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외전 2.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으니
‘나는 죽은 건가?’
아슬란은 움직이지 않는 육신으로 겨우 의식만 깨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아벨이 자폭하려는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분명…… 나는 루스벨라와 데니스에게 몸을 날렸을 텐데.’
아벨이 자폭하려는 것을 보고 아슬란은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어떤 이해타산적인 사고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본능이었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구하려 드는 것과 같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래야만 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죽을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은 아벨이 신성력으로 폭탄을 터트린 직후였다. 아슬란은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꼭 붙들었으나, 그 두 사람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살아야 하는데.’
나는 몰라도, 그 두 사람만은 살아야 하는데.
아슬란의 걱정은 온통 그것에 쏠려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무사한지.
두 사람이 아벨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죄스러워 죽어서도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만은 안 돼.’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하던 아슬란의 귓가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곁가지야, 너는 죽지 않았단다.]
“……누구지?”
‘목소리가 나오는군.’
기이한 일이었다. 육신에 대한 감각이 없는데 목소리가 나오고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는 이내 어둠 속을 환하게 밝히며 제가 누군지를 밝혔다.
[나는 이 세계의 신, 셀레누스 님의 말을 전하는 전령이다. 네 존재가 가엾어 나타난 것이니 염려 말거라.]
아슬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천사였다. 황금빛 휘광을 두르고 나타난 천사는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제 육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기이한 공간에 대해서도 알고 싶군요.”
마치 부유하는 영혼과 같은 상태에서 대화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슬란은 저가 죽든 살든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읽어 보기라도 한 듯 천사가 진동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의 육신은 갈가리 찢어졌다.]
‘역시 그런가.’
천사의 입으로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몰려오는 건 억울함이나 아쉬움이 아닌 허탈함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지금 아슬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자신이 아니라, 루스벨라와 데니스였다.
“저는 그렇다 치고,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사합니까?”
신성력을 가진 두 사람이니 죽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수도로 갈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제발.’
그는 죽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루스벨라에게 지은 죄는 너무도 커서 용서받을 수도 없었다.
간절함이 깃든 푸른 눈을 고요히 바라보던 천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살았다만, 어째서 너의 안위보다 그들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이지?]
“나보다 그들이 더 살아야 해서 그렇습니다.”
[너도 네 집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많을 터인데. 영주이지 않았느냐. 네 땅에서 너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천사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아슬란은 천사가 제 지난 삶의 행적까지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신의 대리인이라는 칭호가 그냥 달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과연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루스벨라가 파혼당하는 데는 아슬란의 주변 사람들의 음해가 컸다. 거기에 아슬란이 뒤늦게라도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 해도 정보가 새자마자 그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아슬란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정말 필요한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을까?’
육신이 이미 사라져서일까. 살아 있을 적 치열하게 노력하며 지키려던 공작 위가 모두 쓸모없게만 느껴졌다.
[너는 네 어머니가 그립지는 않으냐?]
“그것도…… 모르겠군요. 제 어머니께서는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 제게 크게 실망한 눈빛이셨습니다.”
루스벨라와 데니스의 계획에 동참한 그를 보는 선대 공작부인, 카밀리아의 눈빛은 냉담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녀의 낯빛은 말하지 않아도 그에게 실망했다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제가 아니라,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살아서 다행이군요. 값진 죽음이었습니다.”
[…….]
아무런 미련 없이 허심탄회하게 제 죽음을 말하는 아슬란을 바라보며 천사는 침묵했다.
“이제 천사님께서 제 영혼을 거둬 가시는 겁니까?”
아슬란은 차분하게 천사의 인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신이 갈가리 찢어졌다니 그것을 소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가 천국에 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아무런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다.’
끝에 다다랐으니 쉴 수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살려 달라는 아우성도 쓰지 않고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아슬란을 보며 천사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슬란 윈체스터.]
“……예? 하지만 제 육신이 전부 찢겨 나갔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신성력의 폭발로 인해 찢어진 육신이니, 붙이는 것도 신성력으로 해낼 수 있다.]
“그 말씀인즉…….”
[너는 죽지 않는다. 아슬란 윈체스터. 너를 이렇게 죽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다른 곳에서 환하게 빛이 밝아 오더니, 그 속에서 성큼성큼 누군가 발걸음을 아슬란을 향해 옮겼다. 키가 크고 훤칠한,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셀레누스였다.
