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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5화 (145/166)
  • 145화

    ***

    빛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걸어 나오자,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많은 시간을 과거의 기억과 함께했음에도 루스벨라가 있던 시간대에서는 단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루스벨라는 빛의 장막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오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주위에서 풍기는 피 냄새,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품 안에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그의 마지막 온기가 전해졌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데니스.”

    루스벨라는 나직하게 웃으며 데니스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은은한 황금빛의 문양이 데니스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어서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다시 봐 줘요. 당신과 못다 한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은색 실처럼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지럽혔다. 황금빛 문양은 마치 촘촘한 그물망처럼 데니스의 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기적을 만들어 낸 이에게 기적 같은 축복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깨어나 그대가 이룩한 기적을 맛보라.

    루스벨라가 노래하듯이 읊은 말들에 문양이 반응했다. 문양의 황금빛이 강렬해지더니, 이내 부스러져 생성된 작은 금색 알갱이가 그의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작은 태양처럼 반짝이며 빛을 내던 그것은 루스벨라의 손짓 아래 순식간에 데니스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데니스의 코와 입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뛰고 있어.’

    [무사히 잘된 것 같구나.]

    셀레누스도 몸을 조그맣게 변형시켜 루스벨라의 어깨 위로 올라앉아 속삭였다. 루스벨라의 진정한 각성으로 봉인이 풀려 이 땅에 현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거대한 신의 존재감을 이기기에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이봐. 건방진 계약자.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내 아이가 너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나비처럼 포로로 날아간 셀레누스가 데니스의 코를 약하게 조그마한 주먹으로 때렸다. 이미 소생할 생명력이 주입된 이상, 서서히 다시 호흡이 돌아오고 피가 온몸을 돌아다니는 그 시간 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희생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 벌이었다.

    “으…….”

    잠시 후, 데니스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루스벨라가 몸을 뒤척이며 잠에서 막 깨려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니스,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아슬란을 불러서 대신 깨워 달라고 할지도 몰라요?”

    루스벨라가 아슬란을 불러 데니스를 깨울 일은 전혀 없었지만, 짓궂음을 가장한 달콤한 속삭임에 데니스가 번쩍 눈을 떴다. 선명한 붉은 장미를 닮은 색의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담겼다.

    “루스벨라……?”

    “네.”

    “내가 왜…… 나는 분명 당신을 구하고 죽었는데.”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비비적거리던 데니스는 삽시간에 얼굴을 굳히더니 소리쳤다. 그녀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면서 걱정스러워했다.

    “설마 당신도 나처럼 죽은 건 아니겠죠? 그건 절대 안 돼.”

    “아니니까 표정 풀어요. 제 모습,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그녀가 은색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제 머리칼을 움켜쥐고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데니스의 적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건…….”

    “각성했어요, 진짜 각성.”

    그녀의 환한 황금빛 눈동자에 그가 기뻐하면서도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데니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썹을 일그러뜨리다 겨우 그녀에게 물었다.

    “루시를…… 봤어요?”

    “직접 가서 봤어요. 셀레누스 님이 당신을 살리기 위해 보낸 과거 속에서요.”

    두 사람은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데니스가 그녀를 두고 애칭으로 부른 때는 오직 한 번, 건국제 연회에서 그가 그녀에게 살해당할 예언을 받았다는 소리를 할 때만 그랬다.

    ‘루시를 그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쉽게 부를 수 없던 그 애칭을, 이제는 마음 편히 불러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시간을 돌리는 것도 봤어요.”

    “……그런 험한 장면은 안 보는 게 좋았을 텐데.”

    데니스가 작아진 셀레누스를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졸지에 원망의 대상이 된 셀레누스는 작아진 몸을 파닥거리며 그에게 항의했다.

    [이런 고오얀 계약자 같으니라고! 먹이를 숨기는 다람쥐처럼 감춘 네 희생을 내 아이에게 알려 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셀레누스가 긴 하얀 머리칼을 꼬리처럼 이용해 데니스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데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루스벨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내가 당신을 살린 건……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러니 고통스러움만 가득한 과거는 굳이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 때문에…….”

    그가 고개를 떨궜다. 확실히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목숨까지 던져 가며 그녀를 살린 주인공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뚝, 하세요. 우리 둘 다 눈물이 많아서 어떡할 거예요?”

    “흑, 흐윽. 너, 너무 기뻐서…….”

    “그래요. 그것만 생각해요, 우리.”

    루스벨라가 손을 뻗어 데니스를 끌어안았다.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흘리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지만 당신한테는 늘 미안하기만 했, 읍.”

    겨우 만나게 되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책하는 미운 입을, 루스벨라는 입맞춤으로 막았다.

    [어엇. 세상에. 나, 난 빠져 주겠다.]

    셀레누스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발갛게 물들이더니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모습을 감췄다. 각성한 루스벨라는 그녀의 것이 아닌 신성력의 흐름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기에, 셀레누스가 말만 저렇게 하고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야 미운 소리를 안 하네요.”

    포개져 있던 입술을 떼어 내며 루스벨라가 웃었다. 데니스는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버벅거리다 확 얼굴을 붉혔다.

    “뭐, 뭐, 뭐……! 지, 지금, 뭐가.”

    “많이 당황했어요? 나도 그랬는데.”

    “딸꾹.”

