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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6화 (146/166)
  • 146화

    아벨의 표정이 급격하게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가진 신성력으로는 루스벨라의 발끝도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저, 저리 가!”

    팔에 걸치고 있는 팔찌의 성력석에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아벨은 사슬로 묶인 몸을 간신히 일으켜 도망치려 했다. 있는 힘껏 몸부림친 덕인지, 사슬 한두 개는 겨우 부술 수 있었으나 나머지는 어림도 없었다.

    “왜 그래? 피와 살점이 튀기는 춤을 추자고 한 건 너였잖아.”

    각성한 루스벨라의 은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선명하고도 위압적인 금빛 눈동자가 검붉은 아벨의 눈을 잡아먹을 것처럼 주시했다.

    “인제 와서 뒤늦은 후회라도 드나?”

    자기가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제가 별것 없는 겁쟁이라는 걸 알았나 보군.

    “그 입 닥쳐!”

    이 땅 위의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거라 여겼건만, 그 자존심이 꺾이다 못해 상처 위로 소금이 부어지니 견디기 힘들었다.

    ‘괜한 요행일지도 모른다. 각성했다지만 고작 애송이에 불과하잖아!’

    아벨의 머릿속이 겨우 본인을 위해 말을 쥐어짰다. 고작 각성한 애송이라기엔 너무나 신성력을 다루는 능력이 능숙했으나, 그걸 인정하기엔 그의 이성이 불안정했다.

    “아벨 님이 아까 공격에서 밀리신 거야?”

    “그럼 저 여자가 성녀라도 되는 건가?”

    주위에서 이미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살아 있는 신이라 믿어 주고 발바닥을 핥기라도 할 것처럼 충성을 바치던 신도들이 동요하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질 리가 없어.”

    ‘이 내가! 인간을 초월한 내가 고작 몇 해 살지도 않은 계집에게 질 리 없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아벨은 다시 한번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루스벨라가 아니었다.

    “어딜.”

    신성력을 일으키려던 아벨을 저지하고, 한곳으로 모이려던 신성력의 흐름을 막았다. 아예 공격조차 할 수 없게 해 버리자 아벨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잘한다, 내 아이야!]

    셀레누스도 신이 나서 루스벨라 주위를 돌며 응원했다. 금지된 주술을 통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도 타락한 사제의 후손이라 그런지, 아벨도 셀레누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설마……. 저 날파리 같은 게 스스로를 봉인하고 잠들었던 신이라고?”

    [날파리 같다니! 무엄하도다!]

    “신이 맞기는 하다는 거군. 그렇게 흔적을 지워 내려고 노력했건만……. 결국 봉인이 풀렸나.”

    아벨이 조소했다. 작게 시작했던 기괴한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래서 내가 네게 밀리는 거겠지? 네 뒤에는 진짜 신이 있으니까!”

    이건 불공평해.

    질투와 분노가 뒤섞인 눈이 루스벨라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신이 되었어야 했는데, 루스벨라만 아니었다면 다 된 밥이었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였다.

    “네년만 아니었어도 나는 바라던 신이 될 수 있었어! 네가 나의 오래된 꿈을 짓밟은 거다.”

    악귀처럼 으르렁거리는 아벨을, 루스벨라는 그저 잠자코 지켜보았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뭐?”

    “너야말로 남의 목숨을 앗아 가면서까지 이뤄 내려는 꿈이 가당키나 한 것 같나?”

    고약하고 삿된 미물을 바라보는 눈길로 아벨을 내려다보는 루스벨라는 무서울 정도로 그를 깔보고 있었다. 경멸하고 있었다. 그녀가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그의 몸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울렸다.

    “그게 뭐가 어땠다는 거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한 거야. 내가 신이 되어 만들 새로운 세상은 보다 더…….”

    “아름다울 거라고? 진정으로 그렇게 마음먹었던 적이 있나?”

    루스벨라의 지적에 아벨이 인상을 썼지만, 그녀는 그의 허황된 꿈에 대해 비판을 이어 갔다.

    “당신이 하는 행동이, 정말 대의를 위한 거라고 할 수 있나? 죄 없는 신성력 보유자들을 모조리 죽여 심장의 성력석을 탈취하고, 이 세계의 신이 되겠다고 제국에 반역을 일으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던 건 뭐라고 설명할 거지?”

    “그런 건 내가 신이 되어 해결하면 될 일이다. 죽은 사람, 그까짓 건 힘만 얻으면 다시 살려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은 못 살린다.]

    셀레누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아벨이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안 된다고?”

    [그래. 넌 아주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구나. 신이라도 함부로 죽은 생명을 다시 소생시키기는 어려워.]

    “하지만 저 여자의 남편만은 살려 줬잖아! 심장이 뚫렸는데도 멀쩡히 다시 숨을 쉬는 걸 확인했어!”

    아벨이 씨근덕거리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데니스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그는 멀쩡해져서 아주 초롱초롱한 눈으로 흥미진진하게 루스벨라의 활약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저 둘은 아주 특별하고 드문 경우야. 그리고 저 두 사람이 살아나기 위한 기적을 행하기 위해 걸어온 가시밭길을 네가 안다면, 그런 말은 쉽게 하지 못하겠지.]

    “그게 뭔데!”

