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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53화 (153/166)

153화

저 애가 방금 나를 보고 어머니라고 한 게 맞나?

나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정교한 넝쿨무늬가 들어가 있던 찻잔은 와장창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각나고 말았다.

“……너 누구니?”

내게는 아이가 없는데. 지나치게 나와 데니스를 빼닮은 사내아이가 나를 보며 어머니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사생아는 없을 텐데?’

나도, 데니스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지극했기 때문에 따로 정부를 만들 바에는 죽음을 택할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데니스가 더 그랬다. 그 사람은 제 어머니가 정부들로 인해 고통받았던 세월을 겪은 만큼, 아내를 두고 다른 이와 정분을 나누는 걸 극도로 경멸했다.

‘그럼 저 아이는 뭐지?’

천천히 걸어 그 아이의 앞으로 가서 살펴보니 더욱 기이했다. 머리카락은 내가 각성하기 전의 빛깔이었고, 눈은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와 똑같았다.

‘얼굴도…… 똑같아.’

틀에 찍은 것처럼 아이는 데니스를 닮은 얼굴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조마조마함이 뚝뚝 떨어졌는데, 그게 정말 데니스와 똑같았다.

“아가, 너는 누구니? 여긴 어떻게 들어왔고?”

아이의 정체를 모르지만, 무섭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빼닮은 아이를 함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저는…….”

아이가 내 질문에 우물쭈물거리자, 답답했는지 옆에 작은 참새 모양으로 변해 있던 셀레누스 님이 대화에 끼어드셨다.

[내가 설명해 주마!]

“셀레누스 님!”

[그 아이는 미래의 너와 데니스의 아이다. 올해로 일곱 살을 맞이하는 건강한 사내아이지.]

“……네?”

방금 제가 뭘 들은 거죠?

***

한 번 사는 인생. 그 인생에서 성녀가 되어 배우자의 과거를 보는 일도 희박한 확률이건만.

‘미래에서 아이가 나를 보러 오다니.’

이 충격적인 상황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의 얼굴만 힐끔거렸다. 아무리 봐도 나와 데니스의 아이였다. 너무 신기했다.

“어, 어머니. 그렇게 바라보시면 제가 너무 부끄러운데요.”

“아, 미안하구나.”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아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익었다. 귀까지 빨개진 아이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상상이나 꿈에서 본 아이와는 다르구나.’

미래에서 온 아이, 그러니까 내 아들은…… 쑥스러움이 많고 수줍은 성격으로 보였다. 내가 어머니일 텐데도 뚫어지게 쳐다보면 곤란한 듯 고개를 홱 돌리는 걸 보면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어허, 셰리안! 왜 그렇게 기가 팍 죽어 있느냐! 네가 오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갑작스럽게 바로 냅다 데려오실 줄은 몰랐죠!”

[너도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쳇,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더니만……. 흑흑. 돌아오는 건 이런 잔소리라니…… 내 신생, 이리 기구하여 어찌하누.]

셀레누스 님이 눈물을 쥐어짜기라도 할 것처럼 우는소리를 내자 착한 아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맸다.

“아니, 잔소리가 아니라 이건 타당한 항의라고요……. 우, 울지 마 세요.”

셀레누스 님이 우실 리가 없었다. 그것도 고작 저런 어린아이와의 대화로 상처받아 울 신이라면 애당초 인간에게 실망하여 스스로를 봉인하셨을 때 소멸하셨을 것이다.

[아이고, 서러워서 살 수가 없네.]

“……그쯤 하시죠. 셀레누스 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한테 그게 무슨 짓이세요.”

[쳇. 나는 뭐 장난 좀 치면 안 되느냐?]

셀레누스 님을 나무라자 툴툴거리셨지만 곧 아이를 놀리는 걸 그만뒀다. 아이, 셰리안은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걸 깨닫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씨근덕대고 있었다.

‘아, 화가 났구나.’

셰리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귀여웠다. 잠시나마 셀레누스의 장난이 이해가 갔다.

셰리안은 실체가 없어 때리지도 못하는 셀레누스 님께 방울토마토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왜 그러셨어요, 셀레누스 님! 진짜 우시는 줄 알았잖아요.”

[울고 싶긴 했다!]

“안 우셨잖아요! 거짓말쟁이!”

[신보고 거짓말쟁이라니, 너 그러다 지옥 간다?]

“헉. 지, 지옥은 싫어요…….”

가엾게도 셰리안은 또 셀레누스 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이는 작은 두 손으로 입을 꼭 막고는 절대 지옥에 가기 싫다는 뜻을 표출했다.

“셀레누스 님, 정말 그만하세요.”

[힝.]

“귀여운 척도 하지 마시고요. 그것보다, 이 아이를 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궁금합니다.”

내게는 이게 더 중요한 용건이었다. 데니스도, 나도 서로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서로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제한적으로.

