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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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반란으로 인한 아수라장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제국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에덴의 잔당들까지 모조리 척결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들 거라 예상했으나, 루스벨라의 존재 덕에 수월해졌다.
“……진짜 신이 현신하시고, 그분이 선택하신 성녀님이 각성하셨으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자수합시다.”
“아벨 님이 돌아가셨으니 이미 구심점은 사라졌습니다. 에덴의 명맥을 이으려 해 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에요.”
“황실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빠져나갈 방도는 없어. 끝이야.”
전투 현장에서 잡힌 신도들 외의 사람들은 황실이 아벨이 죽었다는 소식을 퍼뜨리자 알아서 수도로 올라오더니 자수했다.
황실에 반역을 일으킨 죄, 마땅히 사형으로 처리해야 하나 그 가족들까지는 죽이지 말라고 읍소하고자 자수한 것이었다.
베네딕트 황태자는 이를 두고 손수건도 안 쓰고 코 푸는 격이라며 좋아했다.
“어렵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허, 참. 그 인간들도 피붙이의 소중함은 알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다니. 참 모를 일이야…….”
본래대로라면 반란군의 가족들마저 모조리 죽여야 하지만, 황실은 드물게 자비로움을 보여 자수한 이들의 가족들은 살려 주었다. 대신,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역장으로 그 가족들을 보내 살려 준 목숨값을 치르게 했다.
이는 전적으로 황태자의 결단이었다. 진상을 데니스와 아슬란에게서 들었던 그는 신성력 보유자를 죽여서 얻은 영화로움을 나눠 먹은 신도들의 가족들조차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제국이 세워진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그것도 못 치러서야 되겠나.”
귀족들 역시 황태자의 결정에 반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들 또한 제국이 통째로 광신도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했던 일을 끔찍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벌 절차는 쉽게 밟았다.
많은 것이 변했다. 베네딕트 황태자와 데니스, 루스벨라를 주축으로 낡고 부패한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이 들어섰다.
뿌리부터 썩었던 교단은 아예 없애 버렸다. 신전에 상주하던 사제들은 모조리 이단으로 간주하여 쫓아냈고, 빈 신전에는 셀레누스의 상징과 조각상 등이 들어섰다.
[크흠. 돌아오니 이런 점이 좋구나. 부족했던 힘이 빠르게 차는 것이 느껴져.]
신은 인간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힘을 내기에, 셀레누스는 이 결정에 몹시 만족했다. 그는 제국을 위해 몇 년간 풍작이 내릴 것이라 일러 주었으며, 베네딕트는 그 말에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선대 황제 폐하의 죽음은 역사에 낱낱이 기록될 거야. 황제로 돌아가셨지만, 폐위된 것으로 만들 거고.”
베네딕트는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불러 그의 아버지이기도 한 선대 황제를 폐위시킬 거라는 말을 했다. 그 자리엔 선대 황후인 이벨린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상의한 내용인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셔도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뭐, 황실의 권위가 조금 손상이 가겠지만 이게 맞는 일이지. 제국과 가족까지 버리고 탐욕만을 좇던 사람을 끝까지 황제로 남게 하는 건 아니라고 봐서.”
“그렇다면 황태자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고마워. 두 사람 덕에 내 대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 없도록 할게.”
데벤테르 후작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서 베네딕트는 국정을 빠르게 안정시켜 갔다. 망가진 황성을 복구하고, 불안해하던 제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에덴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밝히며 혼란을 종식시켰다.
“그나저나, 데벤테르 후작부인. 새로운 국교에서 그대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던데.”
베네딕트의 말에 우아하게 차를 마시려던 루스벨라가 멈칫했다. 그녀는 호록 차 한 모금을 마시더니 대답했다.
“그 일에 대해서 저는 거절했으니, 더는 언급하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하.”
“제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 전하.”
데니스가 루스벨라의 편을 들며 베네딕트를 흘겨봤다. 사이가 돈독한 부부를 보며 베네딕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네, 알겠어.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본 거야. 하도 새 교단에서 내게 성녀님의 존안을 좀 뵙게 해 달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황태자 전하께서 그 징징거림을 다 들어줄 분이 아니실 텐데요?”
“자네 너무 날 잘 아는군. 이 나라의 좋은 일꾼으로 평생 일해 줘야겠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베네딕트의 말에 데니스는 인상을 썼다. 이미 한계치까지 데니스를 여기저기 부려 먹고 있던 베네딕트였다. 좋은 일이라 뭐라 하기도 뭣해서 그동안은 참았지만, 평생은 절대 아니었다.
대신 루스벨라가 그를 구원하러 나섰다.
“그러지 마십시오, 황태자 전하. 이 사람은 저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산더미 같은걸요.”
“끙……. 한 40년 뒤에 하면 안 되겠나? 그대 남편은 정말 훌륭한 신하라 평생 곁에 두어야 할 것 같은데.”