[오셨습니까, 셀레누스 님.]
[그래. 릴리안. 네가 이 미련 없는 영혼을 붙들고 있느라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속세에서의 이름은 버려야지요. 제 천사로서의 이름은 가브리엘입니다.]
[흠, 루시가 그리워할 것 같은데.]
[……그래도 원칙은 원칙입니다. 그 아이는 가브리엘로서 지켜볼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알았다, 알았어.]
셀레누스가 가브리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바로 황금빛 눈동자로 아슬란을 응시했다.
‘압박이…… 엄청나다.’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먹이를 낚아채려는 늑대의 앞에 연약한 토끼처럼 내던져진 것 같았다.
[살고 싶지 않으냐?, 아슬란?]
가브리엘에 이어 셀레누스의 물음에 아슬란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역할은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밖에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의 죽음은 너무 아까워. 루스벨라를 총애하는 입장에서 너는 미운 가시털 같은 존재지만, 이번 생에서 네 역할도 컸음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알고 계셨군요. 시간이 한 번 돌려졌다는 것을.”
[내가 내 힘으로 그 아이들의 바람을 이루어 준 것인데 설마 모를까.]
셀레누스가 아슬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아슬란은 조금 머쓱해져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너는 내가 사라지길 바란 불손한 종자들의 후손이지만, 끝내 내가 선택한 아이를 지키고자 했다. 그것만은 높이 쳐주어야 옳지.]
“그래서 저를 살려 주려 하십니까?”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라 네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게 누구지?’
아슬란이 없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때, 무언가 희미하게 빛나는 형체가 슬금슬금 셀레누스의 뒤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아슬란! 이렇게 마주 보기는 처음이구나.]
어린 소녀였다. 대충 겉보기로 보이는 나이는 대략 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연약한 소녀였다. 깡마른 체격인데도 불구하고 소녀의 검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에서는 빛이 났다.
“……누구십니까?”
[어머, 얘. 섭섭하다. 나 못 알아보겠어?]
“누구신지 전혀 모르니 여쭙는 겁니다.”
[서운하게. 나야. 마리아. 너의 아주 먼 선조.]
“……마리아?”
[그래, 나라고. 네가 아벨을 죽여준 덕에 내가 이렇게 자유가 되어 신을 만났지.]
어깨를 으쓱이는 마리아는 몹시 천진해 보이고, 밝았다. 아슬란의 머릿속에 있을 때 보였던 괴팍한 노파 같은 이미지는 어디 가져다 버린 것처럼 흔적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가장 익숙한 모습으로 영혼의 모습이 고정되거든. 마리아의 본질은 저 어린 나이에 가장 알맞다는 거겠지.]
셀레누스의 설명에 마리아가 추가적으로 더 덧붙였다.
[이 모습일 적에 가장 한이 많았으니 그랬겠지. 하하. 아벨과 함께했던 시절이 내 삶과 죽음 이후의 영혼 시절까지도 지배했으니까.]
마리아는 진정 행복해 보였다. 아벨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맞은 그녀는 가끔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요정처럼 톡 쏘는 매력이 있었다.
아슬란은 그런 마리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설마 마리아, 당신께서 저를 살려 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러셨습니까!”
[안 그럴 이유는 또 뭐지? 너는 할 만큼 했다, 아슬란. 합당한 보상을 요구해도 되는 입장이야.]
“하지만…….”
‘나 때문에 그녀는 사라진 과거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아슬란의 죄책감은 깊고 어두웠다. 데니스가 사라진 과거 속 그의 기억을 억지로 깨운 후 그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가 루스벨라를 조금만 더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텐데.’
‘내가 그녀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믿어 줬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야.’
‘내가, 나 때문에, 그녀가 죽었어.’
자신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자각은 너무도 그를 괴롭게 했다. 심지어 이번 생에서도 그는 그녀를 믿지 못해 내쳤다. 데니스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똑같이 죽음을 맞았을 테고, 세상은 구원자를 잃은 충격으로 다시 멸망했을 터다.
“저는…… 살아 있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아슬란은 제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리어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야 죄책감을 온전히 씻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며 반가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 넌 죽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냐?]
답답했는지 아슬란에게 결국 마리아가 한 소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