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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9화 (149/166)

149화

분명 펑 하고 터지는 폭발 소리를 들었다. 루스벨라는 그녀도, 데니스도, 아슬란도 모두 아벨의 자폭 때문에 죽은 줄만 알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려고 그 괴로운 과거를 넘어 각성까지 한 게 아닌데.’

아벨이 루스벨라의 손목을 낚아채고, 아득바득 남아 있는 악의를 모두 긁어모아 그녀가 보낸 공격까지 끌어다가 폭발을 일으킬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데니스를 죽게 만든 거야. 그라도 멀찍이 떨어져 있게 해 뒀어야 했는데. 그러면 좋았을 텐데…….’

폭발 때 질끈 감은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은 것인지, 의식이 너무나 멀쩡했다.

루스벨라는 그게 과거를 돌아다닐 때처럼 그녀가 영혼만 남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루스벨라, 아가, 눈 좀 뜨렴?]

“……어?”

그런데 별안간 웬 따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루스벨라는 곧바로 두 눈을 번쩍 떴다.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 착하고 강한 내 조카.]

“릴리안 고모님…….”

은은한 황금빛 빛무리를 두른 릴리안이 루스벨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환하고 따스한 빛의 공간 속에 서 있는 릴리안은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과거에서 봤던 수척했던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얼굴 때문도 있었다.

“고모님!”

루스벨라는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릴리안에게 안겼다. 릴리안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의 상쾌한 향이 풍겼다. 그리움의 향기였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분명, 아벨이 자폭하기 위해 성력석을 터트린 것 같았는데.”

각성한 후 신성력의 흐름에 민감해진 덕에 루스벨라는 폭발이 터지기 직전, 그가 가진 주머니의 성력석의 에너지 체계가 붕괴되어 터지는 것을 알아챘다. 피하지 못한 것이 슬플 따름이었다.

“저는 죽은 건가요?”

[왜. 내가 보이니 확실히 죽은 것 같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두려우니?]

“당연한 것을요. 저는 꼭 살아야 해요. 제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데니스와 해 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둘 다 각자 한 번씩의 죽음을 맞고서야 어렵사리 이루어진 인연이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어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예전의 나약하던 그 꼬마 아가씨가 아니구나. 많이 달라졌어. 굳건한 눈빛이 마음에 드는구나.]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제가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고모님께서 저와 제 남편을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발 저희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루스벨라가 간곡히 요청하자 릴리안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너무 겁먹지 말렴. 너와 네 남편은 죽지 않았단다. 폭발이 터지는 순간 이 공간으로 끌려왔으니, 현실에 있는 너희의 육신은 아주 안전해.]

“그 말씀은……!”

[잠시 기절해 있을 뿐이야. 흠,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면 빨리 의식을 돌려보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말이다.]

북부가 워낙 추워야지. 릴리안이 덧붙인 말에 루스벨라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도, 그도 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행복했다.

“저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죠? 데니스도?”

[그래. 폭발에 휘말린 것은 아벨, 그 인간뿐이니 안심해라.]

“그건 좀 아쉽네요. 아벨은 꼭 제 손으로 숨을 끊고 싶었는데…….”

‘아벨이 나와 데니스에게 끼친 해악이 얼마였는데, 이렇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니.’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목숨을 부지하자 아벨을 직접 죽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통탄하였다. 실망감에 손가락만 꿈지럭거리는 조카를 보던 릴리안은 그녀를 달랬다.

[너무 복수에 집착하지 말거라. 아벨을 보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불사를 좇다가 저 지경이 되어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네 손을 피로 물들여 가며 복수를 할 필요는 없단다.

“하지만…… 그 자식은 고모님까지도 죽인 거잖아요. 기운을 느꼈어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봤던, 고모님의 신성력의 기운을요.”

루스벨라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곳의 릴리안은 결국 아벨과 에덴의 잔혹한 살해 행각에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었다.

“그런 극악무도한 놈을 제가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어요? 고모님의 원한까지 합쳐 복수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정말.”

[나는 괜찮다. 그것보다는 너의 행복이 중요하지. 혹시나 싶어 내가 죽을 때 성력석에 건 저주이자 가호가 잘 작동한 것 같아 기쁘기만 하구나.]

릴리안이 천천히 다가와 루스벨라의 은빛 머리칼을 쓸었다. 손길은 따스했고, 편안했다. 루스벨라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차례 더 쏟아졌다.

“고모님 덕분이었나요? 저희가 산 게? 처음부터……. 이럴 줄 아시고 희생을 택한 것이었나요?”

[내가 미래를 내다본 건 아니고, 셀레누스 님께서 너를 위한 대비책으로 나라는 영혼을 내려보낸 것이지. 모든 게 잘 풀려서 나는 더 바랄 게 없단다.]

“고맙……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고모님.”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루스벨라는 그녀를 몹시 사랑해 주는 이들 덕분에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악독한 이들로 인해 상처받았으나 선의와 애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서 세상을 믿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어, 어딜 가세요?”

[내가 본래 있던 곳으로 가야지.]

