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외전 1. 언제까지나 함께.
에덴과 아벨을 쓰러뜨린 후, 몇 개월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데벤테르 후작 가문은 에덴 사태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 가문으로 격상되었다.
“다시 한번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세요, 공작님, 그리고 공작부인!”
“고마워요, 지아나.”
그리고 나와 데니스는 기어이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상 이것이 우리의 진짜 결혼식이었다. 리스냐 성의 고용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의 진짜 결혼식을 축하해 줬다.
그가 가면을 쓰고, 나는 결혼할 상대의 얼굴조차 몰라 떠밀리듯 한 결혼이 아니라 진정 서로를 사랑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혼이었다.
유례없는 두 번째 결혼식이었지만, 아무도 우리의 결혼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감히 성녀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삿된 자가 있다면 교단이 직접 나서서 벌할 것입니다.”
아벨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 새로운 교단이 나를 음해하는 자들은 모조리 척결한다는 방침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흥. 이제라도 네가 제대로 대우받으니 그나마 낫긴 하구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잠들어 있던 신을 깨운 성녀라는 위치는 특별하여 더는 나도, 데니스도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셀레누스 님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무르며 새로운 교단이 내게 쩔쩔매는 것을 두고 못마땅하지만 받아들이시려는 투였다.
우리는 쨍한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는 화창한 날에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손을.”
“좋아요.”
우리는 흰색이 아니라, 찬란한 리스냐의 바다를 닮은 푸른 연미복과 웨딩드레스를 맞췄다. 부케는 물망초를 중심으로 한 것을 골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상의하고 결정해서 만든 결혼식이기에 특별했다.
주례로 교단의 새로운 교황이 나서고 싶어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데니스와 나는 주례 없이 서로에게 결혼식 선서 낭독문을 읽어 주기로 약속했다.
“나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먼저 내 목소리가 눈처럼 새하얀 성을 배경으로 울렸다. 뒤에 앉아 있는 하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두 사람, 평생 행복하게 잘 살라고!”
베네딕트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그가 우리를 향해 찡긋 윙크를 날렸다. 그걸 보고 데니스는 무척이나 어이없어했다.
“친히 남의 결혼식에 와서 한다는 게 체통 버리기라니…….”
결혼식은 소수의 하객만, 그것도 친밀한 사이인 사람들만 초대했지만, 황제 폐하께서 오고 싶다고 데니스에게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몇백 년 만에 등장한 성녀의 결혼식은 아주 특별한 행사였으므로, 기존의 세력을 몰아낸 황제에게 있어서도 꼭 참석해야 할 일이었다.
‘폐하께서 진짜 참석하시려는 이유는 순전히 흥미 때문인 듯하지만.’
데니스는 처음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베네딕트의 성정이 어떤지를 알았기에, 그냥 오게 하자고 데니스를 설득했다.
“괜찮겠어요, 루스벨라? 황제께서는 워낙 장난스러운 분이시라 가능하면…… 초대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별일은 없을 거예요.”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는 지금 썩어 있는 나라 안팎을 돌보느라 인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나나 데니스의 지지가 필요하겠지. 더불어 다시 중앙 정치와 사교계로 복귀하길 희망할 거고.’
한마디로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오려는 심산이면 모를까, 괜히 결혼식에 초를 치진 않으리란 생각에 황제의 참석을 개의치 않았다.
데니스는 내 뜻을 최대한 존중하는 훌륭한 남편이었기에, 결국 황제가 된 베네딕트를 초대했다.
“이건 내 결혼 축하 선물이야. 데벤테르 공작 부부.”
베네딕트가 손짓을 하자 뒤쪽에서 마법사들이 나와 하늘로 축포를 쐈다. 마나를 실은 기운이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터지더니 아름다운 꽃가루를 만들어 지상에 뿌려졌다.
‘아름답다.’
그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행복함과 경이로움을 담은 붉은 두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설령 내 목숨이, 이 세상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고 위할 것을 굳건히 맹세합니다.”
흔할 수도 있는 결혼 선언문이었지만, 우리가 밟아 온 숱한 고비를 떠올리면 절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말들이었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행복해질 나날들이 남았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그와 내가 이룬 값진 미래를,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랑해요, 데니스.”
“나도 사랑해요. 루스벨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맞물린 입술에서는 베네딕트 황제가 쏘아 올린 꽃잎의 향기가 어렴풋이 났다.
주위에서 하객들의 축하와 환호가 무어라 들리긴 했지만, 내 앞의 이 사람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외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우리는 마치 처음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처럼 애절하고,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앞으로 살면서 같이 만들어 가면 되죠.”
