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4화 (144/166)
  • 144화

    ***

    ‘그런 거였나?’

    시야가 온통 캄캄했다. 데니스가 시간을 돌린 직후 루스벨라는 처음 셀레누스가 밀어 넣은 어둠 속으로 다시 보내졌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짓을…….”

    루시, 아니 사라진 과거 속 루스벨라 자신의 성력석을 이용해 시간을 돌리는 일은 정말 무모한 짓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데니스는 개죽음만 당한 싸늘한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내가 대체 뭐라고 그렇게까지.”

    과거의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은인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목숨을 걸어서까지 갚아야 할 종류의 것인지 그녀는 확언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과거의 내가 데벤테르 후작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죽음을 감수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쓰리면서도 한쪽으로는 그에게 고마웠다. 외롭고, 빈털터리로 쫓기던 그녀를 도와준 것은 결국 그밖에 없었다.

    “고마, 워요. 정말 고마워요.”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한 헌신과 애정이 그녀를 눈물짓게 했다. 벅차오르는 마음 때문이리라. 지금의 그녀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받고 있었다.

    그것이 남녀 간에 피어난 애정이건, 아니면 단순히 은인을 위한 헌신이건 상관없었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그가 그녀를 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는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았다.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처럼.

    “셀레누스 님, 듣고 계시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루스벨라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그녀가 답을 기다리자 곧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다 보았니?]

    “네.”

    [내가 왜 네게 이런 걸 보여 줬는지 알겠니?]

    “……네.”

    데니스라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을 과거였다. 오로지 그 혼자만이 기억할 과거는 묻어 두고 끝내 그녀를 위해 죽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이 기회로 알지 못했다면 평생 후회했을 거야.’

    그가 얼마나 그녀를 위해 헌신적이었는지를 알게 된 이상, 더더욱 그를 살리고, 현실로 돌아가 아벨을 벌해야만 했다.

    “저를 이제 현실로 돌려보내 주세요. 데니스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는 모두 봤어요. 한시라도 빨리 그를 되살리러 가야 해요.”

    [알지. 하지만 그 전에, 네가 아직 미처 다 보지 않은 것이 있단다.]

    “그게 뭔가요?”

    빛으로 휘감긴 셀레누스는 조용히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었다.

    [가 보렴. 그에 대해 네가 끝까지 알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제가 못 본 것이 있었나요? 또 과거의 일인가요?”

    [아니.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새로이 시간을 돌린 직후의 일이란다. 보는 걸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갈게요.”

    과거의 기억을 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루스벨라에게도, 데니스에게도 온통 힘겨운 일투성이였기에 그랬다. 데니스가 회귀라는 기적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녀는 기억 속에서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을지도 몰랐다.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루스벨라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미 극한의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진 과거를 엿보며 모두 맛보았다. 그러니 그것보다 더한 것을 보더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을 보건, 그가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 줬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무려 두 번이나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위해 희생했다. 끔찍한 것을 본다 해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그가 해낸 것을 그녀라고 못하겠다고 떨며 울고 싶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다녀오렴. 그 기억까지 봤을 즈음에는 현실로 되돌아오게 될 거란다.]

    셀레누스가 손을 흔들었다. 루스벨라는 빛으로 반짝이는 통로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시간을 돌린 직후의 데니스를 볼 수 있었다.

    ***

    ‘이건…….’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결혼하기 딱 6개월 전이었다. 데니스의 회귀 지점은 그때였다.

    어째서 하필 그때였는지는 곧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이야. 지금 시점에 회귀한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많겠지.”

    데니스가 회귀 시점으로 선택한, 두 사람의 결혼식 6개월 전은 루스벨라가 아슬란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받은 날이었다. 그녀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수렁에 빠지는 날이었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회귀의 축인 내가 너무 어리면 뭔가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그러니 아버지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고,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는 지금이 제일 적기야.”

    셀레누스의 축복 덕분인지, 아니면 회귀를 시도할 때 숨이 거의 끊어졌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데니스의 몸 상태는 완전히 건강해졌다. 독으로 상했던 장기는 아픈 흔적도 없이 튼튼해졌고, 그는 곧바로 후작가를 손에 넣을 준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아슬란에게서 배운 검술도 이런 몸이라면 금방 늘 수 있어. 수도 없이 뇌에 각인하듯이 습득한 검술이니까.’

    데니스는 매일같이 자신의 그 좁디좁은 방에서 벗어나 조용히 후작가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검술을 다시 수련했다. 이미 숨을 쉬는 것처럼 익숙한 기술과 셀레누스와의 계약으로 얻어 낸 신성력도 있으니 원래의 실력을 되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후작가를 뒤집어 버리고,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내내 괴롭히던 후작의 두 정부와 그녀들의 자식들을 내쫓을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괴물! 넌 사람도 아니야!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을 갖춰서……!”

    자비를 베풀어 목숨은 건져서 떠나게 해 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루이스는 데니스에게 욕을 퍼부었다. 데니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날 사람 취급한 적이 없으면서, 내가 반격하자마자 괴물 취급을 하네. 차라리 그게 낫다. 괴물 취급하는 게.”

    망설임은 없었다. 데니스에게는 시간이 너무나도 귀했다. 그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얻은 과거의 시간을 절대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를 아벨과 에덴의 음모에서 구해야만 해.’