    [바로 너 때문이다. 타락한 사제의 아이야. 네가 저지른 업보가 저 둘의 인생을 망쳤기에, 내 힘을 보태어 그들의 운명을 바로잡은 것이다.]

    “…….”

    할 말을 잃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아벨에게 루스벨라가 일침을 놓았다.

    “네가 그러고도 이 세상을 위한 신이 되겠다는 명분을 펼칠 자격이 있나? 난 아니라고 보는데. 넌 그저 남에게서 성력석을 빼앗아 살아갈 때부터 힘에 취한 어리석은 꼬맹이에 지나지 않아.”

    “난……! 나는 달라! 나는 선택받았다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사제들의 혈통 중에서도 나만 유일하게 성력석을 사용할 수 있는 실험을 무사히 통과했어!”

    악에 받쳐서 비명을 지르듯이 버둥거리는 아벨을 루스벨라는 사슬로 단단히 잡아 두고, 그에게 물었다.

    “신이 되면, 이 세상마저 네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뭘 하고 싶었는데?”

    “나는…….”

    대답하려던 아벨이 멈칫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입이 아교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후천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실험을 거쳤을 때부터, 다른 인간들이 하찮은 벌레처럼 여겨졌을 때부터 신이 되어 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맹목적인 목표만 있었다. 다른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잠든 진짜 신 대신에 새로운 신이 되겠다는 목표는 너무나 까마득해서, 그래서 묻어 두고 있던 의문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신이 된 이후에 아벨이 하고 싶었던 일은 정말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소망이었나?

    [그런 게 아니겠지. 넌 그저 네가 죽인 타락한 사제들의 망령에 잡혀 있는 것뿐이다.]

    셀레누스가 그리 말하자 아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명백한 반감의 표시였다.

    “내가…… 내가 그 선택받지 못한 머저리들과 다르지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그것보다 더한 모욕은 없군.”

    신에게 버림받고, 자신들의 죄는 반성하지 않고 금기의 영역까지 침범해 성공을 논하던 탐욕스러운 이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역겨운 얼굴들,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을 때 느꼈던 희열과 쾌감. 이런 힘을 가진 자신이라면 세상을 깨끗하게 치울 수 있을 거란 오만함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걸 정말 부정할 수 있나? 아벨. 넌 부정하고 있을 뿐이야.”

    “어린 계집이 뭘 안다고 내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지?”

    “많은 걸 봤지. 가령, 네가 거의 이 세상의 신이 될 뻔했을 세계라든가.”

    “뭐?”

    루스벨라의 말에 아벨이 되묻자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세상에서 너는 그다지 사람들을 위한 이로운 일을 하지는 않았어. 제국을 도탄에 빠뜨리고, 대륙 전체를 혼란 속에 밀어 넣으려고 했지.”

    “…….”

    “정말 모르겠어? 넌 처음부터 너만을 위해 살육을 저질러 왔어. 강력한 힘을 얻고 싶다는 이유에 대의명분 같은 건 없었다고. 다른 사람을 죽여 성력석을 갈취해 온 순간부터, 넌 살인자였고 대단한 초월자도 뭣도 아니야.”

    차분하게 또박또박, 아벨이란 인간의 비루한 알맹이를 설명하는 루스벨라는 고요했다. 아벨은 그녀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딴 식으로 날 내려보지 말란 말이야! 내가, 내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아벨은 몰랐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루스벨라와 셀레누스의 말을 인정하는 셈이라는 걸.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는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타락한 사제들과 같은 족속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죗값을 치를 차례야, 늙은 살인자.”

    “닥쳐!”

    아주 오랜 세월을 우월감에 빠져서 보낸 만큼, 진짜 신에게 선택받은 아이이자 유례없는 강력한 신성력으로 성스럽게 빛나는 루스벨라를 보자 아벨은 열등감으로 이성을 잃었다.

    ‘저 여자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처럼 여겨졌다. 루스벨라가 말한 사라진 세계 운운은 다 거짓부렁이라고, 그가 틀렸을 리 없다고 믿어야만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구둣발에 짓이겨진 벌레처럼 어딘가 뭉개져 버릴 것만 같았다.

    “뭣들 하는 거야! 다들 보고 있지만 말고 저 여자를 공격해!”

    “예, 예!”

    신경질적으로 아벨이 고함을 지르자,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에덴의 광신도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벨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머리가 있다면, 날 공격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보는데.”

    루스벨라는 부채를 쥐고 여유로운 태도로 광신도들에게 충고했다. 신도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성녀의 탄생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인 아벨도 못 당했는데, 고작 일개 인간일 뿐인 그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어…….’

    아벨이 뒤에서 사나운 맹수처럼 신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친히 멱을 따 줄 기세였다.

    그리고 성난 아벨이 아니더라도, 신도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미 제국의 황제를 아벨이 죽였다. 황제를 붙잡아 끌어내리는 데 신도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반역이 끝난 후 그들의 얻을 부귀영화를 위해서였다.

    “도, 돌격하라!”

    선두에 선 장로 중 하나가 겨우 신도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루스벨라에게 무기를 겨누며 돌진했다.

    “……루스벨라?”

    아슬란은 그녀에게 달려드는 신도들을 보고 얼굴이 희게 질렸다. 후미에서 신도들과 싸우고 있던 그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루스벨라는 태연했다.

    “어리석기는…….”

    그녀가 부채를 한 번 휘두르자, 강풍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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