“제 남편인걸요. 그리고 저희가 이런 말을 직접 올리긴 민망하지만, 제국을 구한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자유롭게 해 주시지요.”
비공식적 성녀님께서 싱긋 웃으시며 보상으로 남편의 자유를 요구하시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딕트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데니스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행정직 관료들을 뽑으라는 문서를 작성하며 울상을 지었다.
“이럴 때 윈체스터 공작이라도 있었으면 좀 좋았을 텐데.”
베네딕트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수도로 돌아온 이후 다시 북부의 설원으로 조사대를 파견했지만, 끝내 아슬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내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제발 제 아들을 찾아 주십시오.
선대 윈체스터 공작부인은 아슬란과의 사이가 틀어진 탓에 뒤늦게 그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아슬란이 그녀를 북부로 부르기 위해 꾀를 쓴 줄 알았으나, 이내 실종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졌다.
-내가…… 그 아이를 마지막에 봤을 때 매몰차게 말하지 말 것을.
선대 공작부인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직까지도 아들을 찾아 북부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루스벨라와 데니스에게도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칠 뻔했지만, 황실의 배려로 만남은 차단당해 결국 보지는 못했다.
“그는 정말 어디에 있을까요?”
“시체가 없어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은 분명한데……. 북부의 주민들이 영지를 싹 뒤져도 나오지 않으니 이젠 죽었다고 보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아슬란이 스스로 모습을 감추기로 선택했다면, 우리가 뭘 어쩔 수 있겠어.”
베네딕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언젠가 아슬란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데니스도 아주 조금은 그런 마음이었다. 아슬란이 설마 이런 방식으로 루스벨라를 위한 속죄를 하려는 것이라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아 참. 에덴의 신도들과의 재판에서 증인 역할을 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베네딕트가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질문했다. 데니스가 성실하게 답했다. 손은 부지런히 루스벨라를 위한 디저트를 먹이면서.
“그들은 전부 포상금을 넉넉히 주어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알렉은 원하는 대로 외국으로 망명시켜 주려 했는데…….”
“했는데?”
“에덴에 연루된 사제들이 사형당하고, 그 가족들이 노역장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망명을 포기했습니다. 약속했던 돈을 받지 않는 대신에 가족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
데니스는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허가해 주십시오, 전하.”
“이게 뭔가?”
“알렉의 공로를 인정하여 새로운 국교의 대사제로 일하게 해 달라는 문서입니다. 그는 유용한 인재이니, 앞으로 교단 측 힘이 또 커질 때를 대비하여 심어 놓는 게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도 동의했나?”
“뭐…….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이걸로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니 동의했습니다. 대신, 그는 대외적으로는 사제이되 황태자 전하의 직속으로 부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렉은 이번 일로 상당한 스릴을 즐겼는지, 생각보다 이런 의뢰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데니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베네딕트에게 그를 기용하기를 부탁하고 있었다.
“후작이 보증하는 인재고, 그도 제국을 구한 일등 공신 중 하나이니 들어주겠네.”
“감읍합니다.”
“감읍하면 계속 일 좀…….”
“안 됩니다. 전하. 제 부인과 저는 이제 떠날 거거든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행복과 평화로움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였다.
“어디로 말인가?”
“저희가 신혼여행지로 갔던, 리스냐의 해안으로 향할 겁니다.”
***
루스벨라의 신성력을 이용한 공간 이동을 한다면 금방 갈 리스냐였지만, 두 사람은 신혼 때처럼 짐을 꾸려 게이트를 이용해 다시 하얗고 푸른, 아름다운 성으로 향했다.
“다시 이 바다를 당신과 보러 올 줄은 몰랐어요.”
“나도요.”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성 내의 고용인들에게 짐을 정리할 것을 지시하고, 간단한 차림새만 갖추고 나와 비취색 해변을 걸었다. 맞잡은 손을 풀지 않고 걷는 해변은 아름다웠다. 석양이 지는 때라 그런지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걷다가 해변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있잖아요, 루스벨라.”
“왜요? 데니스.”
“내가 다시 청혼한다면, 받아 줄래요?”
그가 지고 있는 태양보다 더 새빨간 얼굴로 작은 보석함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반지가 한 쌍 있었다. 반지에 박힌 보석은 옐로우 다이아몬드로, 릴리안의 성력석 색깔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때……. 당신을 구하기 위해 급하게 결혼식을 치렀지만, 사실은 더 근사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을 정식 청혼으로 받아들여 주면……. 읍.”
“물론이죠. 왜 그렇게 긴장해요?”
당연히 내가 받아들일 건데.
루스벨라는 그녀의 앞에서만 약해지는 데니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겹쳤다.
입술이 떨어진 순간, 루스벨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날 위해 시간을 건너와 줘서.”
“나도 사랑해요. 내가 가장 외롭던 때에 나타나 줘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겹쳤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