은은한 은빛과 황금빛 눈을 빛내던 릴리안의 형상이 조금씩 변했다. 그녀의 날갯죽지에서 새하얀 날개가 솟고, 은빛이던 머리카락은 점점 금색으로 변했다. 눈동자는 선명하게 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금빛으로 변했다.

완연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한 손에는 거대하고 길쭉한 창을 들고서 릴리안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잘 지내렴. 아가. 위에서 항상 너의 행복을 빌어 주고 있으마.]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이야기를!”

천사가 된 릴리안을 향해 루스벨라가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루스벨라는 지상으로 훅 꺼지는 느낌을 받더니 눈을 번쩍 떴다.

“헉!”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니, 데니스는 기절한 채로 그녀의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것도 눈이 덮이지 않은, 여린 연둣빛 새싹과 꽃이 핀 흙바닥 위에서.

‘북부는 아직 한창 추울 시기야. 설원 위에 이런 봄을 맞은 것 같은 장소가 있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폭발을 맞은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조심스럽게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감사합니다, 릴리안 고모님. 저, 꼭 이 사람과 행복하게 살게요.”

루스벨라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서, 잠들어 있는 데니스를 깨워 폭발이 터졌던 장소로 이동했다.

“……진짜 죽었네.”

폭발로 인한 시체 조각이 여기저기 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벨의 시신은 놀랍게도 생전의 모습을 거의 보존하고 있었다. 딱 한 가지, 심장 부근만 제외하고서.

“루스벨라, 아벨의 심장 부분만 뚫려 있어요.”

“나도 보여요. 꼭…… 그가 죽였던 신성력 보유자들의 최후 같네요.”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은 아벨의 얼굴은 아름다운 외양에 걸맞지 않게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뻥 뚫린 심장의 구멍을 중심으로 도자기가 깨지듯 금이 가더니 몸이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이 과거에서 죽었을 때, 그 시신을 묻을 새도 없이 날아간 것처럼.”

데니스가 중얼거리는 사이 유리 파편처럼 부스러진 아벨의 시신은 곧 재가 되어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그토록 오랫동안 신이 되고자 열망한 인간의 최후는 덧없기 그지없었다.

“정말 다 끝났네요.”

아벨이 죽은 자리에 남은 것은 더러워지고 찢겨진 예식용 로브와 깨진 성력석의 잔해였다. 폭발 때 남김없이 힘을 소진한 탓인지, 성력석은 완전히 색을 잃고 조각나 있었다.

“이것들은 희생자의 유품이기도 하니 거두어 가죠.”

“그래요. 가서 묻어 줘요.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죠.”

두 사람은 부서진 성력석의 잔해를 모아 루스벨라가 만든 신성력의 막 안에 보관해 두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하고, 온몸에 힘이 풀릴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슬란은 어디 있는 거지?”

데니스의 말에 그제야 루스벨라가 의아함을 느꼈다. 릴리안의 가호로 두 사람은 무사했지만, 아슬란만은 보이지 않았다.

‘폭발하기 전에 아벨을 떼어 내려고 온 것까진 기억하는데…….’

“설마 죽은 걸까요?”

“그렇다기엔 그의 시신이 없어요. 증발한 것처럼 아예 존재하지를 않아요.”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니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루스벨라와 데니스는 아슬란이 어딘가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일대의 숲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끝까지 아슬란 윈체스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은 결국 차후에 다시 조사대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

루스벨라가 올 때처럼 공간을 여는 문을 열어 수도로 돌아오자 모두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거대한 빛으로 만든 거인의 형상이던 셀레누스가 루스벨라를 보자마자 다시 귀여운 새가 되어 곁으로 날아왔다.

[루스벨라야, 왔느냐!]

“네. 셀레누스 님. 제가 올 때까지 에덴의 신도들을 붙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네 덕분에 되찾은 힘이니 널 위해 써야 하는 것을.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느냐?]

“……네. 아벨이 드디어 죽었어요. 저희와 같이 죽으려다가 그 혼자만 죽었죠.”

“그, 그럴 수가!”

이미 한풀 꺾인 신도들이었지만, 아벨의 죽음에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니 그 기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이 깨진 신성력 부스러기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의 시신은 재가 되어 사라졌기에 가져올 수 없었지만요.”

“그런……. 정말로 아벨 님께서…….”

완전히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신도들이 사색이 되었다. 루스벨라도, 데니스도 그들의 하얗게 질린 안색이 마음에 들었다.

자리에 없는 아슬란을 대신해 데니스가 모든 병사들에게 외쳤다.

“토벌은 끝났다! 우리가 승리했다!”

“와아아!”

함성이 터졌다. 병사들은 그들이 나라를 지켰다는 기쁨에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그러다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성녀님 만세!”

그 소리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 번졌다. 황성 앞이 루스벨라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제국 만세! 성녀님 만세!”

“제국을 지켜 주신 성녀님 만세!”

처음 받아 보는 환호에 루스벨라는 멍해졌다. 그녀의 옆에 선 데니스가 손깍지를 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축하해요, 루스벨라.”

두 사람에게 진정한 평화의 시간이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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