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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54화 (154/166)
  • 154화

    “……우리 아이라고요? 저 애가?”

    데니스는 너무 놀라서 내게 주려고 사 온 꽃다발을 떨어뜨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있어서도 미래에서 건너온 아이의 존재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 같았다.

    [사실이다. 그냥 육안으로 보기만 해도 너희 둘의 자식인 걸 알 수 있을 텐데?]

    “하긴…… 셀레누스 님이 주도하신 일이라면 그럴 수 있죠.”

    다소 이상한 논리로 납득하는 데니스에게 셰리안이 도도도 달려왔다. 데니스의 발치에 떨어진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 그것을 주운 셰리안이 발그레한 볼을 하고 제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아버지!”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으악! 높아요, 아버지!”

    본래 내 머리 색을 타고난 셰리안을 본 데니스는 감격했다. 셰리안은 순식간에 데니스에게 들어 올려졌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미안. 많이 무서웠니?”

    “괜찮아요. 제가 있는 미래에서도 아버지는 종종 이러시거든요. 익숙해요.”

    데니스가 셰리안을 바닥 위로 다시 얌전히 내려놓자, 셰리안이 의젓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데니스는 너무 사랑스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미래의 난 정말이지 행복해 죽겠군. 이런 아들을 매일 볼 수 있다니…….”

    “아버지는 정말 미래와 똑같네요. 으, 지겹게도 들은 소리!”

    셰리안은 데니스를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마치 친구처럼 익숙하고 정겹게 대하는 게 미래의 부자 관계가 친밀함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평온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처럼 포만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달콤한 풍경에 절로 행복해졌다.

    “이름이 뭐니? 아가?”

    “셰리안이에요. 그리고 아기 아니에요. 일곱 살이나 먹었단 말이에요.”

    남들은 쉽게 믿지 못할 대사건이지만, 데니스는 납득하자마자 셰리안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이런, 미안하다. 셰리안. 아빠가 너무 기뻐서 그만.”

    “괜찮아요. 용서해 드릴게요.”

    “고맙기도 해라.”

    신기하게도 셰리안은 데니스와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의젓한 척하려는 아이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맞춰 주는 아빠의 조합은 절로 나를 흐뭇하게 했다.

    ‘귀여워라.’

    어느새 내게 있던 불안함은 저 멀리로 치워졌다. 셀레누스 님은 옳으셨다. 미래에서 온 셰리안을 보고 나니 걱정거리 따위는 아무렇지 않아졌기 때문이었다.

    “셰리안, 혹시 너 형제자매 있니?”

    “있어요! 크리스틴이라고, 저랑 한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어요.”

    “세상에. 크리스틴도 혹시 루시를 닮았니?”

    “걘 아빠를 더 닮았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짙은 녹색 눈동자만은 꼭 빼닮았어요.”

    “완벽하구나……. 미래의 내가 너무 부럽네.”

    데니스는 셰리안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계속 캐내고 있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마다 그의 광대는 위로 올라가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맞아요. 아버지는 매일매일 행복해하세요. 아침에 눈을 떠서 저랑 크리스틴에게 입을 맞춰 줄 때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말하세요.”

    셰리안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였다. 나처럼, 그리고 데니스처럼 그늘진 구석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 사실이 얼마나 나를 안심하게 만드는지 아이는 절대 모를 거다.

    ‘아니. 아까 나를 위로하는 말을 건넨 걸 보면 알 수도 있겠구나.’

    아이가 자라면서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 나왔을 테고, 아이들도 들었을 거다.

    ‘그러니 여기까지 아이가 온 것이겠지.’

    나는 부자가 정신없이 떠드는 틈을 타, 셀레누스 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작은 황금빛 참새로 변해 있는 셀레누스 님은 내 시선을 받자 붉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왜, 왜 그러느냐?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니요. 이보다 정말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셀레누스 님께 감사해서요.”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께 웃자 셀레누스 님은 기뻐하며 포르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럴 줄 알았다! 에헴. 내가 하는 일들은 다 계획이 있는 법이니라. 셰리안을 데리고 오면 필시 네가 근심을 거둘 줄 알았다.]

    ‘방금까지는 내 반응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셨으면서.’

    셀레누스 님께서는 나를 한 번 잃은 고통을 잊지 않으셨다. 이제는 사라져서 없어진 과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건 데니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셀레누스 님은 아직까지도 내 곁을 지키며 현신하고 계신다는 걸, 내가 모르진 않았다.

    신이 현신을 거두고 다시 신계로 돌아간다면 내게 붙은 성녀라는 직함도 곧 떨어질 것이다. 다소 귀찮기는 했지만, 셀레누스 님은 나를 위해 끝까지 남아 계실 요량이신 것 같았다.

    “절 위해 하신 일인 거 다 알아요. 셀레누스 님.”

    [그,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번 일은 제가 너무 예민했어요. 저렇게 예쁜 아이가 미래에서 기다릴 텐데.”

