 기다려 봐요. 신이나 되는 양반께서 기다릴 줄을 모르셔.]
[뭐, 뭣?]
셀레누스가 마리아에게 별안간 말로 공격을 당하고 씩씩거렸으나 마리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아슬란에게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두고, 그동안 네가 여전히 살고 싶지 않다면 죽는 걸로. 어때?]
“그래도 됩니까?”
아슬란의 축 처진 푸른 불꽃이 마리아의 제안에 약간이나마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마리아는 그 말에 입이 썼다.
[나도 계속 힘들다는 녀석 붙잡고 실랑이할 수만은 없으니까. 저승에서 내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다리는 사람들…….”
아슬란은 마리아의 말에 일순간 흔들렸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멀리서나마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지켜보고 싶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개선하고 싶었다.
그는 지쳤을 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호오.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반응을 하잖아?’
될 수 있다면 얼른 아슬란을 다시 살려서 돌려보내고 싶었던 마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예 기간 동안 네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가서 구경하는 게 어때.]
“당신처럼 말입니까?”
[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는 아슬란을 향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영혼 상태로 지내 봤던 그녀는 외로움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를 잘 알았다.
셀레누스가 그런 마리아의 속내를 눈치채고 아슬란을 조금 연민하여 속삭였다.
[마리아, 그래도 되겠어? 그리고 난 저 녀석을 살려 주겠다고만 약속했지, 이런 약조는 한 적 없는데? 네가 신이냐?]
[에이, 저 아이도 신께서 돌봐야 할 가엾은 피조물인데 조금만 양해해 주시죠. 거슬리던 아벨을 죽인 일등 공신이기도 하잖아요.]
[누가 일등 공신이야?! 따지고 보면 내 새끼랑 계약자가 잘해서 쟤가 막타를 날린 거지. 지금 공을 꽁으로 훔쳐 가려고 해? 어?]
[좀 봐주시죠. 저, 저 녀석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신님 옆에 남아서 읍소할 겁니다.]
[뭐 이런 지독한 인간이 다 있어?]
마리아의 말에 셀레누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셀레누스 님.]
[됐으니까 저 녀석, 아슬란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라. 저 녀석의 어미가 아들을 간곡히 찾던데.]
[그래야죠.]
마리아는 남은 사람의 고통을 아는 입장으로서 절대 아슬란을 죽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남편이 죽고, 아이들을 홀로 척박한 북부에서 키우면서 그녀는 한시도 남편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었다.
‘너도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아슬란은 죽은 남편과, 그 남편을 똑 닮은 첫째 아들과 똑같이 생겼다. 그러니 마리아는 더더욱 아슬란을 내팽개칠 수 없었다.
[따라와라, 아슬란. 네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