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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8화 (148/166)
  • 148화

    “너……!”

    “죽기 싫으면 조용히 하시지.”

    아벨의 뒷덜미를 잡아챈 것은 아슬란이었다. 아벨은 무심코 그의 주변을 둘러봤다. 루스벨라나 데니스는 없는 것을 보니, 세 사람이 흩어져 아벨을 찾고 있는 듯했다.

    “이거 놔라! 어디서 역겨운 배신자의 후손 따위가…….”

    “그러는 그쪽은 신이 이 땅을 떠나게 한 타락한 사제의 후손이면서 말이 많군.”

    “…….”

    울컥했지만 아벨은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성력석의 힘은 거의 없었고, 혹시나 이대로 아슬란이 아벨을 끌고 가 루스벨라의 앞에 대령할 경우를 대비해 큰 힘은 쓸 수 없었다.

    ‘역시 그 건방진 계집의 성력석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뜯어 냈어야 했는데……!’

    그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도망치게 된 건 전부 루스벨라와 데니스의 탓이라고 아벨은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하고 있었다.

    ‘아랫것들이 있으면 뭐 해.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것들이 빠릿빠릿하게 일 처리도 못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건데!’

    자존심이 죽도록 상했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었다. 그것도 아벨이 하찮은 벌레 취급을 하며 살해한 사람들과 같은 끝을 맺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 어쩔 거냐? 그 계집에게 데려가려고?”

    가진 것도 이제 별로 없으면서 아벨은 최대한 오만하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꼭 화려한 깃털이 다 빠진 공작새가 부리를 치켜드는 것 같은 모양새여서, 아슬란이 픽 실소를 내뱉었다.

    “웃어? 감히?”

    “이빨 빠진 사자 신세가 되어서도 허세가 대단해서.”

    명백한 조롱과 비웃음에 아벨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추위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그나마 화가 난 티는 잘 나지 않았다.

    “당신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당연히 그녀에게로 데려가서 처벌을 받게 할 거야. 그 전에…….”

    “뭐지?”

    “수다스러운 내 선조께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더군.”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지?’

    아벨은 잠시 아슬란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선조라니, 저주받은 사령술사도 아니고 선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미쳤나?”

    “아니. 멀쩡하지.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름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전하라던데.”

    “……마리아? 그 배신자?”

    마리아의 이름을 들은 아벨이 버둥거렸다. 하지만 성력석의 힘을 쓰지 못하는 아벨은 아슬란에게 제압하기 너무 쉬운 상대였다.

    “마리아가 살아 있다는 거냐? 어떻게? 그 애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었을 텐데?”

    “안다. 그리고 오해를 정정하자면, 마리아는 살아 있지 않아.”

    “그렇다면?”

    “그녀의 영혼만이 내 머릿속에 깨어 있는 상태다. 다 네가 나와 접촉하여 세뇌를 걸려던 탓이지.”

    ‘그게 마리아의 영혼을 깨웠다니…….’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아벨은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너무나 오래된 인연의 잔해가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지니 뭐라 말하기도 애매했다. 더구나 그게 좋지 않게 헤어진 사람이라면.

    “……마리아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고?”

    “그래. 그걸 위해서 널 찾았다.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네 위치를 같이 온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을 거다.”

    믿지 않는 눈초리를 보내는 아벨에게 마리아가 아슬란의 입을 빌려 대화를 시도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아벨. 잘 지냈냐는 인사도 못 하겠는걸?]

    아슬란의 입을 타고 나오는 음성은 여성의 것이었다. 육신의 통제권을 잠시 빌려준 것인지, 눈빛부터가 달랐다.

    “네가 진짜 마리아라고? 신성력도 못 쓰던 네가 어떻게 영혼만 남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상에 남아 있을 수 있었지?”

    [네 덕분이지. 네가 날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올 것처럼 굴었잖아.]

    “내가? 웃기고 있네. 그건 단순히 날 배신한 널 죽이려고 한 거…….”

    [말 끊지 말아 봐. 나도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죽고 나서 내 피를 이은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해서 계속 영혼으로나마 존재하다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지더라고.]

    “뭐가.”

    [내가 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건 결국 너밖에 없더라고. 네가 나한테 건 저주가, 속박이 날 이곳에 매어 둔 거야.]

    “그렇다면 기분 좋네. 유령 신세가 되어 지금까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있었다는 거잖아? 꼴 좋다.”

    아벨은 여전히 아슬란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에 대한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신이 나서였다. 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간 사람이 이토록 비참하게 있었다니!

    마리아도 그런 아벨의 희열을 포착했는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 좋으니? 내가 이렇게 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 기뻐서 입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걸.”

    [……잔인한 점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래도 난 그 긴 세월 동안 영혼으로 존재하면서 네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해?”

    뭔가 들어서는 안 될 단어가 귓가에 쏙 박혔다. 아벨이 인상을 찡그렸다.

    ‘배신자 따위가 날 이해해?’

    그 말 자체가 아벨에게는 모욕이었다. 배신자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뭘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아벨을 흔들 이유는 되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마리아의 말에 아벨의 표정이 무너졌다.

    [너, 외로웠던 거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외로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거짓말 마. 아벨 넌 성력석을 쓸 수 있는 실험을 거치고서 아무도 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잖아. 그나마 그 실험에서 살아남은 나만큼은 공감대가 있을 거라 여기며 가까이했겠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면 너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내게 집착했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너의 최후를 봐야만 안식에 들 수 있는 저주를 받게 되었을까.]

