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아이요?”
“네. 아이요. 우리의 아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오늘도 끈질기게 날아온 교단의 간곡한 편지를 거절하려던 나는, 별안간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이라니.’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였다. 그래서 몹시 당황스러웠다. 데니스는 내 동요를 읽고 괜찮다는 듯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루시, 당신에게 겁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내가 겁을 냈어요?”
“표정이 꼭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밤에 유령을 목격한 것처럼 창백했어요.”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낳는다 해도 잘 기를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은 가정에서의 학대로 얼룩져 있었다. 지금은 아동 학대 건으로 징역을 받아 감옥에 간 내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얼마나 증오스러울 수 있는지를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도 모르지는 않겠지.’
데니스야말로 내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사람이었다. 그 역시 이제는 죽은 선대 후작의, 말로 다 못 할 학대와 무시 속에서 자라 왔으니까.
“나는…… 내가 좋은 부모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두려웠다. 데니스가 데벤테르 공작이고, 내가 공작부인인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문제였지만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갈 것처럼 어지러웠다.
‘내가 만일 내 아버지처럼 태어날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면 어쩌지?’
오로지 내 걱정은 그뿐이었다. 데벤테르 가문은 모자란 것이 없었다. 내가 아이를 가져 낳는다면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데니스를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말이지 사랑스럽겠지만, 내가 그 아이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살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서 그래요? 당신이 아버지처럼 될까 봐?”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와는 다른 인간이에요. 완전히 별개의 인간.”
“……알아요.”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나는 강해졌고, 더는 나를 괴롭힐 요인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트라우마란 몹시 강력하여 내게 아직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난 아이를 가지고 싶던가?’
이 질문 자체가 생소했다. 집을 벗어나고, 데니스와 결혼을 한 것만으로도 난 내 삶에 충만감을 느껴서 그다지 아이에 대한 계획은 짜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은 나처럼 두렵지 않나요? 데니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저는 단지 당신의 의사를 미리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도…… 나도 선대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은 영역이었거든요.”
데니스 또한 아이를 가지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지, 썩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는 그를 보며 안심했다.
겨우 찾은 평화를 아이를 가지는 문제로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귀족 집안에서 후계자가 중요한 만큼, 데니스가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 성화라도 부렸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나는 루시, 당신의 의견이 제일 중요해요. 설령 우리 인생에 앞으로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어도 괜찮아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아이라면 나도 원하지 않아요.”
“……정말요?”
“당연하죠. 난 당신과 이루어진 지금도 충분히 넘치도록 행복하니까. 아이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두 손을 꼭 잡으며 시선을 맞춘 그의 눈빛에서는 거짓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최우선으로 위하는 헌신적인 데니스가 있어 내 불안은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우리. 시간은 아직 많고, 우린 젊고. 아이에 대한 고민은 깊게 해도 괜찮아요.”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부부가 아이를 되도록 빨리 낳으려 하는 것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발언이었다. 늦게 아이를 낳을수록 난산의 위험이 있을뿐더러, 대체로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해 그런다는 소문이 퍼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내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누군가 당신을 향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불쾌한 소리를 지껄인다면 그 입을 내가 찢을게요.”
실로 무서운 협박이었지만, 데니스라면 그 일을 실제로 해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전혀 끔찍하지 않았다.
‘귀여워라.’
사라진 과거까지 직접 보고 온 내 입장에서 데니스의 그 협박은 귀여운 애교에 불과했다. 어차피 나는 거의 공식적인 성녀였고, 데니스는 데벤테르 공작이니 함부로 건드릴 사람도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긴데도 입은 찢지 말고 깔끔하게 감옥에 넘기죠.”
“음, 그럴까요?”
“당신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별로 바라지 않는 일이라서.”
“그렇다면 루시 뜻대로 할게요. 난 부인 말 잘 듣는 착한 남편이 될 거니까.”
내가 데니스를 걱정하여 한 말에 그는 냉큼 좋아하며 내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한없이 순종적인 태도였다.
“이젠 내숭 부리기로 한 건 그만둔 거예요?”
“당신이 나의 이런 모습조차도 받아들여 줄 걸 아니까, 괜찮아요.”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말. 그 말이 그 어떤 고백보다도 내겐 가슴 뛰는 달콤함으로 다가왔다.