입맞춤을 끝낸 후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리며 다가올 미래를 꿈꿨다. 그의 금색 머리카락과 나의 은색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였다.
미래에는 무엇이 또 있을지 모른다. 걱정거리가 아예 생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새로운 위협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께 이겨 낼 것이다.
언제까지나 함께.
그러한 감상을 깨는 건 역시나 베네딕트 황제 폐하셨다.
“이봐, 공작 부부! 금슬 좋은 건 인정하지만 이제 슬슬 피로연으로 이동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
“……역시 초대하지 않는 게 나았을 것 같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조신하고 착하고 잘생긴 남편 말 들어서 나쁜 거 하나도 없었다. 명심해야겠다.
소소한 복수를 위해 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물망초 부케를 하늘 높이 들어 황제를 향해 조준했다. 그리고 던졌다.
“어, 어어?”
“선물입니다. 황제 폐하. 저희 결혼을 축복하셨으니 마땅히 드려야 할 부케지요.”
부케는 무사히 베네딕트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성녀가 던지는 꽃다발이 해가 될 리 없으므로 황제의 호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부케를 받은 베네딕트는 멍한 얼굴이었다.
“부케를 받은 이는 반년 안에 결혼하게 된다는 말 아시지요?”
“뭐…….”
“반년 안에 들려올 국혼 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내 말에 베네딕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가 딱히 결혼에 뜻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데니스도 알고, 그의 옆에 계신 태후인 이벨린 폐하께서도 아시는 일이었다.
즉위한 황제의 옆에는 마땅히 반려인 황후가 있어야 할 터. 그 압력에 시달린다는 걸 내가 모를 수 없었다.
‘계속 국정을 돌본단 핑계로 미루시고 계셨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십니까, 폐하.
“어머, 저희 부부의 부케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나요? 축복까지 얹은 꽃다발이건만…….”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찌 성녀님의 축복 어린 부케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 하하.”
내가 공식적으로 성녀의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나를 성녀라 불렀다. 베네딕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부케를 받아들였다.
반대로 이벨린 태후 폐하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성녀님의 부케를 받았으니, 저도 곧 며느리를 볼 수 있겠군요.”
그 말에 어째 주변에 있는 영애들의 표정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매처럼 그녀들은 젊고 잘생긴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베네딕트는 울고 싶은 표정이었다. 성녀가 준 부케라 버리지도 못하는 것이 아주 조금 가엾어 보였다.
데니스가 내 귓가에 고맙다는 소리를 달콤하게 속삭여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마워요, 루스벨라. 폐하께 아주 멋지게 한 방 먹여 줘서요.”
“나와 결혼하길 잘했죠?”
“네.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네요.”
그가 수줍게 말하며 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황제에게 부케를 던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불충한 생각인지.
이게 다, 사랑스러운 남편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시 입을 맞췄고, 나는 기쁜 마음에 신성력을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모여 준 하객들을 위해 사용했다.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
좋은 일 뒤에는 안 좋은 일이 뒤에 따라오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결혼식이 끝난 후 며칠 뒤, 우리는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선대 데벤테르 후작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라진 미래와는 다르게 데니스에게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했다. 그 덕에 내 치유를 받아 적어도 고통 없이 남은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다.
선대 후작은 죄책감에 차마 우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그저 별장에만 머무르며 조그만 선물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내 몫으로 하나, 데니스의 몫으로 하나, 그리고…… 원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태어날 손주를 위해 하나를 두고 숨을 거뒀다.
“로켓이네요.”
“우리 둘의 초상화가 있어요. 언제 이런 걸 준비하신 거지?”
선대 후작이 우리 부부의 선물로 남긴 것은 서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로켓이었다. 각각 금과 은으로 세공된 로켓은 선대 후작이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고 축복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음…… 그렇지만 이 선물은 조금 난감하네요.”
“……그러게요.”
데니스와 내가 반드시 후계자를 낳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선대 후작은 마지막까지 꼭꼭 감추고 있던 본인의 비자금을 모두 털어 미래의 손주를 위한 수표로 만들어 주었다. 유언장 같은 짧은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태어날 손주에게.
네 부모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많아 대신 네게 남긴다. 남아건 여아건 상관없으니 후에 요긴하게 쓰거라.
그 말이 전부였다. 그 외엔 이렇다 할 유언 없이 그는 별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생전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참으로 초라한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를 가문 소유의 공동묘지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렀지만, 화사하고 경쾌했던 결혼식과는 다르게 찾아오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선대 후작의 죽음은 그다지 우리에게 슬픈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후계자를 위한 유산은 우리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데니스가 내게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스벨라. 아이…… 키우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