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셰리안에게 잠재된 신성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축복이자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 신성력 보유자들이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로군요. 누군가에게 죽임당하지도 않고, 또 저처럼 제약이 걸린 상태도 아니고요.”
[그래. 네가 고난 속에서 싹을 틔운 덕에 네 이후의 세대들은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으니.]
내 각성은 나의 묶여 있던 신성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탄생할 신성력 보유자들의 자유를 가져왔다.
‘셰리안을 비롯한 신성력 보유자들은 더는 나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아벨도, 에덴도 사라졌으니 신성력 보유자로 태어난 이들은 진짜 사제로서 자라거나,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롭게 만들 것이다.
[루스벨라, 그러니 너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다. 너의 희생을, 용기를, 그리고 끝내 가져온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너의 앞길을 밝게 비춰 줄 거야.]
“말씀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셀레누스 님.”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데니스와 함께 과거와 현재 속에서 겪은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먹구름과 같았던 의심이 개자, 남은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이었다.
“어머니! 이것 보세요. 흰 나비는 돌아가신 분의 넋이 살아 움직이는 거라 들었는데, 그럼 이 나비가 릴리안 고모할머님이 아니실까요?”
천진하고 밝은 얼굴로 내게 묻는 미래의 아들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 말은 내가 어릴 때 유모에게 들었던 말인데.’
사람이 죽어 나비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게다가 릴리안 고모님은 본인의 진실된 모습인 천사로 돌아가셨으니, 더더욱 저 나비가 릴리안 고모님이실 확률은 적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셰리안.”
하지만 나는 아들의 동심을 지켜 주기로 했다. 나 또한 마음 깊은 속에서는 릴리안 고모님이 나를 찾아와 주신 것이길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요? 우와!”
셰리안의 우윳빛 뺨이 흥분으로 발갛게 익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손바닥 위의 나비는 신기하게도 얌전히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나비를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말고 적당한 때에 놓아주자. 알았지?”
“물론이죠! 저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걸요.”
[흠흠, 나처럼 말이지?]
“아뇨. 어머니처럼요.”
[……고얀 것! 제 아버지를 닮아 한 치도 밀리지를 않지! 흑흑. 사탕발림이라도 그렇다 해 주면 어디가 덧나더냐!]
“저희 어머니께서 거짓말은 나쁘다고 가르치셨거든요. 그러니까 전 진실만 말할 거예요!”
[으윽, 여기서 루시의 이름을 드는 건 반칙이야!]
셀레누스 님과 셰리안이 투닥거렸다. 작은 황금빛 참새 모양의 신과 아직 작고 여린 아이가 사소한 논쟁거리로 다투는 일은 참 귀여웠다.
‘정작 나는 셰리안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했는데.’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아벨과 에덴을 용서하고 살려 뒀겠지.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면 나는 언제고 그것들을 처리할 것이다. 그걸 위해 가지게 된 힘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냈다는 뿌듯함으로 일생을 뿌듯하게 보낼 수 있을 거다.
그때, 셰리안의 손바닥 위에 있던 나비가 내 쪽으로 향해 날아올랐다.
“어? 어머니, 고모할머님 나비가 어머님께로 가요!”
[루시에게 꿀 냄새라도 맡았나?]
“그럴 리가요.”
흰 나비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내 어깨 위로 살포시 착지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나비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구나, 루스벨라.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태어날 셰리안.]
“고모님……?”
[나를 기억해 줄 거라 믿었다. 때마침 너희를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축복을 내리고 갈 테니 잘 살렴.]
“릴리안 고모님이세요? 조금만, 조금만 더 저희 곁에 있어 주세요.”
[아니야. 나는 언제나 너희 곁에 있었단다. 보이지 않아도 너희를 축복하며 함께 있어. 그러니 괜찮단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다.]
흰 나비는 내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다시 종잇장 같은 날개를 팔락이며 상공으로 날아갔다. 그 나비가 하늘로 올라가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다른 흰 나비가 함께해 뭉치더니 사라졌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진 고모님의 존재에 나는 멍하니 한 쌍의 나비가 사라진 하늘만 쳐다봤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그러게. 셰리안. 너희 어머니가 나비가 날아가니 영 아쉬웠던 모양이다. 저리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셰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걸 보니 저 아이는 릴리안 고모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야, 셰리안. 정말 저 흰 나비가 릴리안 고모님이셨던 것 같아서 잠시 감상에 빠졌단다.”
“와아, 진짜요? 신기하다! 고모님께서 이곳에 들르셨다니!”
“셰리안이 오자고 해서 뵐 수 있었나 봐. 고맙구나, 셰리안.”
“헤헤. 별말씀을요!”
나는 황금빛 날개를 퍼덕이는 셀레누스 님께 초점을 맞췄다. 셀레누스 님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지만, 나는 그분이 아까 그 나비가 진짜 릴리안 고모님이셨다는 걸 아셨다는 걸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셀레누스 님.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내가 나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내 길을 밝혀 주는 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남편인 데니스, 미래의 아들인 셰리안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사랑스러울 게 당연할 크리스틴. 그리고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축복하실 릴리안 고모님.