    그의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광적이고 맹목적인 순수한 헌신은 마치 애정을 뒤집어쓴 집착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그가 이미 미친 것은 아닌가 수도 없이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구할 거야.”

    하지만 결론은 늘 같았고,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후작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상단, 가신들의 가문, 나아가 황태자와의 연결 고리까지 만들며 닥쳐올 불행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 더해 아슬란과의 파혼으로 세상이 무너지듯 상심한 루스벨라를 찾아가 그녀의 세상은 고작 그것으로 무너지지 않았다고 위로해 줬다.

    “뭐?!”

    이 대목에서 루스벨라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데니스가…… 그가 바로 그녀가 애타게 찾던 친구, 페이였던 것이다.

    데니스는 회귀하기 전, 아슬란에게서 검술을 배우는 동안 루스벨라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샅샅이 정독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아슬란을 통해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끌어모았다. 지펠론 백작가에서 근무했던 고용인이 남아 있다면 수소문해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아벨이 주도한 화재로 인해 지펠론 백작가의 많은 고용인들이 죽었지만, 그 전에 사표를 내서 나가거나 은퇴한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데니스는 루스벨라가 아슬란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 당시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지펠론 백작은 길길이 날뛰며 그녀를 책망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뒷소문이 좋지 못한 해스워스 자작과 결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걸 막아야 해.’

    데니스는 그 일을 막기 위해 루스벨라를 위할 만한 친구를 붙여 주고 싶었으나, 당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루스벨라는 가문을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지펠론 백작이 가둔 상태였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친구를 사귀기엔 어려웠다.

    이로 인해 고민하던 데니스가 결단을 내렸다.

    “내가 직접 가자. 신성력을 이용해 기척을 감추고 밤에만 찾아가면 되겠어.”

    그것을 위해 데니스는 여장을 했다. 몸에 남은 독성이 제거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몸이 다 성장하지 않았을 때여서 여장이 썩 잘 어울렸다. 그 당시의 루스벨라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페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그녀의 외로움이 빚어낸 허구의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지만, 페이는 진짜 존재했다.

    ‘루스벨라가 놀라면 안 되니까……. 창피함쯤은 감수할 수 있어.’

    목숨을 바쳐 죽기까지 한 마당이었기에 거부감은 적었다. 데니스는 페이라는 소녀로 변장하여 매일 밤 지펠론 백작가의 담장을 넘나들어 루스벨라를 찾았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렇지 않아, 루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 있는걸.”

    “누, 누구……?”

    “나는 페이라고 해.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찾아왔어.”

    “나를?”

    “응. 나는 네가 좋거든. 네가 더는 울지 않고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보면 미친 짓이었다. 만일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루스벨라의 명예가 더욱 진창으로 추락할 일이었다.

    하지만 데니스에게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충분히 해낼 수 있을 만한 실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펠론 백작이 큰딸인 그녀를 가둔 채 방치했기에 일은 수월하게 풀렸다.

    “너희 아버지인 백작이 네게 저지르는 일은 학대야. 이건 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소유물을 관리하는 태도에 가까워.”

    “……아니라고 하기엔, 전대 윈체스터 공작과의 계약서에서 나를 매물처럼 팔아넘긴 적이 있었지.”

    “그 사람은 널 또 똑같은 방식으로 팔아넘길지도 몰라. 조심해, 루시.”

    “응.”

    “그리고 윈체스터 공작은 쓰레기야. 그자는 너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대체 누구 말을 믿고 그런 모함을 들어준 거야? 눈이 발바닥에 붙어 있는 놈 같으니라고.”

    “아하하. 페이, 너랑 대화하면 그동안의 고민이 정말 쓸데없었던 걸 알게 돼.”

    심신미약의 상태였던 루스벨라는 페이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츰 제정신을 되찾아 갔다.

    ‘이 정도면 되겠지.’

    데니스는 그녀가 홀로 남아 있어도 괜찮을 수준이 되자, 홀연히 페이로서의 모습을 감췄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곁에서 안정시키기 위해 변장한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너무 의존하게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데니스가 가진 과거의 기억으로 지켜보는 루스벨라는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동안 데니스에 대해 품고 있던 궁금증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이었으므로.

    ‘이래서 나는 그를 처음 봤을 때 미묘한 반응을 보였던 거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이라 헛웃음만 나왔다. 데니스가 여장까지 해 가며 그녀를 만나서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줬다는 사실에 정체를 속였다는 분노는 들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해냈군요.”

    그저 고맙고 기뻤다. 그가 그녀를 위해 해 왔던 일들을 전혀 말하지 않은 것은 조금 섭섭했지만, 그가 내색하는 인물이 아니다 보니 그런 것쯤은 괜찮았다.

    가슴속에 오래된 응어리 대신에 반짝이고 빛나는 무언가가 대신 채워지는 감각이 선연했다.

    “셀레누스 님, 왜 제게 과거의 기억을 보여 주셨는지 알 것 같아요.”

    신이 그녀에게 보여 주고자 한 기억은 끝났지만, 더는 암흑의 공간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황금빛으로 가득한 빛의 문이 그녀를 향해 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찬란한 은빛으로 변하고, 눈동자도 환한 태양을 머금은 금빛으로 변했다.

    “돌아갈게요, 현실로. 그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하겠습니다.”

    진정한 각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