    정말 모르겠어?

    이상한 일이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하는데, 아벨은 얼어붙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슬란의 육신으로 마리아가 말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살아생전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무 두려웠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그 증거인 것 같아서.

    [그냥 넌 네 할아버지에게서 실험을 받은 이후로, 자라지 못하고 있던 어린아이일 뿐이야. 비뚤어진 방식으로 애정을 구걸하는, 세상에 네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서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다고.]

    “아니야!!!”

    아벨은 아슬란을 밀치고 눈밭을 뛰었다. 내뱉는 숨이 따가웠다. 시리도록 매서운 추위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리아의 말은 칼보다 날카롭고 얼음보다 차가웠으니까.

    “헉, 헉, 허억.”

    길도 모르는 눈 덮인 숲속을 한참을 달리자 곧 이곳이 어디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아벨은 무력한 일개 인간에 불과했다.

    ‘이럴 때 짐승이라도 튀어나온다면…….’

    오싹했다. 힘을 잃으니 무서운 것이 너무 많아졌다. 들짐승이 튀어나온다면 사냥당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구역질이 났다. 비참했다.

    “거기 서. 아벨!”

    몸이 무언가에 걸려 달리던 도중 고꾸라지고 말았다. 눈 위를 구르며 얼굴과 몸 등이 자잘한 자갈 등에 긁혀 피가 났다. 이미 루스벨라와의 전투로 인해 부상을 당한 터라 그 상처조차도 쓰라렸다.

    “으윽…….”

    발목이 불편했다. 내려다보자 황금빛의 사슬이 그의 다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끊어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니 도망은 텄다. 아벨의 이가 부득 갈렸다.

    ‘이래서야 덫에 걸린 짐승 새끼와 뭐가 달라!’

    수치스럽고 분했다. 다리를 있는 힘껏 버둥거려도 사슬은 더 살갗을 깊게 옥죄었다. 다시 불에 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도 밀려왔다.

    “포기해. 아벨. 당신은 이미 독 안에 든 쥐 신세야.”

    “나, 날…… 죽이려는 거냐?”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당신이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성력석을 잃었다고 해서, 봐줄 거라고 희망을 가졌어?”

    어떻게 당신이 그런 희망을 품을 수가 있지?

    “…….”

    “당신은 나와 내 남편, 그리고 가족까지 위협할 생각이 있었던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라고 볼 수나 있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신이라는 건 아니지만, 금수보다 못한 건 맞는 것 같아서.”

    “그 입 닥쳐!”

    아벨이 검붉은 눈에 원망을 가득 담아 루스벨라에게 소리쳤다. 성스러움이 가득한 황금빛 눈은 재수가 없었다. 일말의 동정심도 엿보이지 않는 그 금빛 눈을 파내고 싶었다.

    ‘힘만…… 내게 저 계집의 힘만 있었더라면…….’

    로브 주머니 속 밀빛 성력석이 손가락에 걸렸다. 하급의, 질도 좋지 못한 것이지만 이걸 이용해서 한 방 먹일 수는 있었다.

    ‘같이 죽는 길을 택하면 말이지…….’

    결정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더 잃을 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죽임을 당하는 일뿐. 그렇다면 루스벨라가 아벨을 해치웠다는 기쁨도 누리지 못하도록, 동귀어진하는 것이다.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마라.”

    루스벨라가 손을 들어 신성력이 응집된 에너지의 구체를 만들었다. 작게 응축되는 그것은 맞으면 바로 즉사의 위험이 예측될 만큼 강력해 보였다.

    ‘기회는 딱 한 번.’

    아벨은 겉으로는 체념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주머니 속의 성력석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그것 내의 신성력이 폭탄처럼 터지도록 마구 헤집어 놓았다.

    “죽어라.”

    동그란 황금빛 에너지가 아벨을 향해 던져졌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데리고 피할 능력이 충분히 되었기 때문에, 그를 사슬로 이끌어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어딜 도망가. 같이 지옥으로 가자.”

    “뭐……!”

    아벨이 순식간에 튀어 오르더니 루스벨라의 손목을 붙들었다. 남은 신성력을 겨우 끌어당겨 손바닥에 방어막을 치고, 루스벨라가 공격한 에너지 구체를 억지로 붙들었다.

    “내가 혼자 죽을 거 같아? 적어도 내 모든 것을 방해한 네년만큼은 같이 끌고 가야겠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힘의 격차가 현격한 탓에 아벨의 손은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주머니 속의 성력석이 폭발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생의 마지막이 될 희열과 쾌감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절대 이 세상이 좋아할 만한 옳은 결말 따위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타락한 사제들을 저버린 신이 어여뻐하는 계집이 그 때문에 결국 죽게 되니 기뻤다.

    “해피엔딩 따위는 있을 수 없어.”

    그게 내 것이 아니라면.

    “루스벨라! 데니스! 안 돼!”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눈치챈 아슬란이 다리의 근육을 한계치까지 써서 달려와 아벨을 떼어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잘됐네. 다 같이 죽자.”

    폭음이 눈밭 위를 휩쓸었다. 순백의 눈 위로 누군가의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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