‘그런데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과거로 왔다는 건…….’

또 어떤 큰일이 미래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잔뜩 굳은 얼굴로 답을 재촉하자, 셀레누스 님은 한숨을 쉬며 황금빛 조그만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 난 건 아니다. 미래의 너와 네 남편, 그리고 아이들도 무사해. 이전처럼 괴로운 일은 없단다.]

아이들? 방금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했나?

셰리안 외에 또 다른 아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그건 뒤로 미뤘다.

“그럼 왜 저 아이를 데리고 오셨나요?”

처음 보는 아들의 존재는 신기하기도 했고,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아들이나 이름인 셰리안을 말하기가 어려워 그저 아이라 칭하자 셰리안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미래의 네가 아이들에게 말했거든. 너희들을 낳기 전에 몹시 두려웠다고.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고.]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과거로 오셨다고요?”

[그래. 너는 내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니까. 네가 괴로워하는 걸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랬어.]

“…….”

할 말을 잃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나를 챙겨 주고,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기쁨에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었다.

내 동요를 읽은 것일까. 계속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고 싶다는 표정을 짓던 셰리안이 내 곁으로 종종 걸어왔다.

“제, 제가 셀레누스 님께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에요. 셀레누스 님은 제 소원을 들어주신 것밖에 하지 않으셨어요.”

“…….”

“어머니가…… 과거의 어머니가 그렇게 괴로워하셨다는 걸 듣고 만나서 나는 괜찮다는 말을 해 드리고 싶었어요. 꼭, 안아 주고 싶었어요.”

일곱 살 어린애답지 않은,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셰리안은 정말 괜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내가 부담스러울 것을 염려한 것인지 나를 끌어안지는 못했다.

아가. 너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을까?

“저는, 그리고 제 동생 크리스틴도 어머니를 사랑해요. 설령 이 과거에서……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함께 둘만 살아가기를 택한다고 하셔도 괜찮으니, 어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좋겠어요.”

새벽에 이슬이 맺힌 은방울꽃처럼 웃는 셰리안의 모습은 한 점의 티도 없이 사랑스러웠다.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아이는, 셰리안은 진심으로 내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미래에 셰리안과 크리스틴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웃기를 바라며 과거로 잠시 건너온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 기특하고 가여워서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

“어머니……?”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나는 무서웠어.”

내가 내 아버지와 같은 괴물이 되어 태어난 아이들을 괴롭히게 되면 어떻게 할까.

나는 아버지와 다른 인간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이미 오랜 시간 스며든 아버지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다. 먹는 취향에서부터,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 내게 더는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나는 그가 두려웠다. 내가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던 아버지의 면모를 닮아 내가 사랑하는 이와의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도 부모로서 괜찮다고 너는 나를 위로해 주러 와 주었구나.”

툭툭.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사랑스러운 내 미래의 아들, 셰리안을 붙잡고 조용히 울었다.

“저도, 크리스틴도, 아버지도 어머니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나도! 나도 그렇다! 루스벨라야!]

셰리안이 조심스럽게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자, 셀레누스 님도 질세라 나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며 고백을 해 왔다.

“하하.”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그렇게 고민했을까. 그것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어? 어머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고 그러셨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뿔은 유니콘 외엔 자랄 수 없다. 하물며 엉덩이에 뿔이 나는 건 유니콘이라 해도 불가능이야!]

“아니거든요! 셀레누스 님, 지금 우리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틀렸다는 거예요?”

[……루스벨라를 걸고넘어지는 건 반칙이다! 이 귀엽지만 가끔은 얄미운 셰리안아!]

아웅다웅하며 사이좋은 신과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은 더 커졌다.

‘정말 괜찮을 것 같아. 아이 가지는 일.’

셰리안은 한눈에 봐도 영리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인 크리스틴이 어떤 성격인지는 몰라도, 그 아이도 분명 내가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아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셰리안의 풍성한 회색빛 고수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 셰리안. 미래의 귀여운 내 아들. 네가 와 준 덕에 엄마가 결심을 내릴 수 있게 되었구나.”

“어? 그, 그럼…….”

“미래에서 기다려 주렴.”

어여쁜 내 아이들. 너희들을 반드시 만나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 노력할게.

데니스가 으레 내게 그러는 것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아이의 보송보송한 이마에 해 주었다. 연약하고 보드라운 셰리안의 피부는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아빠를 닮아 아주 똑같이 정직한 반응이었다.

“어머니……!”

감동받은 셰리안이 나에게 연신 쪽쪽 입을 맞췄다. 뺨이 아이의 입맞춤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루시, 나 왔……. 응? 그 아이는 누굽니까?”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데니스가 나와 셰리안, 그리고 셀레누스 님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셰리안을 품에 안고 데니스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인사해요. 여긴 미래에서 온 우리 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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