“내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요, 루시.”
“……나도 그래요.”
벅차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이의 익숙한 체취가 나의 불안을 사그라들게 했다.
‘이대로도 괜찮다.’
데니스의 말이 옳았다. 겨우 찾은 평화 속에서 우리는 둘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를 원한 적은 없기에 차차 생각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아이, 아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미래가 내 마음속에 잔잔히 파문을 남겼다. 데니스의 질문으로 인해 처음으로 나는 아이들이 함께 있는 미래를 어설프게나마 그려 봤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한 개구쟁이 꼬마 도련님과 나처럼 회색 머리칼을 하고 붉은 눈동자를 지닌 어린 숙녀 아가씨를.
데니스와 나를 반반 닮은 상상 속의 아이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두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실인 아이들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 상상은 너무나 밝고 따뜻해서 중독적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내 아버지의 얼굴만 떠올리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상상은 오염되어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대신 내가 그 아이들을 괴롭게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안 돼.’
그 아이들은 곧 내 어린 시절과 겹쳐져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비약이란 것을 알지만, 신경 쓴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란 걸 알지만 괴로웠다. 나는 내 아버지와 적을 물리쳤음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직은 역시 우리 둘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데니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겁쟁이여서, 조금이라도 내가 지금의 평화로움을 깰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럼. 루시가 원하지 않는다면 계속 이대로 우리 둘만 살아도 괜찮아요.”
데니스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내 대답을 듣고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양 내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분간 이 화제는 꺼내지 않기로 해요. 내겐…… 시간이 많이 필요한 주제인 것 같아서요.”
“부담을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아이 문제를 꺼리는 나를 보며 데니스가 울상을 지었다. 그건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아쉬움에서가 아니라, 순수히 나를 걱정하는 눈빛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신을 괴롭게 할 생각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따스한 그의 품에서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 당신은 그렇게 내게 쩔쩔매나요?’
내 표정에는 무엇이 묻어났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경계심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에 대한 희미한 공포였을까.
어느 쪽이든 간에 내게는 유쾌하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하나같이 나의 아픈 구석을 찌르는 가시 같은 것들.
“데니스, 당신이 내게 잘못한 건 없어요.”
따지자면 잘못한 건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 모두 피해자였으니까.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아직도 남은 고통의 잔재로 괴로워하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그래요.”
내 삶에 아이들이 끼어들 틈이 아직은 없어요.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설탕 장식처럼 예쁘고 귀여운 아이가 나오는 꿈을.
[엄마!]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 아이는 내가 그렸던 것처럼 데니스의 금발을, 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다.
양 갈래로 탐스러운 금발을 곱게 묶은 아이가 내게 다가오자, 나는 그 아이를 안아 주려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게 다가오다 말고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그런데 왜 엄마는 나를 거부해?]
[내가 싫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게 아니라…….’
답을 해 줘야 했는데, 그 아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는데 입이 아교로 붙은 것처럼 달라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를 원하지 않는 엄마라면, 나도 필요 없어.]
사랑스러운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 아이를 붙잡지 못하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아이가…….”
나 때문에 아이가 가 버렸어.
멍하니 잠에서 깬 채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옆에 잠들어 있던 데니스가 깨고 말았다.
“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루시. 아이가 가 버리다뇨.”
“꿈에 아이가 나왔는데……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내가 그 아이를 거부한다고 사라졌어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였는데. 불쾌하리만치 생생한 꿈은 나를 아주 쉽게 진창으로 끌고 갔다.
“……루스벨라. 괜찮아요. 단지 꿈일 뿐이에요. 당신 잘못은 없어요.”
상황을 파악한 데니스가 나를 다독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아이에 대한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내가 아이에 대한 말을 꺼낸 일로 그렇게까지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데니스의 잘못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연신 내 등을 토닥이며 자신의 죄를 고했다.
그 후로 한동안 우리의 입에서 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서로 의식적으로 아이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손님이 우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것 보거라! 루시! 내가 누굴 데려왔는지 좀 보렴!]
내 어깨 위에서 항상 노닐던 셀레누스 님이 잠시 어딘가로 외출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어머니?”
회색빛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동자를 한, 어여쁜 사내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