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당장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슬란 윈체스터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제안을 승낙하는 단계까지 오는 데 많은 벽을 건너야 할 줄 알았거늘, 예상보다 수월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말 아니꼽군. 루시를 홀대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
“……그으래요. 그럼, 그 교단 놈들을 일망타진하러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합시다.”
“뭐지?”
“검술 좀 가르쳐 주시죠. 제가 검술에 까막눈이라.”
“…….”
순간, 아슬란의 무기력하던 눈에 ‘이 새끼 뭐지?’라는 한심함이 스쳐 갔다. 데니스는 그 시선에 울컥했지만, 루시를 생각하며 겨우 참았다.
“사정상 검술을 못 배워서 그런 것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죠. 배우면 금방 실력이 늘 겁니다.”
“……그렇게 하지.”
처음보다 상당히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아슬란의 표정에 역력했지만, 데니스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데니스가 귀족 영식의 기초 소양인 검술을 제대로 못 배운 것은, 엉망인 집안 사정이 컸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루시.’
내가 어서 강해져서 너를 구하러 갈게.
***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데니스는 많이 강해졌다.
‘성장 속도가 말이 안 되는데.’
데니스를 가르친 아슬란은 매 순간 그의 빠른 습득력과 응용력에 놀랐다. 셀레누스가 내려 준 광폭화 능력과 축복, 그 자신이 열심히 하려는 의지와 재능이 있으니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마침내 아슬란과의 대련에서 그를 쉽게 이기기까지 하자, 데니스는 미련 없이 교단을 토벌하러 가자고 아슬란에게 말했다.
“내가 선봉에 설게. 아슬란, 너는 교단의 잔당들을 처리해 줘. 그들 중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데니스와 아슬란은 함께 교단을 칠 준비를 하면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데니스는 그의 정체를 밝혔고, 아슬란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를 적극적으로 교단의 추적망에서 숨겨 줬다.
뭉친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루스벨라를 위해서라는 동기로 뭉친 그들은 말도 편하게 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역시 저놈은 마음에 안 들어.’
물론 데니스는 꽤 친해졌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이 되었어도 아슬란을 싫어했다. 아슬란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고.
얼기설기 억지로 이어 놓은 것 같은 협력 관계는 다행히 어찌어찌 잘 이어지고 있었다.
“괜찮겠나? 아무리 네가 다수를 상대해도 문제없을 실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혼자 선봉에 나서는 건 위험한 일이다. 자칫하면 고기 방패가 될 수 있는 일이야.”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데니스는 검술을 갈고 닦을 때, 광폭화 능력은 최대한 쓰지 않으려 했다. 그 능력을 함부로 낭비하다가는 그의 목숨도, 루시를 구할 가능성도 적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실전이니 광폭화 능력을 써야지.’
그의 목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교단을 쓸어버리고, 아벨이 있는 황성의 중심부까지 가서 본디 루시의 것이었던 성력석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해. 교단의 행보가 심상치 않잖아.”
“그건……. 그렇지.”
그들이 교단을 칠 준비를 하는 사이, 교단도 점점 몸집을 불려 기어이 황실을 장악하고 말았다.
아벨과 에덴의 경우, 음지에 숨어 있지 않고 이제는 당당하게 양지로 나와 황성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황제는 숨만 붙은 꼭두각시로 전락한 지 오래고, 황태자와 황후는 생사가 묘연해졌다.
‘그 모든 게 아벨이 부리는 신성력이 강해진 탓이지.’
데니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벨, 루시를 죽인 그놈은 어느 날 큼지막한 황금빛 보석이 박힌 펜던트를 목에 걸고 밖으로 나오더니, 수많은 황실 병사를 제압하고 황성을 너무나 쉽게 장악했다.
당시 위기를 느끼고 바로 탈출한 황태자 베네딕트와 황후 이벨린은 아슬란에게 바로 연락해 안전가옥으로 대피할 수 있었으나, 황제는 아벨을 얕보다 그 힘에 짓눌려 복종하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
“껍데기만 남고 제기능을 못 하는 황제를 내세워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알지. 황태자 전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현 상황에서는 무익한 피만 흐를 뿐이라며 전쟁이 일어날 것을 굉장히 걱정하고 계신다.”
데니스는 뱀 같은 아벨의 목적을 셀레누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신이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 대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할 작정이었다.
‘루시의 성력석으로 이미 그 목표의 반은 이루었으니, 이제 남은 반인 인간들에게서 공포와 경외심으로 떠받들어지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아벨과 에덴을 막아야 했다.
“너는 제국의 충신으로서의 책무를 다해. 루시를, 그리고 성력석을 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나도 같이해도 된다. 너 혼자 희생하는 거라면…….”
“이건 희생이 아니야. 내 의무지.”
그러니 너는 빠져.
“내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한다면, 아무리 네가 내 계획을 위해 협조한다고 해도 가만두지 않겠어.”
지난 1년간 쉴 새 없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데니스는 한 마리의 살쾡이처럼 날카롭고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네 이야기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내 계획대로 선봉에 선다.”
