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으아아악!”
일제히 돌격하던 신도들은 저만치로 나자빠졌다. 루스벨라가 부채를 이용해 휘두른 신성력은 보통 강풍이 아니라 전투 불능 상태가 되도록 몸의 이곳저곳을 할퀴는 바람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으으…….”
무기를 놓친 그들은 전투를 치를 의욕을 잃었다. 신도들은 아벨과 루스벨라의 대화로 그들이 신이 아니라 살인자를 떠받들었으며, 그런 살인자를 받든 그들은 공범이자 빼도 박도 못할 폭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로를 시작으로 해서 다른 신도들은 싸우기를 포기했다.
숨이 차도록 달려온 아슬란의 앞에서, 그들은 힘없이 항복을 말했다.
“죽이지만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성녀님께 끼친 무례를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항복하겠으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찢긴 상처에서 피가 나고 있음에도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는지, 에덴의 신도들은 몸을 웅크리고 루스벨라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늦었어요. 당신들이 운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옅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론 루스벨라는 엎드려 우는 신도들을 무시했다. 그녀는 사라진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고통받고 죽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야 잘못했다고 비는 이들은 그녀가 사양이었다.
“루스벨라? 어떻게 된 거지? 그 머리색과…… 눈동자는 또 뭐고.”
“아, 윈체스터 공작.”
급하게 루스벨라를 지키러 온 아슬란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루스벨라는 대수롭지 않게 은빛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꼬며 대답했다.
“내가 신성력 보유자로서 진정한 각성을 이뤄 냈어. 덕분에 잊힌 신이신 셀레누스 님께서도 깨어났지. 승기는 이제 우리 쪽으로 기울었어. 나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에덴 측에 없으니까.”
“데니스는? 무사한가?”
“무사해. 그는 저기에 멀쩡히 살아 있지.”
루스벨라가 가리킨 쪽을 응시하자, 데니스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아슬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스벨라에게서 떨어져. 기분 나쁘니까.”
쩌렁쩌렁하게 아슬란에게 경고하는 데니스를 보며 루스벨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슬란을 뒤따라온 병사들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염장질을 하는 두 사람을 보고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
“들었지? 떨어져, 공작. 당신과 내 사이는 그리 유쾌한 것도 아니잖아.”
“……알겠다.”
‘달라졌다. 그리고 더 강해졌어.’
루스벨라에게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경험할 만큼 긴 시간을 지난 후였지만, 아슬란에게는 찰나의 시간이 지났기에 그로서는 그녀의 변화가 놀랍고 어색하기만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는 더 돈독해졌고,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군.’
황금빛 눈동자에는 오직 데니스를 향한 깊은 애정만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강인함을 보게 된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림으로써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그는 편협한 시선으로 그녀를 모함하는 이들의 농간에 빠졌고, 결국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슬란에게는 루스벨라를 사랑할 자격도, 곁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었으니 이게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속이 쓰리는 건 어쩔 수가 없군…….’
그가 놓친 인연은 찬란하게 꽃망울을 틔워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아슬란에게 남은 일은, 그 나비의 날갯짓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나는 일이었다.
그걸 위해선 아벨과 남은 에덴의 잔당을 모조리 토벌해야 했다. 아슬란은 슬금슬금 도망가려는 다른 에덴의 신도들을 병사들을 이용해 퇴로를 차단하고, 사로잡으라 명했다.
“무엇보다 반란군의 수괴인 아벨이란 자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슬란의 명령에, 데니스도 몸을 일으켜 다시 병사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루스벨라도 신도들에게 공격을 명령하고 사라진 아벨을 찾기 위해 사슬을 이리저리 풀어 봤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아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색 결과, 억지로 겨우 끊은 것처럼 피에 물든 황금빛 신성력 사슬이 서서히 사라지는 광경만 찾을 수 있었다.
‘사슬을 다 끊어 놓지는 못했어. 금방 추적할 수 있을 거야.’
신성력을 주입하여 만든 사슬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벨의 위치를 알아낸 순간, 루스벨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북부?”
‘북부로 향하고 있어……?’
무심코 루스벨라가 아슬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슬란은 사태를 수습하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에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에요, 루스벨라?”
데니스도 토끼처럼 날쌔게 달려와 루스벨라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우리 셋이서 북부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데니스는 당연히 그녀와 같은 피해자이니 데려가야만 마땅했다. 아슬란을 동행시키려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북부의 지리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잘 알 테니까.
“지금 말인가?”
“저야 상관없지만, 현재 상황이…….”
문제는 그들이 전쟁터 한복판에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빠져나가기엔 수습을 맡길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루스벨라나 데니스, 아슬란이 빠진다면 항복을 외치는 신도들이 다시 반항할 여지가 생길 수 있었다.
“셀레누스 님.”