    데니스는 이제 아예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입을 막아도 너무 놀라서 나오는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구하겠다고 심장을 대신 찔렸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이걸로 조금이라도 알겠어요?”

    “딸꾹, 끕, 미, 딸꾹, 미안해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죄인은 가타부타 핑계를 대지 않고 조용히 그녀 앞에서 사죄를 외쳤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데요?”

    “딸꾹, 그, 그냥, 딸꾹, 다…….”

    “에잇.”

    그녀는 또 미운 소리만 하는 입을 막았다. 아까와 같은 방법에 데니스는 거의 졸도할 것처럼 굴었다.

    옆에서 작게 ‘어머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루스벨라는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 폭발할 것처럼 달아오른 데니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굳이 꼽자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 두고 갈 결정을 내렸다는 거.”

    “그……. 네.”

    “다시는 나 대신 죽지 말아요. 당신 없이는 이제 나는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뺨에 마지막으로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데니스는 죽었다가 살아난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알았, 어요.”

    삐거덕거리며 겨우 대답하는 게 너무 귀여웠다. 루스벨라는 키득거리며 그의 몸에 추가로 신성력을 부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는, 빛의 장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를 괴롭혔던 인간들, 당한 것의 배로 대갚음해 주고 올 테니까.”

    [나, 나도 같이 가자!]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바깥과 안쪽을 격리하고 있던 빛의 장막은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다가 루스벨라를 발견하자 얼굴이 밝게 펴진 아벨과 싸우던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각성했군. 더 양질의 성력석을 얻기 좋겠어.”

    아벨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루스벨라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그의 주위로 과거에 봤던 것과 같은 신성력으로 만든 가시들이 포진해 루스벨라를 노리고 있었다.

    ‘각성한 직후에 아직 뭘 모를 때 최대한 빨리 제압하는 게 좋아.’

    그게 아벨의 속내였다. 에덴의 신도들도, 그들과 싸우던 아군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중에 바로 달려든 게 그 이유 때문이었다.

    “누구 맘대로?”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벨은 루스벨라의 성력석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금빛이 아니라 푸른색의 신성력은 더는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네게도 우리가 느꼈던 절망을 느끼게 해 주마.”

    루스벨라의 발밑에서 가느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황금빛의 사슬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진정한 무기였다.

    “뭐……!”

    아벨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갓 각성한, 미숙한 신성력 보유자도 몇 번 죽인 적이 있었으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바로 본인에게 맞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고? 말도 안 돼!’

    단순한 요행이길 바랐지만, 그의 기대는 루스벨라의 공격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죄인을 속박하라.”

    언뜻 보기에는 연약하고 가는 사슬이 그녀의 주위에서 끝없이 솟아올라 아벨을 덮쳤다. 아벨이 가시들을 이용해 그것을 쳐 내려고 했으나, 황금빛의 사슬은 푸른 가시들을 전부 부수고 그의 몸을 구속했다.

    목과 팔다리, 손발에 이르기까지 황금빛의 사슬로 칭칭 감기자 아벨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 냈다.

    “으아악! 뜨, 뜨거워!”

    치이익. 사슬과 닿은 곳에 불에 타는 것 같은 작열감이 일었다. 난생처음 당하는 고통에 아벨이 체면도 잊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 아벨 님?”

    에덴의 광신도들은 그들의 살아 있는 신이 꼴사납게 흙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떻게든 사슬에서 벗어나려던 아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자 돌아 버린 눈으로 루스벨라를 쏘아봤다.

    “너 이 계집년이, 감히……!”

    “여태까지 네가 죽여 온 가엾은 신성력 보유자의 원한만큼 고통스러울 거다.”

    “아악, 죽어! 죽어 버려!”

    ‘고작 대체품 주제에, 신이 될 나를 이토록 하찮게 만들다니!’

    발악하던 아벨이 가지고 있던 성력석의 모든 신성력을 과도하게 뽑아내어 무수한 가시와 창, 검 등을 만들어 냈다.

    빠직. 아벨이 팔찌로 두르고 있던 성력석들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아벨은 애써 그 소리를 무시했다.

    “세상에.”

    적군도 아군도 하늘을 빽빽하게 메운 푸른빛의 무기를 멍하니 봤다. 저걸 맞으면 육신이 흔적도 없이 날아갈 터였다.

    “죽어!”

    아벨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신성력 무기들은 루스벨라를 향해 쇄도했다. 그는 사슬로 묶여 있는 대신 루스벨라의 공격은 막았다고 고통 속에서도 미친 듯이 웃었다.

    ‘내 승리다. 그리고 저 탐나는 힘도 내 거야!’

    그렇게 자신했었다.

    “설마 내 무기가 그것 하나만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루스벨라가 손을 들자 황금빛의 부채가 생겼다. 작고 화려한, 가볍게 들기 좋은 사교계 여인들이 애용하는 부채였다.

    “사라져라. 남의 힘을 빼앗아 만들어진 것들이여.”

    상공에서 그녀를 향해 내려오는 수많은 신성력 무기들을 향해 그녀가 부채를 한 번 부치자 강한 충격파가 일어나더니, 그 많던 무기들이 전부 파괴되었다.

    푸른색의 빛 가루가 아벨의 경악한 눈앞으로 흐트러졌다.

    “이럴 수가…….”

    그의 멍청한 표정을 보던 데니스는 뒤에서 기쁘게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인과응보다. 이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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