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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3화 (143/166)
  • 143화

    아벨과 데니스가 격돌했다. 두 사람의 신성력이 부딪힐 때마다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에덴의 신도들이나 아슬란의 병사들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자칫하다간 둘 사이의 싸움에 휘말려 크게 부상당할 것같이 보일 정도로 힘의 충돌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데니스는 붉은 신성력을 성검에 집중시키고,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칼 한 자루를 더해 아벨과 싸웠다. 아벨은 신성력으로 칼이 아니라 창을 선택해 데니스의 살기 어린 공격을 계속 튕겨 냈다.

    “죽어!”

    아벨이 만들어 낸 창에 실린 신성력이 황금빛을 띤 것을 볼 때마다 데니스는 분노로 뇌가 익는 것 같았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는 루시가 불타는 저택 속으로 들어가기 전 보였던 눈동자의 색과 똑같았다.

    ‘저것만 가져가면 돼!’

    거의 다 왔다. 황금빛 성력석이 번뜩이는 펜던트를 볼 때마다 분노가 차올랐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아벨의 급소를 찌르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전투가 길어지면 내가 불리해.’

    성문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광폭화를 쓴 탓에 생명력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몇 년 치의 수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몸에 끔찍한 통증이 가해지는 걸 보면 절대 짧지는 않을 듯했다.

    “신기한 놈일세.”

    아벨은 데니스와 싸우는 와중에도 여유롭고 느긋했다. 남의 힘을 빼앗아 쓰는 주제에 그는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 점이 너무나 얄미웠다.

    “신성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힘이 상당히 이질적이란 말이지. 마치 나처럼.”

    “너 따위 살인자랑 나를 비교하지 마라. 너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오니까.”

    “뭐가 너를 그렇게 몰아붙이는 거지? 내가 너한테 뭘 했다고.”

    숨이 찼다. 데니스는 무자비하게 아벨을 향해 공격을 날렸고, 아벨은 데니스의 공격을 모두 무(無)로 만들어 버렸다.

    “넌…… 그 펜던트를 걸고 있으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나 보지?”

    “아하, 이건가? 이 대체품과 아는 사이였군.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였나?”

    어리석긴.

    “너는 꼭 내 손으로 죽인다.”

    루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체품이라 부르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증오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데니스는 검격 하나하나에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넣어 아벨을 해치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약한 상처는 낼 수 있다는 점 정도였다.

    피가 칼로 긁힌 상처에서 슬쩍 흘러내리자 아벨의 표정이 그제야 미세하게 금이 갔다.

    “네까짓 벌레가 감히 나한테 상처를 내……?”

    “여태까지 내가 널 죽인다고 한 말을 허풍으로 들은 거냐? 네놈을 죽이려고 내가 이곳까지 들어오면서 죽인 네 신도가 몇인데.”

    두 사람의 주변으로는 피가 낭자했다. 데니스의 말처럼 그가 무지막지하게 광신도들을 죽여 덮어쓴 피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 피 위로 아벨의 핏자국도 섞이게 되었다.

    새하얗기만 하던 예복 위로 핏방울이 점점 번져 가자, 온화하게만 보이던 아벨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여흥은 여기까지. 넌 날 상처 입힌 죄로 더 잔인하게 죽여주마. 심장을 뽑히는 정도로는 너무 쉬워.”

    “누가 할 소리.”

    아벨은 지금까지의 공격은 정말 장난이었던 건지, 수천 개의 황금빛 창을 만들어 냈다. 고슴도치의 가시 같은 창들이 빽빽하게 모여 하나의 거대한 창의 형상을 이루었다.

    “죽어라.”

    데니스를 아예 이 세상에서 지우려는 듯 거대한 신성력의 집합체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여 전투를 멈추고 눈을 부릅뜨고 구경했다.

    ‘데니스는 살아 있나?’

    워낙 피할 겨를이 없던 터라 아슬란은 그의 생사를 걱정했다. 곧 데니스가 모습을 드러내 안도했지만, 그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대규모의 공격이라 피하기 어려웠어. 몸을 틀자마자 창들이 따라왔고.’

    신성력을 둘러 막의 형태로 방어하지 않았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다. 옆구리가 찢어져 피가 줄줄 새는 게 느껴졌다.

    “살아 있네.”

    “네놈, 죽이고는 가야지. 적어도 저승길 동무로는 삼아야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데니스는 광폭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생명력이 쭉 빠져나갔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에 독처럼 퍼졌다.

    “아아아아악!”

    고통과 분노가 섞여 내지르는 비명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데니스의 신성력을 두른 검 두 자루가 빛을 내더니 용의 발톱처럼 변해 아벨을 낚아챘다.

    “윽, 이거 뭐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붉은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갈고리 모양의 발톱은 아벨을 옥죄었다. 천천히, 우드득거리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버러지만도 못한 게 나를 진짜 죽이려 들어……?”

    “잡소리 말고 죽, 어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발악을 하던 아벨은 펜던트를 쥐고 그가 방출할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쥐어짰다. 데니스의 공격으로 인해 제 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아.’