[응? 왜 그러느냐. 내 아이야. 뭘 도와주면 되겠느냐?]
“혹시 잠시 동안 현신이 가능하십니까? 황태자 전하께만 항복한 신도들을 매어 놓기엔, 조금 불안해서요.”
베네딕트 황태자의 자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광신도들이 괜히 광신도들이겠나. 그들을 가장 잘 눌러놓을 수 있는 것은 신이었다.
[물론이다! 가능하다. 네 신성력은 나를 현신시키고도 남으니 걱정할 것 없다. 네 몸에도 어떤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이야.]
“그럼, 저 광신도들을 붙잡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게 맡겨라!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서 공기 좀 맡아 보겠구나.]
셀레누스는 꽤나 신나서 루스벨라의 부탁에 흔쾌히 응했다. 그녀는 작게 파닥이는 신에게 웃고는 곧바로 현신을 시도했다.
“태초에 태어난 빛이여, 이 땅에 강림하소서.”
그러자 거대한 빛이 땅 위로 솟아오르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광신도들과 공작령의 병사들 둘 모두가 입이 떡 벌어져 신의 출현에 절로 진동하는 몸을 붙잡았다.
“시, 신…… 진짜 신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그 느낌에 그곳에 있는 이들은 저 거대한 빛의 형상이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베네딕트마저 그 존재감과 위압감에 눌려 숨을 헐떡이기까지 했다.
“와……. 진짜 장난 아니잖아. 데벤테르 후작부인.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법한 광경이라니…….”
[내 아이의 부름에 응답해 이 땅에 내려왔으니, 여기서 벗어나려는 인간이 있거든 천벌을 내리겠다.]
루스벨라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근엄한 어조였다. 그에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피식 웃었고, 아슬란만이 혼자 긴장했다.
“어서 가죠. 데니스, 그리고 윈체스터 공작. 아벨이 도망치기 전에 잡아서 돌아와야 하니까요.”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황금빛의 실과 같은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문양을 그렸다. 허공에 수놓아진 문양은 곧 다른 곳의 정경, 즉 북부를 비추었다. 공간이동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앞장서, 공작. 저 문을 통해 나가면 곧바로 북부로 이어질 테니, 당신이 길 안내를 해 줘. 아벨이 어디 있는지는 내가 방향으로 알려 줄게.”
“알겠다. 그렇게 하지.”
아슬란은 루스벨라를 믿고 북부로 이어지는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곧 루스벨라도, 데니스도 순서대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싸늘하고 추운 북부의 대기와, 바닥에 아주 점점이 흩뿌려진 핏방울이었다.
“멀리는 못 갔겠군. 내 뒤를 잘 따라와라.”
아슬란을 선두로 한 세 사람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성력으로 막을 쳐서 급하게 이동했음에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내고 만다.’
세 사람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그것 하나로 동일했다.
***
“헉, 허억…….”
아벨은 겨우 도망치고 있었다. 신도들을 방패로 삼은 사이, 몸에 천형처럼 들러붙은 사슬의 대부분을 떼어 내고 남은 힘으로 간신히 공간이동을 시전하여 루스벨라의 시야 밖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하필 이곳을 택해서 온 거지?’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에덴의 본거지야 이미 다 들켰으니 돌아갈 수 없다 치지만, 대체 왜 그가 생뚱맞게 이 북부로 탈출을 감행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설마 그건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마리아, 그를 유일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한 실패작. 그녀가 도망친 곳이 바로 이 북부였다. 그것 외에는 도저히 북부와의 연결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딴 배신자 계집애 따위가 나한테 뭐라고 여기에 왔다는 거야. 아니야, 아닐 거라고.”
피를 흘리며 덜덜 떨리는 다리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아벨은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는 인제 와서 그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싫었고, 마리아가 그를 왜 버리고 갔는지도 이해하기 싫었다.
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건 없고, 강력한 힘을 선사해 줬던 성력석은 이제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다 깨져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딱 하나만 멀쩡하군…….’
불량품이라고 생각한 가장 하급의 밀빛 성력석만 사용하지 않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거라도 없었다면 그야말로 크나큰 위기였겠지만, 고작 이런 싸구려에 몸을 의탁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수치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내가, 신이 되었어야 할 내가 꼴사납게 도망이라니……!”
차가운 북부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동안은 성력석의 힘으로 외부의 차갑거나 뜨거운 대기를 적절히 차단할 수 있었는데, 이젠 모든 게 정통으로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감각의 정도가 크게 올라가자 더욱 괴로웠다.
‘추워.’
너무나 추웠다. 얇은 옷으로 도망치는 그는 이러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왜 이 더럽게 추운 북부로 향했을까 후회가 되었다.
“거기 있었군.”
“헉.”
그러다 누군가 아벨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