이 모두는 내게 걱정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미래를 쟁취하라고 나를 다독여 주고 있었다.
‘행복해.’
이보다 더 안온하고 충만할 수가 있을까.
나는 벅찬 마음으로 셰리안을 들어 내 품에 안았다.
“어머니? 저 이제 아기 아니어서 무거운데…….”
“괜찮아. 하지만 오늘은 특별하니까. 그리고 나는 약하지 않단다.”
신성력을 팔에 둘러 강화한 덕에, 아이의 몸무게는 조금 과장해서 깃털처럼 가벼웠다. 데니스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들, 네 어머니는 강하셔. 조금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된단다.”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어리광은 아이가 부릴 수 있는 특권인걸.”
“그럼…… 저 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싶어요! 잘 익은 칠면조 고기도, 탱글탱글한 푸딩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같이 먹고 싶어요.”
아이의 씩씩한 미소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신비하고 기적적인 만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셀레누스 님이 내 귓가로 포르르 날아와 속삭였다.
[돌아갈 셰리안에게 마지막 추억을 주렴. 오늘이 가기 전에 저 아이는 다시 미래로 돌아갈 거란다. 아마 잠들고 나면 이게 다 꿈이라고만 생각하겠지.]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뭘. 멋대로 셰리안을 데려온 것에 대해 네가 기뻐해서 다행이었다.]
아이와의 꿈 같은 시간을 마무리해 줄 의무가 내게는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나를 걱정하여 시간을 넘어온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 주고 싶었다.
“가자, 셰리안. 집으로 돌아가서 주방장에게 먹고 싶은 건 다 해 달라고 하자.”
“좋아요! 얼른 그럼 집으로 가요!”
“어어, 셰리안. 그렇게 뛰다가는 넘어져.”
“괜찮아요! 아빠! 전 다쳐도 스스로 신성력으로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에 셰리안은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그런 셰리안이 다칠까 노심초사하는 건 데니스의 몫이었다.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이었다.
***
우리는 데벤테르 공작저로 돌아가 성대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주방장을 비롯한 고용인들에게는 셰리안의 존재를 먼 곳에서 방문한 친척이라 소개했다. 도저히 셀레누스 님께서 미래에서 데려온 아이라 하기엔 파장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다.
‘괜한 잡음은 만들지 않는 게 좋겠지.’
나와 데니스가 아이를 정말 예뻐하는 걸 보고, 고용인들은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식사를 준비했다. 주방장이 힘줘서 만든 칠면조 구이는 셰리안이 한 입 먹고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바삭하고 촉촉했다. 더 먹으라며 우리 부부가 앞다퉈 살코기를 찍은 포크를 내미는 걸 보고 고용인들은 설마 주인 내외가 입양이라도 하려는 걸까 수군거렸다.
“맛있어요!”
“이것도 더 먹어 보렴.”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곧 디저트로 나올 거야. 아가, 조금만 기다리렴.”
“너무 좋아요. 셀레누스 님을 따라와 보길 잘한 것 같아요!”
셰리안은 신나서 주는 대로 음식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아이의 볼살이 음식을 가득 문 다람쥐처럼 부풀었다. 나와 데니스는 그것을 귀여워하기 바빴다.
[나는 뒷전이냐, 루시……?]
셀레누스 님이 슬쩍 내 옷자락을 잡고 애처롭게 자신도 칠면조 고기를 집어 달라 요청했다.
“아니요, 당연히 셀레누스 님도 저의 우선순위 안에 들죠.”
나는 웃으면서 작게 자른 고기 조각을 셀레누스 님께 먹였다. 황금빛 참새 신은 먹지 않아도 되면서 몹시 기뻐하며 불꽃 같은 날개를 퍼덕였다.
저녁 식사가 늦게까지 지속되고서야 끝났다. 배부르게 먹은 아이는 꾸벅꾸벅 졸며 잠투정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 졸려요……. 깨어 있어야 하는데.”
“자렴, 아가. 우리가 옆에서 끝까지 있어 줄게.”
“정말이죠? 어기면 엉덩이에 뿔 나요…….”
“엉덩이에 뿔이 나면 네 어머니께서 슬퍼하실 텐데.”
“그럼 어머니는 말고 아버지만…….”
“셰리안, 아버지는 왜 안 되는 거니, 응?”
데니스가 셰리안에게 징징거리는 사이, 나는 동화책 한 권을 들고 와 아이의 머리맡에서 조곤조곤 읽어 줬다. 푹신한 침구 속에서 아이의 눈이 점점 감겼다.
“……그렇게 해서 모두는 행복해졌습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행복할 거예요.”
동화책의 마지막 뻔한 문장을 읽었을 때, 셰리안은 사라졌다. 아마도 셀레누스 님의 힘으로 보이는 황금빛 가루만이 잠시 공기 중에 남아 있다가 자취를 감췄다.
시간은 자정이었고, 현실 같지 않던 달콤한 꿈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용기를 잃지 않는 한, 셰리안과 크리스틴을 만날 것이며, 우리의 지난 오늘 같던 평온하고 즐거운 하루는 계속되리란 것을.
언제까지나 함께일 거니까.
-외전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