    아까는 수천 개의 창이 내려왔다면, 이번에는 비교적 단순한 모양의 가시 수만 개가 상공을 뒤덮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시들은 전부 데니스를 향해 있었다.

    “신을 능멸하려던 죄를 톡톡히 치러라, 멍청한 인간아.”

    “데니스! 피해!”

    아슬란이 큰일임을 감지하고 당장 후퇴하라고 했지만, 데니스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피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어차피 저건 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야. 방금 공격도 날 따라오기까지 했는데, 아군 속으로 숨어든다면 이 토벌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벨과 같이 죽는다.’

    놈의 목을 베지는 못할지언정 반드시 같이 죽기라도 하자.

    “신이시여, 저를 보호하소서.”

    데니스는 계약자인 셀레누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아벨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그의 붉은 신성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아벨이 눈을 홉떴다.

    “저리 가! 더러운 벌레 자식!”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

    투둑. 아벨의 목에서 펜던트가 떨어졌다. 데니스의 짓이었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성력석이 드디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아, 안 돼! 그렇게 되면 저 공격에 대한 통제력이……!”

    이미 수만 개의 황금빛 가시가 데니스의 등 뒤를 뚫기 전이었다. 문제는 아벨도 함께 그와 붙어 있으니, 통제권을 잃은 이상 저 공격을 취소할 방법도 없었다.

    “빨리 내 성력석 내놔! 같이 죽고 싶어?!”

    “그래도 괜찮은데, 난.”

    이걸로 루시를 살릴 수만 있다면야.

    “이 미친놈이……! 죽으려면 너나 죽어!”

    아벨은 다급하게 치렁치렁한 예복 소매에 숨겨 뒀던 다른 푸른 성력석들이 박힌 팔찌의 힘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데니스는 아벨을 놓지 않았다. 전신을 벌레가 뜯어 먹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 느껴짐에도 끝까지 신성력으로 그를 붙들었다.

    “으아악……!”

    “시간을 돌려줘. 루시가…… 루스벨라 지펠론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아벨이 방어막을 칭칭 겹쳐서 두르는 것과 달리, 데니스는 되찾은 황금빛 성력석 위에 입을 맞추며 소원을 빌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수만 개의 가시가 둘을 덮쳤다. 워낙 광범위한 공격인지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같이 휘말렸다.

    “아, 아벨 님……?”

    “검은 기사는, 무사한가?”

    그나마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신도들과 병사들이 겨우 일어나 두 사람의 생사를 살폈다. 먼지와 흙이 섞인 바람이 걷히자 바닥에 엎어진 아벨과 데니스가 보였다. 둘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쿨럭, 쿨럭!”

    “아, 아벨 님께서는 살아 계시다!”

    신도가 제 신이 살아 있음을 보고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아벨은 그 손을 못마땅하게 받아들이더니,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장 내게서 축복을 받았던 이들을 데려와! 쿨럭……. 와서, 얼른! 내 부상을 치료해!”

    “하, 하오나 현재 다들 전투 중이어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대수야? 얼른 데려오라고……!”

    부러진 갈비뼈가 너무 아팠다. 난생처음으로 피를 토하며 아벨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해 대는 신도의 목을 베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패한 것 같은데.”

    “윈체스터 공작…….”

    아슬란은 다른 신도들을 어느 정도 제압하고 아벨의 앞에 와 있었다. 데니스는 한 명도 빠짐없이 사로잡을 것을 그에게 부탁했지만, 죽어 가는 그를 둘 수 없어 몇몇은 잡지 못하더라도 온 것이었다.

    “저리 꺼져!”

    아벨이 신경질적으로 아슬란에게 푸른 신성력을 쏘았으나, 그에게는 투명한 방어막이 있는 것처럼 공격이 닿지 않았다.

    “……설마, 배신자의 혈통인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아슬란은 팔찌가 공격의 원천이란 것을 알고 아벨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팔에 두른 팔찌를 모두 끊어 내어 빼앗았다.

    “아, 아벨 님이!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돼.”

    우두머리가 붙잡히자 남은 잔당들은 빠르게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아슬란은 그것보다 우선 데니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런.”

    가시에 몸이 온통 찔린 데니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손에는 무척 소중하게 황금빛 성력석이 박힌 펜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색깔이 변했군. 사라졌어.”

    어찌나 단단하게 성력석을 꼭 쥐고 있었는지, 겨우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봐야만 했다. 그가 준 성력석은 분명 루시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색이 빠진 투명한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네가 바라던 소원은 이루어졌나? 데니스?”

    이것으로 그녀가 살아 있는 과거로 돌아갔다고 믿어도 되는 건가?

    신이 안배한 마지막 희망의 씨앗이자 세계의 축 중 하나인 루스벨라의 성력석이 그 쓰임을 다하고 사라지자,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서 그녀를 지켜 줘. 그리고……. 나처럼 바보같이 그녀를 놓치지 마.”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싸우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변화에 놀라 도망쳤다.

    사라진 과거에 남은 것은 오직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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