    옥신각신하며 잘 놀고 있는 데니스와 셰리안을 가리키자, 셀레누스 님도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다시 황금빛이 되셨다.

    [큼, 내 계약자였던 데니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둘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셰리안을 데려왔단다.]

    셀레누스 님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 손바닥 위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위엄은 없고 귀엽기만 하셔서 웃음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족계획이 수월하게 풀리겠어요.”

    셰리안의 존재 덕에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을 갖는 게 더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나는 내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다. 그걸 계속 의심한 것은 나였다.

    성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존재가 되었으면서도, 나를 의심한 건 내가 겪은 과거가 끊임없이 내 발목을 잡을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좀먹고 있던 건 나였다.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나니 내 안의 결핍이 보다 명확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괴로웠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까.’

    아이를 가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을 내가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 망설인 것이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를, 그리고 내 남편인 데니스를 믿고 셰리안과 크리스틴을 품에 안을 거다.

    셀레누스 님이 깨달음을 얻은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넌지시 말씀하셨다.

    [너는 너 자신에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택한 자랑스러운 아이야.]

    “……네.”

    [설령 내가 너를 이 세상의 구원자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그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다. 모든 인간이, 생명체가 그러하다. 그러니 네 유년 시절을 괴롭혔던 어둠에서 이제는 벗어나도 된다.]

    “……감사합니다, 셀레누스 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식상한 말처럼 들리기까지 하지만 셀레누스 님이 나를 아껴서 하는 것임을 알기에 뭉클해졌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사랑받고 싶어 했다. 완전히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너를 만든 것에는 네 지난 기억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괴로워하지 않고 그 기억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거야.]

    셀레누스 님의 말대로였다. 셰리안이, 크리스틴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희망을 얻었다.

    “네. 저는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행복해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과 언제까지나 함께.

    “루시, 셰리안이 같이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네요.”

    셀레누스 님과의 대화가 길어지자, 데니스가 우릴 보고 슬쩍 셰리안을 핑계로 끼어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셀레누스 님과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거겠죠!”

    “너도 어머니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긴 했잖니. 봐주렴.”

    “흥. 초콜릿 아이스크림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어째 셰리안은 셀레누스 님의 말버릇을 닮아 가는 것 같은데…….’

    토라진 모습이 정말 셀레누스 님이 삐졌을 때와 똑같았다. 미래에도 셀레누스 님은 나와 내 가정을 지켜 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되신 것 같았다. 안심이었다.

    “뭘 하고 싶길래 그러니, 셰리안?”

    상냥하게 미래의 아들에게 묻자, 셰리안이 우물쭈물거리다 나를 향해 간절하게 물었다.

    “같이 외출하고 싶어요, 어머니. 아버지랑 셀레누스 님이랑 같이요.”

    “어디로 가고 싶길래?”

    아이의 입가가 설렘으로 작게 들썩였다.

    “어머니께 가장 의미 있는 장소에 같이 가고 싶어요.”

    셰리안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이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를 바로 알아챘다.

    “……릴리안 고모님이 잠드신 곳에 가 보고 싶니?”

    “네!”

    그러고 보니, 셰리안의 회색 머리칼은 나를 닮은 것이기도 하지만 릴리안 고모님의 머리 색과 같기도 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그래. 가 보자꾸나. 고모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야.”

    ***

    릴리안 고모님의 유해는 수도 인근의 고즈넉한 숲에 안장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내 뜻이었다.

    유해가 발견된 지점은 예전에 내가 과거에서 봤던 은신처와 같은 곳이었다. 아마 추측하기로, 그 아담한 저택에서 숨어 계시다 아벨의 습격을 받고 돌아가신 듯했다.

    고모님의 돌아가신 남편까지도 같이 합장하여 묻어 놓은 무덤가에는, 사과나무가 가득 심어졌다. 그리고 전적으로 내 뜻에 의해 항상 싱싱한 백합이 놓였다.

    “인사하렴, 셰리안. 여기 잠드신 분이 내 은인이신 릴리안 고모님이셔.”

    미래의 아들과 함께 릴리안 고모님의 무덤에 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먹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릴리안 고모할머님! 미래에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고모할머님께서 저희 어머니의 수호천사가 되셔서 지금은 하늘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요.”

    내가 그런 이야기도 다 했던 모양이다. 셰리안은 천사가 된 고모님의 이야기가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인지, 한참을 동경 어린 눈빛으로 무덤가의 풀포기를 쓸었다.

    “저도 릴리안 고모님을 본받아서, 제 동생 크리스틴을 지키는 멋진 사람이 될 거예요.”

    반짝반짝한 눈망울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 자세히 들여다본 셰리안의 내부에는 신성력이 가득했다.

    [저 애는 너보다 더 대단한 인간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직 어린데도 신성력을 담는 그릇이 저렇게 크다면, 미래가 기대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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