굽히지 않는 데니스의 뜻에 결국 아슬란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군.”
그 말만 남기고서 아슬란은 그의 방으로 사라졌다.
출정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아벨을 언제라도 칠 수 있게 아슬란이 공작령의 군대를 훈련한 덕이 컸다.
‘내일이면 루시를 다시 만날 수 있어.’
데니스는 셀레누스가 그를 위해 내려 준 성검을 품에 안고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그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있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아벨의 목을 치고, 루시의 성력석을 되찾아 그녀가 살아 있는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
“전군, 출격이다!”
와아아. 윈체스터 공작이 이끄는 군사들이 수도의 황성으로 거침없이 진군했다. 선두에는 검은색으로 무장한 알 수 없는 기사가 서서 가로막는 교단의 끄나풀을 처리했다.
그 기사는 붉은빛의 오러를 사용했고,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들을 우습게 보며 여론전이나 펼치던 교단의 사람들은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공작의 군대에 혼이 빠져 아벨에게로 꽁지 빠지게 달려왔다.
“아벨 님! 큰일 났습니다. 윈체스터 공작이 황실을 전복시킨 죄를 묻겠다며 아벨 님을 잡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북부를 담당하던 벨로트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겨우 목숨만 건져 아벨에게 고해도, 그는 코웃음만 쳤다.
“그래 봤자 내 앞에서는 한낱 애송이에 불과하지. 나한테는 최강의 성력석이 있으니까.”
아벨이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손길로 제 목에 걸린 황금빛 펜던트를 어루만졌다. 황금보다 더 찬란한 빛을 머금은 성력석은 아름다웠으며, 강력했다.
루시를 죽여 얻은 성력석은 아벨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가 그 성력석을 얻은 이후부터 원하던 모든 일들을 강대한 성력을 사용함으로써 가능케 만들었다.
“그, 그렇죠! 아벨 님께서 이렇게 강하신데 황실의 어린 개새끼에게 질 리가 없죠.”
“오라고 해. 여기까지 용기를 내 온 걸 칭찬하는 의미로 내가 직접 나설 테니.”
벨로트는 아벨의 확신에 찬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확 밝아진 낯으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신도들에게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걱정할 것 하나 없다고요.”
황금빛 성력석을 가진 이후로 아벨은 이미 교단 내에서 완전해진 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광신도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작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들은 아벨의 그늘 속에서 제국민을 착취하는 것을 즐겼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랄 정도로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정의를 구현하러 오는 공작의 군대가 정말 못마땅했다.
‘아벨 님께서 알아서 다 처리하시겠지.’
신도들은 아벨만 믿고 나태해진 상태로 윈체스터 공작의 군대를 기다렸다. 곧, 황실의 상징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며 아슬란이 도착했다.
“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기사인가?”
“저놈이 우리 신도들을 마구 갈가리 찢어 죽이며 악명을 높였다지?”
“흥. 아벨 님 앞에만 나서면 오줌이나 지리는 개가 될 터인데.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숙덕거리던 신도들 앞에 아벨이 나섰고, 그는 신성력을 사용해서 마치 그가 이 땅에 강림한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꾸며 가며 신도들에게 명했다.
때마침 아벨의 의상은 화려한 백색과 금색을 조합하여 만든 신관복이었고, 데니스의 갑옷은 칙칙한 검은색이었기에 더욱 대비되었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가 제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어리석고 우매한 인간을 벌하자꾸나, 나의 신도들아.”
한껏 오만함을 담은 아벨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신도들과 윈체스터 공작의 군대가 격돌했다.
그러나 먼저 치고 들어오는 것은 검은 기사, 데니스의 공격이었다.
“뭐야!”
“저 검은 기사, 인간이 아닌 건가?!”
데니스는 셀레누스와의 계약으로 얻은 붉은 신성력을 두르고 성검을 휘두르며 수십의 목을 베었다. 아벨의 신도들은 연약한 나무줄기처럼 그의 칼날에 숭덩숭덩 잘려 나가 목숨을 잃었다.
광폭화를 이용해 성난 멧돼지처럼 파고드는 데니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갑옷 위로 피가 흠뻑 물들어 시야가 방해될 지경이었지만, 데니스는 묵묵히 신도들을 죽이며 나아갔다.
“오호. 저쪽에도 신성력을 이용해 싸우는 놈이 있었군.”
아벨은 무지막지하게 신도들을 죽이며 황성으로 진입하는 데니스를 보고서도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그저 무료하던 찰나에 새롭게 등장한 장난감을 본 것처럼 검붉은 눈을 반짝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얼마나 죽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역겨운 신도들을 베어내어 피로 물든 발을 겨우 황제의 옥좌에까지 들였을 참이었다.
“대단해. 너의 그 무력은 칭찬하마.”
“…….”
“하지만 여기까지야. 너의 발버둥을 가상하게 여겨, 내 친히 너를 상대하는 영광을 주마.”
아벨의 시혜적인 태도에 데니스는 픽 웃더니,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개새끼야,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당장 붙자.”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아벨에게 달려들었다.